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한파 속 봄날을 꿈꾸며…한양의 꽃구경 명소 '필운대'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1.12.29. 13:34

수정일 2021.12.2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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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
노란 금계국이 인왕산을 배경으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노란 금계국이 인왕산을 배경으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5) 이항복과 필운대

서울의 핫플레이스 중 한 곳인 서촌(西村). 경복궁 서쪽과 인왕산 사이 지역을 지칭하는 서촌은 북촌에 대응하여 생긴 명칭이다. 이 지역은 세종대왕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여 ‘세종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시대 서촌 일대는 중인(中人) 문화의 중심 공간이었는데, 명문가 양반들도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선조, 광해군 시대를 대표하는 관료이자 학자인 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집터 필운대(弼雲臺)는 이항복과 서촌의 인연을 잘 보여주고 있다.  

1. 이항복과 필운대와의 인연

현재 서울 배화여고 건물 바로 뒤편에는 바위에 또렷하게 새긴 세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필운대(弼雲臺)’라는 각자(刻字)이다. ‘필운’은 이항복의 호로서, 이곳의 주인이 이항복임을 알려준다. 이항복은 어린 시절 이덕형과의 우정을 보여주는 일화 ‘오성과 한음’ 이야기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 일화는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두 사람은 다섯 살의 나이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선조, 광해군 대에 판서와 정승직을 서로 주고받으며 국방과 경제, 외교에 탁월한 공을 세운 모습을, 이들의 어린 시절 우정으로 연결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이항복이 필운대에 거처하게 된 것은 장인 권율(權慄)이 사위인 이항복에게 집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조선전기까지는 혼인 풍속에서도 처가살이가 관행화되었고, 딸에게 집을 물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필운(弼雲)’이라는 말은 1537년 중국 사신으로 온 공용경과 오희맹이 인왕산을 필운산(弼雲山)으로 칭한 것에서 유래한다. 경복궁을 오른편에서 보필한다는 의미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비고」에는 필운대에 대해, “인왕산 아래에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이 소시에 대 아래 원수(元帥) 권율의 집에 처가살이하였으므로 인하여 필운이라 불렀는데, 석벽에 새긴 필운대 세 글자는 곧 이백사의 글씨이다. 대 곁 인가에서 꽃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경성 사람들의 봄철 꽃구경은 반드시 먼저 이곳을 손꼽게 되었다.”고 하여, 필운대의 바위에 새긴 글씨가 이항복의 친필이라는 것과 이곳이 서울에서도 봄날 꽃구경의 명소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문신 윤기(尹愭)의 『무명자집(無名子集)』 ‘필운대에 올라’라는 시에도, “봄기운이 한양에 무르익음 문득 알고/필운대 위에 올라 고운 봄빛 구경하네 /바람 잦아서 거리마다 버들가지 고요하고/따스하여 온갖 꽃들 아리따움 다투누나”라 하여 필운대에서 꽃구경을 하던 풍광이 나타나 있다. 

필운대 옆에는 1873년(고종 10) 경주 이씨로 이항복의 9대손인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찾아와 이항복을 생각하며 지었던 한시가 새겨져 있다. ‘우리 할아버지 옛날 살던 집을 후손이 찾아왔네/푸른 석벽에는 흰구름이 깊이 잠겨 있고/남겨진 풍속이 백년동안 오래 전해졌으니/부로(父老)의 의관(衣冠)은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 필운이라는 이름은 이항복이 자주 사용하지 않은 호였지만, 그가 바위에 남긴 ‘弼雲臺’라는 석자 때문에 아직도 강하게 기억이 되고 있다. 

옛사람들은 필운대 꽃구경을 한양의 명승 가운데 하나로 꼽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또 이곳에서 바위를 타고 오르면 인왕산을 등지고 왼편으로 가까이 우뚝 솟은 북악이 보이고, 그 뒤로 북한산의 비봉, 문수봉, 보현봉과 백운대까지 훤히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필운대 앞쪽은 높은 건물로 인해 시야가 완전히 막혀버렸고 초라하게 축대 바위만이 남아 있고, 주변이 학교 건물에 막혀 현재의 필운대에서 제대로 서울의 풍경을 감상하기는 어렵다. 
건물 뒤의 협소한 공간에 위치한 필운대
건물 뒤의 협소한 공간에 위치한 필운대

2.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들어온 중인

조선시대 중인은 양반과 상민(常民:농민, 상인, 수공업자)의 중간에 위치했던 신분이었다. 중인은 주로 기술직에 종사한 역관, 의관, 율관이나, 양반의 소생이지만 첩의 아들인 서얼, 중앙관청의 서리및 지방의 향리 등을 지칭하였다. 양반은 아니면서 상민보다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중인 중에서 역관이나 의관, 율관은 오늘날 외교관, 의사, 변호사에 해당하는 사람들로서 요즈음에 태어났다면 최고의 지위에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신분 차별이 엄연히 존재했던 조선시대에 중인은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사회의 주변부를 떠돌았다. 

그러나 조선후기, 18세기 이후에 접어들면서 중인층을 중심으로 신분 상승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신분 상승 운동의 모델은 양반이었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지금의 문학 동호회와 유사한 시사(詩社)의 결성이었다. 중인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그들이 지은 시와 문장을 발표면서 동류의식을 확인하고 결집해 나갔다. 중인들의 문화 운동을 다른 물로 위항(委巷) 또는 여항(閭巷) 문학 운동이라 한다. ‘위항’이나 ‘여항’은 누추한 거리를 뜻하는 말로서 중인층 이하 사람들이 사는 거리를 뜻하였지만, 대체로 중인들의 문학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중인 중에서 중앙관청의 하급 관리로 일했던 중인들이 주로 거처했던 곳은 인왕산 아래 옥계천이 흐르는 곳이었다. 따라서 중인층의 시사 활동은 인왕산과 옥류천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고, ‘옥류천 계곡’에서 따온 ‘옥계’라는 말을 따서 ‘옥계시사(玉溪詩社)’라 하였다. 지금도 이 지역을 옥인동이라 부르는 것은 옥계와 인왕산에서 한 글자씩을 따온 것이다. 

필운대 근처에서도 시사 활동이 활발하였다. 유본예가 쓴 『한경지략』의 명승, 필운대 항목에는, “여항인들이 술을 가지고 시부(詩賦)를 읊으려고 날마다 모여들었는데, 세상에서는 그 시를 필운대 풍월(風月)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필운대는 정선(鄭敾)의 그림으로도 남아 있다. 『경교명승첩』에 수록된 「필운대」에는 인왕산을 등지고 있는 필운대 바위의 웅장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필운대 상춘도」에는 만발한 꽃 속에서 시회를 즐기는 선비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인왕산은 대대로 경치가 좋은 명승지로 손꼽혀왔고, 그 자락에는 한양의 5대 명승지인 인왕동(仁王洞)과 백운동(白雲洞)이 있었다. 현재의 정부청사 건물이 있는 6조 거리와 가까워서 양반과 중인들이 터를 물려가며 살았다. 현재의 청운초등학교 근처인 청풍계(淸風溪) 일대에는 양반들이, 인왕산에서 발원하는 옥계와 송석원, 필운대 주변에는 중인들이 모여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필운대, 청풍계, 송석원 등 중인문화의 자취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서촌을 찾아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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