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안, 향기롭고 청정한 공간인 길상사는 1997년 세워졌다.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흐뭇한 이야기를 가득 품고 있는 곳이다.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요정으로 꼽혔던 대원각이 불사로 거듭난 것은 1,000억 원대의 재산을 아낌없이 시주 한 김영한 덕분이다. 김영한은 시인 백석으로부터 ‘자야’라는 아명으로 불리며 서로 사랑한 사이다. 해방 후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영영 이별, 평생을 그리워하다 결국 홀로 여생을 마친다.
대원각으로 크게 성공한 김영한은 1987년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받아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 대지와 40여 동의 건물을 시주하면서 사찰 설립을 간청한다. 수 년에 걸쳐 거절해 오던 법정 스님이 1995년 이를 받아들여 설립한 사찰이 바로 길상사이며 이때 김영한은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았다.
길상사는 1997년 개산법회에 김수환 추기경을 초청하는 등 종교 사이의 벽을 허물어버리는 것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길상사는 음식점이었던 건물들을 그대로 사찰로 이용하여 불교 신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도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곳이다. 가을 단풍으로 아름답고 고즈넉한 길상사에 법정 스님의 삶과 말씀, 길상사의 유래를 찾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길상사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정경으로, 서울 도심과 전혀 다른 세상이 일주문 안에서 펼쳐진다 ⓒ양인억
작은 계곡을 건너 ‘시주 길상화 공덕비' 안내문을 살펴보고 있는 시민들. 안내문에는 길상사의 간단한 기원, 김영한과 백석 시인과의 관계 그리고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 한 편이 적혀 있다 ⓒ양인억
'길상화 공덕비' 뒤편의 사당 지붕을 배경으로 빨간 단풍이 햇빛을 받아 불타고 있다 ⓒ양인억
스님들만의 공간으로 언덕길을 오르는 길상사 스님. 코로나19로 인해 스님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으며 스님들의 공간은 일반인의 출입 자제를 요청하는 푯말이 있다 ⓒ양인억
법정 스님을 모신 진영각에 많은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전각 안에는 스님의 영정, 유서, 친필 원고 및 유품들이 전시되고 있으나 실내 촬영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양인억
법정 스님이 직접 만들어 강원도 산골에서 사용하던 의자. 의자 옆 '스님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는 노트 속에는 시민들의 사연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양인억
진영각 담장에 스님을 뵙고 간 방문객들이 쌓아 올린 아기자기한 돌탑들이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양인억
길상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음식점을 사찰로 바꾸면서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청을 하지 않아 더 정감이 간다 ⓒ양인억
극락전의 한옥 기와지붕이 가을을 맞아 다양한 색상의 단풍 든 나무들과 잘 어울린다 ⓒ양인억
길상사 극락전을 스케치하고 있는 외국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양인억
길상사에 출사 나온 시민들이 범종각 안의 범종을 촬영하고 있다 ⓒ양인억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진 조각가 최종태의 ‘관음보살상'.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님 사이의 종교의 벽을 허무는 노력에 화답한 작품이다.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양인억
'길상7층보탑'은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탑으로 법정스님과 길상화 보살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종교화합의 의미를 전하고자 한 시민이 무상으로 기증한 것이다. 불자 한 분이 탑돌이를 하면서 탑을 향해 소원을 빌고 있다 ⓒ양인억
완연한 가을 속 길상사에는 고즈넉한 여유가 흐른다 ⓒ양인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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