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워진 몸보다 훨씬 더 무거운 것은...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5.08.13. 16:02

수정일 2015.11.16. 05:43

조회 790

산모ⓒ뉴시스

수우 족의 언어에는 임신을 뜻하는 낱말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에는 ‘강해진다’는 뜻이 담겨 있다.
또 어떤 낱말은 ‘과도한 짐을 지고 있다’를 의미한다.
--메리 크로우 도그 《내 이름은 용감한 새》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87

인디언, 혹은 아메리칸 인디언, 네이티브 아메리칸, 아메린디언스(Amerindians)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 중에 수우(Sioux)이라는 부족이 있다.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라는 기도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수우 족은 평원의 인디언 부족들 중에서 가장 완강하게 자신들의 땅을 침범한 백인들에 맞서 싸웠다. 미국 정부에 항복한 후에도 수우 족의 추장들은 전사들을 이끌고 보호구역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다가 1890년 12월 운디드니에서 대학살 당한 후 마침내 흩어졌다.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에서 주인공이 함께 살게 되는 부족이 바로 수우족 중에서 가장 서쪽에 살던 테톤족이다.

그들의 슬프고도 무섭고 아름답고도 잔인한 역사는 차치하고, 서울 지하철에서 기존의 임산부 배려석을 눈에 잘 띄는 ‘분홍색 디자인’으로 바꾼다는 소식과 그것을 둘러싼 설왕설래를 들으니 문득 수우 족의 언어에서 ‘임신’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떠올랐다. 기존의 지하철 좌석 중에도 노인, 장애인, 임산부를 위한 ‘교통약자석’이 있고 임산부와 영유아 동반자를 위한 ‘배려석’이 있지만, 새로운 조처는 그것으로는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같은 소식을 들은 사람들 중에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임산부를 보호할 수 없는 각박한 현실을 개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까지 표시를 내며 특별한 권리를 주장하는데 불편해 하는 이들도 있고, 한편에서는 ‘미래의 주인공’을 생산한다는 의미로 여성성을 제한 당한다는 데 불쾌해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임신은 질병이 아니다. 장애가 아닐뿐더러 약점이나 결함도 아니다. 여성이 임신을 한다는 이유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건강상의 문제나 기타 개인적인 이유로 임신을 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는 여성, 그리고 애초에 임신이 불가능한 남성은 보호받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괴이한 결론이 나온다. 아이러니하게도 ‘모성 보호’의 목소리가 가장 높았던 시기는 제국주의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로, 여성들은 ‘일꾼’과 ‘병사’를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는 이유로 (자발적이 아니라 강제로) 존중되었다. 그래서 임신을 하면 오히려 여성이 ‘강해진다’고 생각한 수우 족의 언어는 신비롭고도 흥미롭다. 정교한 자연의 계산법대로라면 새끼를 밴 암컷은 더 아름답고 더 건강할 수밖에 없으니.

하지만 ‘분홍색 디자인’의 진정한 의미는 ‘약한’ 임산부를 보호하는 것보다 그들의 과도한 짐을 ‘함께 나눈다’는 것에 가까우리라. 임신으로 무거워진 몸보다 훨씬 더 무거운 것은 한 생명을 낳아 기른다는 정서적 경제적 사회적 부담이다. 아이가 ‘짐’이 되어 여성들은 짓누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분홍색 의자보다 선명한 지지와 응원이 필요하다. 그래야 아이들은 비로소 엄마의 ‘짐’이 아닌 세상의 ‘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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