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의 저주, 사도세자의 비극…창경궁 구중궁궐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1.08.18. 16:57
창경궁 전경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6) 대비를 위해 세운 궁궐, 창경궁
1469년 11월 성종(成宗:1457~1494, 재위 1469~1494)이 조선의 아홉 번째 왕으로 즉위했다. 예종의 장남인 제안대군과 친형 월산군을 제치고 왕이 된 데는 장인인 한명회의 후견인 역할이 컸다. 성종은 왕이 된 후 새로운 궁궐 건설에 착수했다. 세 명의 대비인 정희왕후 윤씨, 안순왕후 한씨, 소혜왕후 한씨를 편안하게 모시겠다는 명분과 함께 넘버3의 위치에 있었던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대비들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1482년(성종 13) 성종은 세종대에 상왕인 태종을 위하여 지었던 수강궁(壽康宮)을 확장하고 수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세 대비의 처소를 마련하기 위한 선행 작업이었다. 아무래도 궁궐을 완전히 새롭게 조성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건물을 활용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요즈음으로 본다면 건물의 리모델링과 확장이라고 할까? 1485년 수리가 완성된 수강궁은 창경궁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어서 창덕궁이 수용할 수 없는 공간 활용의 측면에서도 필요했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이 근정전이나 인정전처럼 남향을 하지 않고, 동향으로 만들어진 것도 이곳이 왕실 여인들을 위한 공간에서 출발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창경궁(昌慶宮) 건물의 이름을 짓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었다. 『창경궁지』에는 “서거정에 명하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했는데, 전은 명정(明政), 문정(文政), 수녕(壽寧), 환경(歡慶), 경춘(景春), 인양(仁陽), 통명(通明)이고, 당(堂)은 양화(養和), 여위(麗暉)이며, 합(閣)은 사성(思誠)이고, 정(亭)은 환취(環翠)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482년(성종 13) 성종은 세종대에 상왕인 태종을 위하여 지었던 수강궁(壽康宮)을 확장하고 수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세 대비의 처소를 마련하기 위한 선행 작업이었다. 아무래도 궁궐을 완전히 새롭게 조성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건물을 활용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요즈음으로 본다면 건물의 리모델링과 확장이라고 할까? 1485년 수리가 완성된 수강궁은 창경궁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어서 창덕궁이 수용할 수 없는 공간 활용의 측면에서도 필요했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이 근정전이나 인정전처럼 남향을 하지 않고, 동향으로 만들어진 것도 이곳이 왕실 여인들을 위한 공간에서 출발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창경궁(昌慶宮) 건물의 이름을 짓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었다. 『창경궁지』에는 “서거정에 명하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했는데, 전은 명정(明政), 문정(文政), 수녕(壽寧), 환경(歡慶), 경춘(景春), 인양(仁陽), 통명(通明)이고, 당(堂)은 양화(養和), 여위(麗暉)이며, 합(閣)은 사성(思誠)이고, 정(亭)은 환취(環翠)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창경궁 명정전
정문은 홍화문(弘化門), 법전은 명정전(明政殿)이었다. 창경궁의 정문 이름이 홍화문으로 정해지면서, 원래 동소문이었던 홍화문은 혜화문(惠化門)으로 바꾸었다. 창경궁에는 중궁전인 통명전을 비롯하여 환경전, 경춘전, 자경전 등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북쪽으로 넓게 펼쳐진 후원은 창덕궁의 후원과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명목상으로는 독립적인 궁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창덕궁에 부족한 주거 생활공간을 보완하는 기능을 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묶여서 동쪽에 있는 궁궐인 동궐(東闕)로 인식되었으며, 이것은 순조대에 작성된 「동궐도(東闕圖)」의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완전히 불타 없어졌으나 광해군 대에 수리사업에 착수하여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추었다. 헌종 연간에 편찬되고, 1908년에 증보된 『창경궁지』에는 창경궁의 역사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창경궁은 창덕궁 동쪽에 있는데, 옛 수강궁 터이다. 성종 14년(1483년) 계묘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 등 세 대비를 위하여 세웠다. 그 후 임진왜란의 화재를 만나 광해군 8년(1616년) 병진년에 이르러 다시 수리하였다. 동쪽을 홍화문이라 하는데, 그 안에 대궐 안 도랑이 있고, 거기에 걸린 다리를 옥천이라 한다. 또 그 동쪽을 통화문(通化門) 이라 하고, 북쪽을 집춘문(集春門), 동남쪽을 선인문(宣仁門)이라 한다. .... 광해 8년 병진년(1616년)에 창경궁 중건을 마쳤다. ... 정조 원년에 월근문(月覲門)을 통화문 북쪽 산기슭에 세워 경모궁과 통하게 하니, 전왕을 사모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음이라. 집춘문(集春門) 바깥은 바로 반궁(泮宮:성균관)인데, 역대 임금이 문묘에 참배할 때 이 문을 거쳤다. 1830년 8월에 불이 나서 전각이 많이 타 버렸다. 1833년 계사에 다시 수리하고, 창덕궁과 같은 때에 지어 세웠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창경궁은 여러 차례 화마에 시달렸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궁궐 건물 상당 부분이 훼손되자, 인조 연간에 복원공사에 들어갔다. 1633년 창경궁 공사가 본격화되자 인조가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다.
창경궁은 광해군에서 인조 연간에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국왕이 거처하면서 창덕궁을 보완하는 단순한 기능에서 벗어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궁궐로 자리를 잡아 갔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복원이 되지 못한 경복궁이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창덕궁이 법궁, 창경궁은 경희궁과 더불어 이궁(離宮)으로 역할을 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완전히 불타 없어졌으나 광해군 대에 수리사업에 착수하여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추었다. 헌종 연간에 편찬되고, 1908년에 증보된 『창경궁지』에는 창경궁의 역사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창경궁은 창덕궁 동쪽에 있는데, 옛 수강궁 터이다. 성종 14년(1483년) 계묘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 등 세 대비를 위하여 세웠다. 그 후 임진왜란의 화재를 만나 광해군 8년(1616년) 병진년에 이르러 다시 수리하였다. 동쪽을 홍화문이라 하는데, 그 안에 대궐 안 도랑이 있고, 거기에 걸린 다리를 옥천이라 한다. 또 그 동쪽을 통화문(通化門) 이라 하고, 북쪽을 집춘문(集春門), 동남쪽을 선인문(宣仁門)이라 한다. .... 광해 8년 병진년(1616년)에 창경궁 중건을 마쳤다. ... 정조 원년에 월근문(月覲門)을 통화문 북쪽 산기슭에 세워 경모궁과 통하게 하니, 전왕을 사모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음이라. 집춘문(集春門) 바깥은 바로 반궁(泮宮:성균관)인데, 역대 임금이 문묘에 참배할 때 이 문을 거쳤다. 1830년 8월에 불이 나서 전각이 많이 타 버렸다. 1833년 계사에 다시 수리하고, 창덕궁과 같은 때에 지어 세웠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창경궁은 여러 차례 화마에 시달렸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궁궐 건물 상당 부분이 훼손되자, 인조 연간에 복원공사에 들어갔다. 1633년 창경궁 공사가 본격화되자 인조가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다.
창경궁은 광해군에서 인조 연간에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국왕이 거처하면서 창덕궁을 보완하는 단순한 기능에서 벗어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궁궐로 자리를 잡아 갔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복원이 되지 못한 경복궁이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창덕궁이 법궁, 창경궁은 경희궁과 더불어 이궁(離宮)으로 역할을 했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집필하고 정조가 태어난 경춘전
1680년 인경왕후가 천연두에 걸리자, 숙종은 경희궁에서 거처를 창경궁을로 옮겼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흉물을 묻었던 통명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문정전,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집필하고 정조가 태어난 경춘전이 창경궁에 소재한 건물이었다. 영조는 1750년 균역법 실시 과정에서 창경궁 홍화문 밖에서 직접 백성들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이외에 창경궁에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을 위해 지은 자경전(慈慶殿)이 있다. 언덕에 세운 자경전은 사도세자를 모신 사당인 경모궁(景慕宮:현재의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과 마주 볼 수 있게 하였는데, 정조의 부모에 대한 효심이 구현된 건물이다.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거처로 순조를 출생한 집복헌(集福軒)도 창경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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