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형 효령대군, 91세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1.07.21. 14:00

수정일 2021.07.2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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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효령대군을 모신 사당 ‘청권사’
효령대군을 모신 사당 ‘청권사’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 효령대군과 청권사

서울의 지하철 2호선 방배역 옆에는 청권사(淸權祠)라는 사당이 있다. 태종의 두 번째 아들 효령대군(孝寧大君:1396~1486)을 모신 사당이다. 효령대군 사후에 바로 조성되지는 않았고, 숙종 대에 양녕대군을 모신 사당인 지덕사(至德祠)를 조성한 것을 전범으로 삼아 영조 대인 1736년에 조성하였다. 위치는 효령대군의 묘역이 있던 곳이었다. 

‘청권’이라는 이름은 『논어』 권18 「미자(微子)」의 ‘신중청 폐중권(身中淸 廢中權)’에서 따온 말이다. 주나라 태왕의 세 아들 중 둘째인 우중(虞仲)의 ‘처신이 청도(淸道)에 맞았고, 스스로 폐한 것이 권도(權道)에 맞았다.’는 고사를 효령대군에 비유한 것이다. 정조 때인 1789년에 사액을 받았고, 이후 헌종과 고종 연간에 사당을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편액을 하사하면서, ‘우리 왕가에 효령과 양녕 두 대군이 계셨네 / 오랜 후세에 오히려 감회가 있는데 / ... 길일을 가려서 편액을 내리고 / 근신을 보내어 잔을 드리게 하네/ 라는 제문을 내렸다.

효령대군의 이름은 보(補), 초명은 호(祜)다. 효령대군은 ‘효령’이라는 군호에서 드러나듯이 어려서부터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태종이 “효령과 충녕이 조석으로 드나들며 혼정신성(昏定晨省: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림) 했다.”라고 표현한 것이나, 변계량이 “효령대군은 온아하고 문명한 자질을 가졌고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의 행실에 독실하며, ... 자신의 몸가짐을 겸손하게 해 털끝만큼도 교만한 기색이 없으니, 그처럼 훌륭할 수 없다”라고 한 것은 효령대군의 인물됨을 잘 보여주고 있다. 

1418년 8월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된 태종은 중국 사신의 접견과 같은 중요 행사에 효령대군을 꼭 배석시켰다. 세종 또한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인 형을 인정하고 그의 자문을 받았았다. 효령대군은 세종부터 성종까지 왕실과 국가의 원로로서 최대의 예우를 받으며 평안한 일생을 보내다가 1486년(성종 17) 5월 11일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효령대군 묘소
효령대군 묘소

『성종실록』에 정리된 효령대군의 졸기는 “젊어서부터 독서하기를 좋아하고 활쏘기를 잘하였는데, 일찍이 태종을 따라 평강에서 사냥하면서 다섯 번을 쏘아 다섯 번 다 맞추니, 위사(衛士)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태종이 일찍이 편치 않으므로 이보(李?)가 몸소 탕약을 써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태종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노비를 내려 주었다. 세종께서 우애가 지극히 도타와서 늘 그 집에 거둥하여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마침내 저녁이 되어서야 파하곤 하였다.”와 같이, 효령대군을 칭송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불교에 빠진 점은 비판을 하고 있다. “이보는 불교를 심하게 믿어서 머리 깎은 사람들의 집합 장소가 되었으며, 무릇 중외의 사찰은 반드시 수창해 이를 영건했다. 세조가 불교를 숭신해 승려들로 하여금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다닐 수 있도록 했으니, 반드시 이보의 권유가 아닌 것이 없었다.”라고 한 기록에서는 효령대군의 불교 숭상에 대해 사관들이 비판적인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실제 효령대군은 불교의 중흥에 크게 기여했다. 관악산의 연주암(戀主庵)을 중건하였는데, 이것은 현재에도 연주암에 효령대군의 초상을 봉안한 효령각(孝寧閣)이 있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월출산 무위사, 만덕산 백련사 중창 및 양주 회암사의 중수를 건의하였고, 수많은 불사 개최의 중심에도 그가 있었다.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면서 효령대군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한 것 역시 효령대군이 불교에 깊은 지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외에도 불교 경전의 언해 사업에 적극 참여해 조선전기에 불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 이처럼 불교에 심취한 효령대군을 일컬어 양녕대군은 보살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보가 일찍이 절에 예불하러 나아갔는데, 양녕대군 이제(李禔)가 개를 끌고 팔에는 매를 받치고는 희첩(姬妾)을 싣고 가서 절의 뜰에다 여우와 토끼를 낭자하게 여기저기 흩어 놓으니, 이보가 마음에 언짢게 여겨, 이에 말하기를, “형님은 지옥이 두렵지도 않습니까?”하니, 이제가 말하기를,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고 죽어서는 보살의 형이 될 것이니, 내 어찌 지옥에 떨어질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한 기록이 『성종실록』에 보인다. 

효령대군의 삶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91세라는 이례적인 장수다. 조선 역대 왕의 평균 수명이 47세인 점을 고려하면 효령대군의 장수는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왕 중에는 영조가 83세라는 장수를 누렸는데 영조보다도 장수한 셈이다. 효령대군의 장수는 권력에의 미련을 버리고 불교에 심취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전국의 명산을 두루 돌아다닌 덕분이 아닐까? 서울의 방배동에 조성되어 있는 사당 청권사에서 효령대군의 삶을 반추해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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