서울 최고의 조망대 '안산(鞍山)', 인조의 운명을 가르다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2.01.27. 15:55
안산 봉수대에서 바라본 2022년 임인년 새해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7) 이괄의 난의 승부처, 안산(鞍山)
서울의 서쪽을 대표하는 산 인왕산 바로 옆에는, 안산(鞍山)이 있다. 산의 모양이 마치 말의 안장과 같이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안산은 또한 무악(毋岳)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북한산 인수봉이 아이를 업고 밖을 바라보는 형세여서 아이를 달래기 위한 어머니 산이라는 뜻의 모악(母岳)을 무악으로 읽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394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를 단행하는 과정에서 무악으로 천도하자고 강력히 주장한 인물이 있었다. 하륜(河崙)은 “무악의 국세(局勢)가 비록 낮고 좁다 하더라도, 계림과 평양에 비하여 궁궐의 터가 실로 넓고, 더구나 나라의 중앙에 있어 조운이 통하며, 안팎으로 둘러싸인 산과 물이 또한 증빙할 만하여, 우리 나라 전현(前賢)의 비기(秘記)에 대부분 서로 부합되는 것입니다.”고 하여 무악 천도를 주장했으나, 좌절되었다. 하륜은 태종 때 다시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논의가 진행되었을 때 다시 무악으로의 천도를 주장한, 그야말로 ‘무악맨’이었다.
1394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를 단행하는 과정에서 무악으로 천도하자고 강력히 주장한 인물이 있었다. 하륜(河崙)은 “무악의 국세(局勢)가 비록 낮고 좁다 하더라도, 계림과 평양에 비하여 궁궐의 터가 실로 넓고, 더구나 나라의 중앙에 있어 조운이 통하며, 안팎으로 둘러싸인 산과 물이 또한 증빙할 만하여, 우리 나라 전현(前賢)의 비기(秘記)에 대부분 서로 부합되는 것입니다.”고 하여 무악 천도를 주장했으나, 좌절되었다. 하륜은 태종 때 다시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논의가 진행되었을 때 다시 무악으로의 천도를 주장한, 그야말로 ‘무악맨’이었다.
1. 감시와 의심이 불러온 변란
한때 수도로 적합한 곳으로 논의가 되었던 무악, 즉 안산은 조선시대 역사의 중요한 획을 그은 공간이기도 했다. 1624년 이괄의 반군이 한때 한양을 점령하고 인조 정권을 거의 무너뜨릴 상황에서, 정부군이 반격의 물꼬를 틔웠던 곳이 안산이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1624년(인조 2) 2월, 평안병사 이괄이 지휘하는 반군들이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는 다급한 소식이 들려왔다.
인조는 서울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피란을 서둘러 공주 공산성으로 향했다. ‘인절미’의 이름이 이때 유래했다는 견해도 있다. 즉 인조가 피난 중에 임씨 성의 백성이 찰떡을 인조께 올렸는데 그 떡 맛이 너무 좋았다. 인조가 떡을 올린 사람의 이름을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자 인조가 친히, ‘임씨가 올린 서방이 절미’인, ‘임절미’가 되었다가, 다시 인절미가 되었다고 한다. 인조는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게 되면서, 피난 3관왕의 불명예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괄(李适:1587~1624)의 본관은 경상도 고성(固城)이다. 무과로 관직에 진출했지만,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김류(金瑬)와 이귀(李貴) 등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은 당시 북병사로 있던 이괄의 능력을 보고 반정 참여를 적극 권유했다. 운명의 3월 13일 밤 홍제원에 모인 지휘부는 대장으로 반정군을 이끌어야 할 김류가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않자 크게 당황했다. 일단 무장 출신인 이괄을 임시로 대장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김류는 반정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잡혀갈 각오로 집에 있다가, 뒤늦게 거사 현장으로 달려왔다. 김류가 다시 대장이 되었지만, 이괄은 “김류가 뒤에 왔기에 내가 그를 목 베려 했지만, 이귀가 이를 막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김류에 깊은 반감을 보였다.
인조반정은 성공했지만, 반정 성공 후 논공행상(論功行賞)의 과정에서 이괄은 철저히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김류, 이귀, 김자점 등의 문신들과 무신들 중 신경진, 구인후 등 왕실의 인척들이 일등공신이 되었지만, 이괄은 이등공신으로 밀려났다. “반정에 성공한 뒤에 공로의 등급을 의논하여 정할 때, 이괄이 중간에 들어왔다 하여 그를 일등이 아닌 이등공신으로 삼아 이괄이 크게 불평했다.”라는 기록이 『하담록(荷潭錄)』에 보인다.
또 “그해 여름에 조정에서 관서 지방에 후금이 침입할 염려가 많으므로 이괄로 하여금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나아가 지키게 했다. 이에 이괄이 크게 노하여 마침내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라고 하여 이괄 반란의 주된 원인이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에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반정에 가담했던 아들 이전(李栴)과 이괄의 아우 이수(李遂) 역시 제대로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여기에 더하여 이괄은 평안 병사를 제수받아 지방으로 밀려나면서 인조 정권에 대해 서운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괄은 영변에 부임하는 날부터 정예 장졸 1만 2,000여 명과 임진왜란 때 항복하고 조선에 남은 항왜 및 검사 130명을 부하로 거느리고 추운 계절에도 훈련을 거듭했다. 조정에서는 이괄의 동태를 계속 살폈고, 1624년 1월 이괄이 아들 전과 기자헌(奇自獻), 한명련(韓明璉) 등과 더불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서가 올라왔다. 1월 15일 인조는 우선 이전과 기자헌을 체포해 오도록 했고, 아들에 대한 체포는 이괄을 완전히 자극했다. 1월 17일 이전과 한명련 체포의 명을 받은 조정의 관리들이 이괄의 군영에 오자, 이괄은 이들의 목을 베고 군사 동원을 지시했다. 아들에 대한 체포는 곧 자신에 대한 체포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고,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기보다 병사를 일으키는 반란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인조는 서울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피란을 서둘러 공주 공산성으로 향했다. ‘인절미’의 이름이 이때 유래했다는 견해도 있다. 즉 인조가 피난 중에 임씨 성의 백성이 찰떡을 인조께 올렸는데 그 떡 맛이 너무 좋았다. 인조가 떡을 올린 사람의 이름을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자 인조가 친히, ‘임씨가 올린 서방이 절미’인, ‘임절미’가 되었다가, 다시 인절미가 되었다고 한다. 인조는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게 되면서, 피난 3관왕의 불명예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괄(李适:1587~1624)의 본관은 경상도 고성(固城)이다. 무과로 관직에 진출했지만,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김류(金瑬)와 이귀(李貴) 등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은 당시 북병사로 있던 이괄의 능력을 보고 반정 참여를 적극 권유했다. 운명의 3월 13일 밤 홍제원에 모인 지휘부는 대장으로 반정군을 이끌어야 할 김류가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않자 크게 당황했다. 일단 무장 출신인 이괄을 임시로 대장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김류는 반정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잡혀갈 각오로 집에 있다가, 뒤늦게 거사 현장으로 달려왔다. 김류가 다시 대장이 되었지만, 이괄은 “김류가 뒤에 왔기에 내가 그를 목 베려 했지만, 이귀가 이를 막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김류에 깊은 반감을 보였다.
인조반정은 성공했지만, 반정 성공 후 논공행상(論功行賞)의 과정에서 이괄은 철저히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김류, 이귀, 김자점 등의 문신들과 무신들 중 신경진, 구인후 등 왕실의 인척들이 일등공신이 되었지만, 이괄은 이등공신으로 밀려났다. “반정에 성공한 뒤에 공로의 등급을 의논하여 정할 때, 이괄이 중간에 들어왔다 하여 그를 일등이 아닌 이등공신으로 삼아 이괄이 크게 불평했다.”라는 기록이 『하담록(荷潭錄)』에 보인다.
또 “그해 여름에 조정에서 관서 지방에 후금이 침입할 염려가 많으므로 이괄로 하여금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나아가 지키게 했다. 이에 이괄이 크게 노하여 마침내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라고 하여 이괄 반란의 주된 원인이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에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반정에 가담했던 아들 이전(李栴)과 이괄의 아우 이수(李遂) 역시 제대로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여기에 더하여 이괄은 평안 병사를 제수받아 지방으로 밀려나면서 인조 정권에 대해 서운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괄은 영변에 부임하는 날부터 정예 장졸 1만 2,000여 명과 임진왜란 때 항복하고 조선에 남은 항왜 및 검사 130명을 부하로 거느리고 추운 계절에도 훈련을 거듭했다. 조정에서는 이괄의 동태를 계속 살폈고, 1624년 1월 이괄이 아들 전과 기자헌(奇自獻), 한명련(韓明璉) 등과 더불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서가 올라왔다. 1월 15일 인조는 우선 이전과 기자헌을 체포해 오도록 했고, 아들에 대한 체포는 이괄을 완전히 자극했다. 1월 17일 이전과 한명련 체포의 명을 받은 조정의 관리들이 이괄의 군영에 오자, 이괄은 이들의 목을 베고 군사 동원을 지시했다. 아들에 대한 체포는 곧 자신에 대한 체포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고,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기보다 병사를 일으키는 반란의 길을 택한 것이다.
시민들이 산책로로 자주 애용하는 안산 자락길
2. 승승장구하는 반군들
순변사 한명련이 합류한 이괄의 반군은 1월 22일 영변을 출발했다. 장만이 진영을 구축하고 있는 평양을 피하여 개천 쪽으로 방향을 돌려 자산, 강동, 황주 개성을 거쳐 2월 8일에 한양 근교의 홍제원까지 이르렀다. 인조는 이괄의 선봉군이 한양 입성 하루 전인 2월 8일 가마를 타고 창경궁 명정문을 빠져 나갔다. 홍월 9일 오후 이괄 반군의 선봉 30여 기병은 한양에 입성했고, 이괄은 다음날 한양으로 들어왔는데,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음이 『연려실기술』은의 기록에서 확인이 된다.
「초 9일 적병 30여 기가 먼저 서울에 도착하여 사람들을 선동하기를 “성 안의 사람들은 조금도 놀라지 말라, 새 임금이 즉위할 것이다”라고 했다. 10일에 이괄과 한명련이 말을 타고 나란히 입성했다. 이괄의 아우 수와 이충길(李忠吉)과 이시언(李時言)의 아들 욱(澳) 등이 수천 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무악 북쪽까지 나아가 적군을 맞아 인도했고 또 관공서의 아전과 관속들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그들을 맞이했으며, 서울의 방민(坊民)들도 길에 황토를 깔며 환영했다. 이괄이 서울에 들어오자 적군은 경복궁 옛 터에 주둔했다. 이때 왕자 흥안군(興安君) 제(瑅)가 임금 일행을 따라 한강을 건넜다가 도중에 도망하여 이괄에게 항복했다. 이괄은 마음속으로 됨됨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그를 임금으로 삼겠다 하고 경기방어사 이홍립을 대장으로 삼아 제를 호위하게 했다.」
흥안군은 선조와 후궁인 온빈(溫嬪) 한씨 소생의 왕자로, 백성들 사이에서 “제를 임금으로 삼다니 오래 가지 못하겠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이괄이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일시적으로 인조와 흥안군이라는 두 명의 왕이 공존하는 상태가 되었다. 한양 백성들의 환대에 고무된 이괄은 성안에 남아 있는 친척들을 불러들여 문무백관에 배치하고 정부를 구성했다. 무뢰배들까지 투항하여 한 자리씩 얻는 상황도 벌어졌다.
이괄의 한양 진격을 저지하지 못한 도원수 장만은 파주까지 와 있다가 인조가 공주로 피란 갔다는 소식을 듣고, 10일 이른 새벽에 벽제관 북쪽 혜음령에서 장수들과 전략을 논의했다. 이때 안주목사 정충신(鄭忠信)이 나서 반군보다 먼저 안산(鞍山)을 점거하고 진을 치면 한양도성을 내려다보며 적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고지를 점령하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남이흥(南以興) 등 여러 장수들이 지지했고, 장만도 수용했다. 안산 전투의 서막은 그렇게 오르고 있었다.
「초 9일 적병 30여 기가 먼저 서울에 도착하여 사람들을 선동하기를 “성 안의 사람들은 조금도 놀라지 말라, 새 임금이 즉위할 것이다”라고 했다. 10일에 이괄과 한명련이 말을 타고 나란히 입성했다. 이괄의 아우 수와 이충길(李忠吉)과 이시언(李時言)의 아들 욱(澳) 등이 수천 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무악 북쪽까지 나아가 적군을 맞아 인도했고 또 관공서의 아전과 관속들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그들을 맞이했으며, 서울의 방민(坊民)들도 길에 황토를 깔며 환영했다. 이괄이 서울에 들어오자 적군은 경복궁 옛 터에 주둔했다. 이때 왕자 흥안군(興安君) 제(瑅)가 임금 일행을 따라 한강을 건넜다가 도중에 도망하여 이괄에게 항복했다. 이괄은 마음속으로 됨됨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그를 임금으로 삼겠다 하고 경기방어사 이홍립을 대장으로 삼아 제를 호위하게 했다.」
흥안군은 선조와 후궁인 온빈(溫嬪) 한씨 소생의 왕자로, 백성들 사이에서 “제를 임금으로 삼다니 오래 가지 못하겠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이괄이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일시적으로 인조와 흥안군이라는 두 명의 왕이 공존하는 상태가 되었다. 한양 백성들의 환대에 고무된 이괄은 성안에 남아 있는 친척들을 불러들여 문무백관에 배치하고 정부를 구성했다. 무뢰배들까지 투항하여 한 자리씩 얻는 상황도 벌어졌다.
이괄의 한양 진격을 저지하지 못한 도원수 장만은 파주까지 와 있다가 인조가 공주로 피란 갔다는 소식을 듣고, 10일 이른 새벽에 벽제관 북쪽 혜음령에서 장수들과 전략을 논의했다. 이때 안주목사 정충신(鄭忠信)이 나서 반군보다 먼저 안산(鞍山)을 점거하고 진을 치면 한양도성을 내려다보며 적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고지를 점령하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남이흥(南以興) 등 여러 장수들이 지지했고, 장만도 수용했다. 안산 전투의 서막은 그렇게 오르고 있었다.
서울 정도 600주년을 맞아 서울시가 복원한 안산봉수대
3. 승부의 분수령 안산 전투
반군 진압의 선봉장 정충신은 김양언(金良彦)으로 하여금 기병 30명을 이끌고 연서역을 지나 안산 정상에 숨어들어 봉수대부터 점령했다. 당시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변고를 올리는 봉화가 올라오면 무악에서 이를 받아 남산 봉수대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정충신은 봉수대 탈취 후에도 평상시의 봉화 모양인 일거(一炬)만 올리도록 해 반군의 경계를 피했다. 『한경지략』에도 “무악은 인조 갑자년 이괄의 난 때 정충신이 싸워 이긴 전승지다. 저녁에 올리는 봉화를 일찍 올리니 남산에서도 이에 따랐다”라고 해 봉화 작전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정충신은 부대를 통솔하여 무악 상상봉에 진영을 구축했다.
관군의 치밀한 작전에 비해 이괄과 한명련은 관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정면 공격을 추진했다. 전투 초반 이괄은 한양 백성들에게 인왕산 성벽 위에 올라 그들이 관군을 물리치는 모습을 구경하라고 할 정도로 기세등등했다. 인왕산 곡성(曲城)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성벽을 따라 도성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2월 11일 아침 돈의문을 나온 반군은 한명련이 항왜(降倭)를 선봉으로 앞에서 진격했고, 이괄은 중간에서 반군을 독려했다. 안산 전투에서는 바람의 방향도 전투의 향방을 가르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처음 바람은 동쪽에서 불어와 무악 꼭대기로 향하는 방향이어서 반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총탄과 화살이 바람을 타고 안산의 정상부를 맹공한 것이다. 장만 휘하의 관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풍이 서북풍으로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항왜의 조총의 적중률은 떨었고, 탄환 연기와 모래바람 때문에 반군의 전열이 흐트러졌다. 관군의 반격 속에 반군의 후퇴가 이어졌다.
이괄과 한명련이 후퇴하여 서대문까지 왔을 때는 이미 성안에 있는 백성들에 의해 문이 잠긴 상황이었다. 이에 반란군은 성벽을 끼고 서소문과 숭례문을 거쳐 도성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정충신이 이들의 추격을 주장했으나 남이홍은 매복을 우려해 추격을 멈추자고 했다. 이괄은 도성 안에 숨어 있다가 야음을 틈타 광희문으로 빠져나와, 12일 새벽에 삼밭나루를 건너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관군의 추격을 받고 경안역(慶安驛)까지 탈출했으며 이날 밤 이천(利川)의 민가로 피신했다.
이때 반군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기익헌과 이수백이 잠자는 틈을 이용하여 이괄과 그의 아들 전, 아우 수, 그리고 한명련 등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한 것이었다. 광주 소천강에서 심기원과 신경진 등에 의해 체포된 흥안군은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처형되었다. 잠시간의 왕 노릇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반란 진압 후 한양에 돌아온 인조는 파괴가 심했던 창덕궁 대신에 경덕궁(경희궁)에 거처했다.
이괄의 난은 진압으로 막을 내렸지만 사건의 파장은 컸다. 한양의 치안이 불안해진 상황에서 궁궐의 방화와 약탈도 이어졌다. 궁궐 안에 보관되었던 『승정원일기』도 사라졌다. 반군에 가담했거나, 이들에 내응한 사람 상당수는 부역자로 몰려 효시(梟示) 되었다. 이괄과 함께 반군의 중심으로 활약했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은 후금 진영으로 투항하였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후금군의 선봉장이 되어 조선 침략에 앞장을 서게 된다.
관군의 치밀한 작전에 비해 이괄과 한명련은 관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정면 공격을 추진했다. 전투 초반 이괄은 한양 백성들에게 인왕산 성벽 위에 올라 그들이 관군을 물리치는 모습을 구경하라고 할 정도로 기세등등했다. 인왕산 곡성(曲城)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성벽을 따라 도성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2월 11일 아침 돈의문을 나온 반군은 한명련이 항왜(降倭)를 선봉으로 앞에서 진격했고, 이괄은 중간에서 반군을 독려했다. 안산 전투에서는 바람의 방향도 전투의 향방을 가르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처음 바람은 동쪽에서 불어와 무악 꼭대기로 향하는 방향이어서 반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총탄과 화살이 바람을 타고 안산의 정상부를 맹공한 것이다. 장만 휘하의 관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풍이 서북풍으로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항왜의 조총의 적중률은 떨었고, 탄환 연기와 모래바람 때문에 반군의 전열이 흐트러졌다. 관군의 반격 속에 반군의 후퇴가 이어졌다.
이괄과 한명련이 후퇴하여 서대문까지 왔을 때는 이미 성안에 있는 백성들에 의해 문이 잠긴 상황이었다. 이에 반란군은 성벽을 끼고 서소문과 숭례문을 거쳐 도성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정충신이 이들의 추격을 주장했으나 남이홍은 매복을 우려해 추격을 멈추자고 했다. 이괄은 도성 안에 숨어 있다가 야음을 틈타 광희문으로 빠져나와, 12일 새벽에 삼밭나루를 건너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관군의 추격을 받고 경안역(慶安驛)까지 탈출했으며 이날 밤 이천(利川)의 민가로 피신했다.
이때 반군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기익헌과 이수백이 잠자는 틈을 이용하여 이괄과 그의 아들 전, 아우 수, 그리고 한명련 등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한 것이었다. 광주 소천강에서 심기원과 신경진 등에 의해 체포된 흥안군은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처형되었다. 잠시간의 왕 노릇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반란 진압 후 한양에 돌아온 인조는 파괴가 심했던 창덕궁 대신에 경덕궁(경희궁)에 거처했다.
이괄의 난은 진압으로 막을 내렸지만 사건의 파장은 컸다. 한양의 치안이 불안해진 상황에서 궁궐의 방화와 약탈도 이어졌다. 궁궐 안에 보관되었던 『승정원일기』도 사라졌다. 반군에 가담했거나, 이들에 내응한 사람 상당수는 부역자로 몰려 효시(梟示) 되었다. 이괄과 함께 반군의 중심으로 활약했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은 후금 진영으로 투항하였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후금군의 선봉장이 되어 조선 침략에 앞장을 서게 된다.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