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엔 삼계탕이 없었다고? 인삼과 닭이 만난 이야기
곽재식 교수
발행일 2026.07.22. 15:49
AI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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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탕은 조선 시대부터 있던 음식이 아니라 1960년대 서울에서 전문점이 생기며 퍼졌고, 1970년대에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인삼은 원래 산삼 중심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밭재배와 홍삼 제조가 보급되며 대량 수출품이 됐고, 서울 경강 지역의 증포소가 홍삼 생산의 중심이 됐다.

서울의 한 삼계탕집 직원이 삼계탕을 나르고 있다.
59화 조선의 수출 역군, 서울의 홍삼 공장
여름철 복날 보양식의 대표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음식이 아마 ‘삼계탕’일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삼계탕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 요리책에 ‘삼계탕’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사례를 찾기가 어려운 데다가 20세기 이후의 여러 기록이나 언론 보도 기록에서도 생각보다 ‘삼계탕’이라는 이름은 나중에야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삼계탕과 비슷한 음식을 사람들이 꽤 먹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죽을 먹기 위해 ‘백숙’이라는 이름으로 닭을 이용한 요리를 만들어 먹었던 기록은 조선 시대에도 자주 보인다. 거기에 몸에 좋다는 이런저런 재료를 추가했던 일은 꽤 많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분명 한국에서 몸에 좋은 약초의 대표인 인삼이 추가 될 때도 있었을 것이다.
19세기 자료인 ‘속음청사(續陰晴史)’ 같은 책을 보면 ‘삼계고(蔘鷄膏)’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을 보면 마치 약처럼 인삼과 닭고기를 주재료로 만드는 먹을 것을 만들었던 사례는 분명 있었다. 아마 자연스럽게 인삼 가루 등을 닭고기 죽에 넣는 문화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삼계탕이라는 이름의 음식이 널리 퍼진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것은 삼계탕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에 대한 기록을 조사해 보아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대조적으로, 떡이나 한과 같은 음식에 대한 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에도 그런 음식을 잘하는 맛집이 어디에 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삼계탕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에 대한 기록은 1960년 창업한 이상림 사장에 대한 기록보다 앞서는 사례를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이상림 사장은 본래 서울의 남대문 시장에서 닭 도매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여름철에 닭이 팔리는 양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직접 닭고기를 활용해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어 팔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을 취재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상림의 형제자매 중에 인삼 산지로 유명한 금산 사람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인삼을 추가한다는 생각도 했을 거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그의 가게는 처음 서울 명동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서소문으로 이전해 긴 세월 이어지며 삼계탕을 주변에 알렸다. 이렇게 보면 이상림 사장을 비롯한 서울의 삼계탕 식당들이 삼계탕이 자리 잡고 우리 문화 속에 퍼져 나가게 한 초창기 개척자였던 셈이다.
다른 정황을 살펴보아도 삼계탕은 1960년대에 자리 잡은 뒤에 1970년대에 전 국민이 아는 음식으로 퍼져 나갔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초창기에는 삼계탕이라는 이름조차 그다지 익숙하지 않아 ‘계삼탕’이라는 이름을 쓰곤 했다는 회고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름철 복날 보양식의 대표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음식이 아마 ‘삼계탕’일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삼계탕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 요리책에 ‘삼계탕’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사례를 찾기가 어려운 데다가 20세기 이후의 여러 기록이나 언론 보도 기록에서도 생각보다 ‘삼계탕’이라는 이름은 나중에야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삼계탕과 비슷한 음식을 사람들이 꽤 먹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죽을 먹기 위해 ‘백숙’이라는 이름으로 닭을 이용한 요리를 만들어 먹었던 기록은 조선 시대에도 자주 보인다. 거기에 몸에 좋다는 이런저런 재료를 추가했던 일은 꽤 많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분명 한국에서 몸에 좋은 약초의 대표인 인삼이 추가 될 때도 있었을 것이다.
19세기 자료인 ‘속음청사(續陰晴史)’ 같은 책을 보면 ‘삼계고(蔘鷄膏)’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을 보면 마치 약처럼 인삼과 닭고기를 주재료로 만드는 먹을 것을 만들었던 사례는 분명 있었다. 아마 자연스럽게 인삼 가루 등을 닭고기 죽에 넣는 문화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삼계탕이라는 이름의 음식이 널리 퍼진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것은 삼계탕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에 대한 기록을 조사해 보아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대조적으로, 떡이나 한과 같은 음식에 대한 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에도 그런 음식을 잘하는 맛집이 어디에 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삼계탕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에 대한 기록은 1960년 창업한 이상림 사장에 대한 기록보다 앞서는 사례를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이상림 사장은 본래 서울의 남대문 시장에서 닭 도매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여름철에 닭이 팔리는 양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직접 닭고기를 활용해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어 팔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을 취재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상림의 형제자매 중에 인삼 산지로 유명한 금산 사람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인삼을 추가한다는 생각도 했을 거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그의 가게는 처음 서울 명동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서소문으로 이전해 긴 세월 이어지며 삼계탕을 주변에 알렸다. 이렇게 보면 이상림 사장을 비롯한 서울의 삼계탕 식당들이 삼계탕이 자리 잡고 우리 문화 속에 퍼져 나가게 한 초창기 개척자였던 셈이다.
다른 정황을 살펴보아도 삼계탕은 1960년대에 자리 잡은 뒤에 1970년대에 전 국민이 아는 음식으로 퍼져 나갔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초창기에는 삼계탕이라는 이름조차 그다지 익숙하지 않아 ‘계삼탕’이라는 이름을 쓰곤 했다는 회고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삼계탕이 의외로 늦게 생겨난 이유는?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삼계탕이 자리 잡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을까? 닭이 낯설어서였던 것 같지는 않다.
삼국시대 신라는 ‘닭 계(鷄)’ 자를 써서 닭의 숲이라는 뜻의 ‘계림(鷄林)’이라는 말을 자기 나라의 별명으로 널리 사용했다. 그만큼 닭을 친숙하게 여기고 닭을 중시하는 나라였다.
중국의 역사 기록인 ‘삼국지’나 ‘후한서’를 보면 한반도 남부에 장미계(長尾鷄), 세미계(細尾鷄) 같은 특이한 닭 품종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 보다 훨씬 더 땅이 넓은 중국에서도 보기 힘든 닭 품종까지도 개발하고 길러서 활용하는 문화가 고대로부터 한국에서는 발달해 있었던 듯하다.
삼계탕의 또 다른 재료인 인삼 역시 누구나 아는 한국의 특산물이었다. 지금까지도 ‘고려 인삼’이라고 하면 세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훌륭한 제품으로 이름이 높다. 오래 거슬러 올라가자면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쯤에 중국 양나라의 도홍경이 쓴 ‘명의별록’에도 이미 인삼은 백제 인삼을 중히 여기고 고구려 인삼이 그다음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 인삼은 삼국시대에 한국의 귀한 수출품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 후로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꾸준히 인삼은 한국을 상징한다고 할 만한 수출품이었다. 최근에는 외국의 견제로 인삼 수출이 조금 줄어들었다고는 한다.
하지만 2022년만 해도 인삼 수출 금액이 2억 6,970만 달러였다는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발표 자료가 있을 정도로 여전히 인삼하면 한국 인삼이 세계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도 삼계탕이 탄생하기까지 그렇게 긴 세월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양한 이유를 이야기해 볼 수 있겠지만, 오늘은 일단 그 주재료 중 하나인 인삼을 일반인들이 구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보고 싶다.
지금은 인삼이라고 하면 밭에서 재배하는 인삼을 다들 먼저 떠올리고 산에서 야생으로 자라나는 인삼을 ‘산삼’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말로 부르곤 한다.
그렇지만 원래 인삼은 산에서 야생으로 자라나는 것이 기본이어서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는 인삼이라고 하면 다들 산삼이라는 뜻으로 쓰던 말이었다. 그리고 심마니들이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니며 우연히 자라난 산삼을 캐내는 것이 인삼을 구하는 방법이었다.
그렇다 보니 인삼 가격은 대단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모르긴 해도 신라에 삼계탕이 있었다면 산삼을 듬뿍 넣어 만든 궁중에서나 먹을 신비의 보약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삼국시대 신라는 ‘닭 계(鷄)’ 자를 써서 닭의 숲이라는 뜻의 ‘계림(鷄林)’이라는 말을 자기 나라의 별명으로 널리 사용했다. 그만큼 닭을 친숙하게 여기고 닭을 중시하는 나라였다.
중국의 역사 기록인 ‘삼국지’나 ‘후한서’를 보면 한반도 남부에 장미계(長尾鷄), 세미계(細尾鷄) 같은 특이한 닭 품종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 보다 훨씬 더 땅이 넓은 중국에서도 보기 힘든 닭 품종까지도 개발하고 길러서 활용하는 문화가 고대로부터 한국에서는 발달해 있었던 듯하다.
삼계탕의 또 다른 재료인 인삼 역시 누구나 아는 한국의 특산물이었다. 지금까지도 ‘고려 인삼’이라고 하면 세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훌륭한 제품으로 이름이 높다. 오래 거슬러 올라가자면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쯤에 중국 양나라의 도홍경이 쓴 ‘명의별록’에도 이미 인삼은 백제 인삼을 중히 여기고 고구려 인삼이 그다음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 인삼은 삼국시대에 한국의 귀한 수출품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 후로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꾸준히 인삼은 한국을 상징한다고 할 만한 수출품이었다. 최근에는 외국의 견제로 인삼 수출이 조금 줄어들었다고는 한다.
하지만 2022년만 해도 인삼 수출 금액이 2억 6,970만 달러였다는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발표 자료가 있을 정도로 여전히 인삼하면 한국 인삼이 세계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도 삼계탕이 탄생하기까지 그렇게 긴 세월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양한 이유를 이야기해 볼 수 있겠지만, 오늘은 일단 그 주재료 중 하나인 인삼을 일반인들이 구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보고 싶다.
지금은 인삼이라고 하면 밭에서 재배하는 인삼을 다들 먼저 떠올리고 산에서 야생으로 자라나는 인삼을 ‘산삼’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말로 부르곤 한다.
그렇지만 원래 인삼은 산에서 야생으로 자라나는 것이 기본이어서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는 인삼이라고 하면 다들 산삼이라는 뜻으로 쓰던 말이었다. 그리고 심마니들이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니며 우연히 자라난 산삼을 캐내는 것이 인삼을 구하는 방법이었다.
그렇다 보니 인삼 가격은 대단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모르긴 해도 신라에 삼계탕이 있었다면 산삼을 듬뿍 넣어 만든 궁중에서나 먹을 신비의 보약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집에서 키운 인삼 ‘가삼’의 탄생
상황이 뒤바뀐 것은 조선 시대에 인삼을 밭에서 재배해서 농사를 통해 대량 생산하는 방법이 널리 퍼지면서부터였다. 이런 방법을 통해 생산된 인삼을 조선 시대에는 집에서 키운 인삼이라고 해서 ‘가삼(家參)’이라고 불렀다.
가삼 재배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우선 인삼은 풀 모양으로 자라나는 식물이기는 하지만 봄에 씨앗을 뿌려 가을에 추수하여 한 해 만에 수확을 할 수 있는 다른 많은 농작물과는 다르다.
인삼은 씨앗을 심은 뒤 4년에서 6년 동안은 길러야 쓸 수 있을 만큼 뿌리가 자라난다. 그러니 일단 인삼 키우기에 도전하는 자체가 쉽지 않다.
게다가 인삼은 산속 나무 그늘 근처에서 자라나는 습성에 맞춰 진화한 생물이기에 밭에서 인삼을 키울 때에도 일부러 그늘을 만들어 주어야만 잘 자라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인삼을 키우다 보면 땅속에 실린드로카르폰 데스트룩탄스(Cylindrocarpon destructans) 같은 곰팡이 부류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같이 자라는 수가 많다. 이런 미생물이 한 번 제대로 자리 잡으면 인삼에게 뿌리썩음병을 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 곰팡이가 번지기 전에 일단 땅을 갈아 엎고 곰팡이가 사라질 때까지 다른 식물을 키우며 기다려야 한다는 골치 아픈 문제도 있다.
만약 이런 미생물을 잘 피하거나 제거하지 못하면 한참 키운 인삼을 다 내다 버리게 되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4년을 기다려 인삼 수확이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 성공은 한 번으로 끝나고 그다음 수확을 하기 전에 인삼밭이 뿌리썩음병으로 파괴되어 버리는 것이다.
조선인들에게는 미생물을 연구할 수 있는 현미경도 없었고 미생물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조선 후기가 되자 결국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인삼을 밭에서 키우는 방법이 곳곳에 보급되었다.
누가, 어디서 처음 가삼 재배에 성공했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다. 널리 퍼진 이야기 중에 하나는 ‘소호당문집’의 ‘홍삼지’라는 글에 실린 기록인데, 이에 따르면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근처에서 ‘김 진사 부인’이라는 여성이 인삼 재배에 성공한 것이 최초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수많은 인삼 제품들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이 아마도 여성 농업인인 김 진사 부인이라는 사람 덕분일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이야기다.
안타깝게도 김 진사 부인의 삶이나 연구 개발 과정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그래도 여름철 삼계탕을 먹을 때마다 김 진사 부인이라는 사람에 대해 한 번 생각을 해 보아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삼 재배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우선 인삼은 풀 모양으로 자라나는 식물이기는 하지만 봄에 씨앗을 뿌려 가을에 추수하여 한 해 만에 수확을 할 수 있는 다른 많은 농작물과는 다르다.
인삼은 씨앗을 심은 뒤 4년에서 6년 동안은 길러야 쓸 수 있을 만큼 뿌리가 자라난다. 그러니 일단 인삼 키우기에 도전하는 자체가 쉽지 않다.
게다가 인삼은 산속 나무 그늘 근처에서 자라나는 습성에 맞춰 진화한 생물이기에 밭에서 인삼을 키울 때에도 일부러 그늘을 만들어 주어야만 잘 자라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인삼을 키우다 보면 땅속에 실린드로카르폰 데스트룩탄스(Cylindrocarpon destructans) 같은 곰팡이 부류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같이 자라는 수가 많다. 이런 미생물이 한 번 제대로 자리 잡으면 인삼에게 뿌리썩음병을 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 곰팡이가 번지기 전에 일단 땅을 갈아 엎고 곰팡이가 사라질 때까지 다른 식물을 키우며 기다려야 한다는 골치 아픈 문제도 있다.
만약 이런 미생물을 잘 피하거나 제거하지 못하면 한참 키운 인삼을 다 내다 버리게 되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4년을 기다려 인삼 수확이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 성공은 한 번으로 끝나고 그다음 수확을 하기 전에 인삼밭이 뿌리썩음병으로 파괴되어 버리는 것이다.
조선인들에게는 미생물을 연구할 수 있는 현미경도 없었고 미생물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조선 후기가 되자 결국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인삼을 밭에서 키우는 방법이 곳곳에 보급되었다.
누가, 어디서 처음 가삼 재배에 성공했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다. 널리 퍼진 이야기 중에 하나는 ‘소호당문집’의 ‘홍삼지’라는 글에 실린 기록인데, 이에 따르면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근처에서 ‘김 진사 부인’이라는 여성이 인삼 재배에 성공한 것이 최초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수많은 인삼 제품들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이 아마도 여성 농업인인 김 진사 부인이라는 사람 덕분일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이야기다.
안타깝게도 김 진사 부인의 삶이나 연구 개발 과정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그래도 여름철 삼계탕을 먹을 때마다 김 진사 부인이라는 사람에 대해 한 번 생각을 해 보아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후기가 되어 인삼을 밭에서 재배하는 방법이 퍼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수출 주력 제품, 인삼
나아가 김 진사 부인의 가삼 발명은 조선의 경제와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산에서 우연히 캐낼 수 있었던 산삼이 밭에서 무궁무진하게 쏟아지게 되다 보니 해외에 수출할 수 있는 인삼의 양이 늘어난 것이다. 바로 그 덕택에 조선 후기의 인삼은 무역의 핵심을 차지하는 더욱 중요한 제품이 될 수 있었다.
조선은 쇄국 정책을 펼친 나라이고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기에 무역이 활발하지는 못했던 편에 속하기는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예나 지금이나 한국은 다른 나라와의 교류 속에서 발전해 온 나라였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도 국가 경제를 위해서 수출, 수입은 중요한 문제였다.
조선 시대에 널리 쓰이던 놋쇠, 유기 그릇을 만드는 데 사용하던 구리에서부터, 사소하게는 비단이나 바늘 같은 물건까지 중국이나 일본에서 조선으로 수입되는 물자는 많았다.
그리고 그런 물자들 중에 조선 사람들의 생활이 걸려 있는 품목들도 꽤 여럿 있었다. 바로 그 물건을 수입할 돈을 벌기 위해 조선에서 수출한 주력 제품이 인삼이었다.
20세기 후반에 한국의 건설 노동자들이 중동에 건너가서 외화를 벌어들이던 일이나, 21세기에 반도체 수출로 한국 경제가 유지되는 것 같은 역할을 조선 시대에는 인삼이 하고 있었다.
조선은 쇄국 정책을 펼친 나라이고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기에 무역이 활발하지는 못했던 편에 속하기는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예나 지금이나 한국은 다른 나라와의 교류 속에서 발전해 온 나라였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도 국가 경제를 위해서 수출, 수입은 중요한 문제였다.
조선 시대에 널리 쓰이던 놋쇠, 유기 그릇을 만드는 데 사용하던 구리에서부터, 사소하게는 비단이나 바늘 같은 물건까지 중국이나 일본에서 조선으로 수입되는 물자는 많았다.
그리고 그런 물자들 중에 조선 사람들의 생활이 걸려 있는 품목들도 꽤 여럿 있었다. 바로 그 물건을 수입할 돈을 벌기 위해 조선에서 수출한 주력 제품이 인삼이었다.
20세기 후반에 한국의 건설 노동자들이 중동에 건너가서 외화를 벌어들이던 일이나, 21세기에 반도체 수출로 한국 경제가 유지되는 것 같은 역할을 조선 시대에는 인삼이 하고 있었다.
찌고 말려 오래 보관하는 ‘홍삼’
인삼의 대량 수출을 성공시키기 위해 조선인들은 가삼 재배에 더해 또 하나의 기술 혁신을 성공시켰다. 그것은 바로 ‘홍삼 제조법’을 개발한 것이다.
인삼을 전국에서 사들여서 중국이나 일본으로 판매를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다 보면 조선 시대 기술로는 몇 개월 이상의 긴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면 귀한 인삼이 상하고 썩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인들은 인삼에 열을 가해 쪄내듯이 가공하고 말리는 방법으로 수분을 제거하는 기술을 고안해 냈다. 이렇게 해서 가공한 인삼은 불그스레한 빛이 돈다고 해서 ‘홍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식재료가 상하는 원인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세균, 곰팡이 따위의 미생물들이 번식하면서 식재료를 먹어 치우고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물질을 내뿜기 때문이다. 만약 식재료를 그대로 둔 채 수분만 잘 제거해 낼 수 있다면 수분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미생물이 살지 못하게 되어 상하는 현상도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그 때문에 인삼으로 홍삼을 만들면 더 오래 보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현대 과학의 연구에 따르면 홍삼 제조 과정에서 진세도사이드 Rg3 (ginsenoside Rg3) 같은 독특한 성분이 늘어나는 반응도 일어난다고 한다.
모를 일이지만, 조선 시대에 홍삼을 사용하는 사람들 또한 그런 변화 덕택에 홍삼을 오래 보관할 수 있으면서도 더 좋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인삼을 전국에서 사들여서 중국이나 일본으로 판매를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다 보면 조선 시대 기술로는 몇 개월 이상의 긴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면 귀한 인삼이 상하고 썩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인들은 인삼에 열을 가해 쪄내듯이 가공하고 말리는 방법으로 수분을 제거하는 기술을 고안해 냈다. 이렇게 해서 가공한 인삼은 불그스레한 빛이 돈다고 해서 ‘홍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식재료가 상하는 원인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세균, 곰팡이 따위의 미생물들이 번식하면서 식재료를 먹어 치우고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물질을 내뿜기 때문이다. 만약 식재료를 그대로 둔 채 수분만 잘 제거해 낼 수 있다면 수분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미생물이 살지 못하게 되어 상하는 현상도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그 때문에 인삼으로 홍삼을 만들면 더 오래 보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현대 과학의 연구에 따르면 홍삼 제조 과정에서 진세도사이드 Rg3 (ginsenoside Rg3) 같은 독특한 성분이 늘어나는 반응도 일어난다고 한다.
모를 일이지만, 조선 시대에 홍삼을 사용하는 사람들 또한 그런 변화 덕택에 홍삼을 오래 보관할 수 있으면서도 더 좋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홍삼 제조 공장은 경강 지역에 들어섰다. 용산역사박물관.
홍삼 제조법을 처음 개발한 사람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홍삼 제조 공장이라고 할만한 곳이 초기에 들어선 곳들은 경강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경강이란 한강 하류 지역을 일컫던 조선 시대 표현으로 마포, 양화진, 서강, 용산의 한강변 지역을 흔히 경강의 대표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활동하던 상인들을 흔히 경강 상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바로 이 지역 상인들이 조선 시대에 ‘증포소(蒸包所)’라고 부르던 홍삼 제조 공장을 건설하고 대량의 수출용 홍삼을 생산했다.
‘홍삼지’에는 이들이 홍삼 거래를 위해 계약을 하면, 계약 한 건, 두 건을 ‘혈(穴)’이라는 단위로 말해서 ‘한 구멍’, ‘두 구멍’이라는 식으로 불렀다는 기록도 실려 있다. 요즘은 투자 계약을 ‘구좌’라고 부를 때가 많은 것과 비교되는 표현이다. ‘돈 나올 구멍이 있다’는 식의 한국어 표현은 요즘도 가끔 쓰이곤 하는데, 그와 비슷한 어감이었던 것일까?
1700년대 말, 1800년대 초에 큰돈을 벌어들이던 서울의 홍삼 공장들은 1811년 개성으로 증포소를 대거 이동시키게 되면서 그 전성시대의 끝을 맞게 된다.
조선 정부에서 증포소들에 대한 허가, 관리, 규제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서울의 증포소들이 그 제도를 어긴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개성의 상인들이 전국적으로 인삼 유통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만큼 개성 사람들이 증포소까지 개성에서 운영하면 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개성 홍삼이 탄생하게 되었다.
경강이란 한강 하류 지역을 일컫던 조선 시대 표현으로 마포, 양화진, 서강, 용산의 한강변 지역을 흔히 경강의 대표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활동하던 상인들을 흔히 경강 상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바로 이 지역 상인들이 조선 시대에 ‘증포소(蒸包所)’라고 부르던 홍삼 제조 공장을 건설하고 대량의 수출용 홍삼을 생산했다.
‘홍삼지’에는 이들이 홍삼 거래를 위해 계약을 하면, 계약 한 건, 두 건을 ‘혈(穴)’이라는 단위로 말해서 ‘한 구멍’, ‘두 구멍’이라는 식으로 불렀다는 기록도 실려 있다. 요즘은 투자 계약을 ‘구좌’라고 부를 때가 많은 것과 비교되는 표현이다. ‘돈 나올 구멍이 있다’는 식의 한국어 표현은 요즘도 가끔 쓰이곤 하는데, 그와 비슷한 어감이었던 것일까?
1700년대 말, 1800년대 초에 큰돈을 벌어들이던 서울의 홍삼 공장들은 1811년 개성으로 증포소를 대거 이동시키게 되면서 그 전성시대의 끝을 맞게 된다.
조선 정부에서 증포소들에 대한 허가, 관리, 규제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서울의 증포소들이 그 제도를 어긴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개성의 상인들이 전국적으로 인삼 유통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만큼 개성 사람들이 증포소까지 개성에서 운영하면 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개성 홍삼이 탄생하게 되었다.

서울한방진흥센터에 재현되어 있는 약전한약방 모습
지금은 한강변 풍경을 보면서 인삼이나 홍삼 생각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한국 인삼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해외 관광객들이 서울에 왔을 때 한국 인삼을 체험하는 방법으로 삼계탕을 한 그릇 먹고 가는 일이 요즘은 중요한 여행의 재미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 인삼을 잘 알고 있던 일본, 중국 관광객들 사이에서 삼계탕이 인기를 끌었던 것은 벌써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듯하고 지금은 전 세계에 서울에 가면 삼계탕을 먹으라는 유행이 뻗어 나가고 있는 듯하다.
현대에 들어 와서 인삼이 약초를 넘어서 재미난 식재료로 자리 잡으면서 다시 한번 서울의 인삼 문화가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런 만큼 인삼차에서부터 다른 다양한 건강식에 이르기까지 소중한 서울의 인삼 문화가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도 해 보고 싶다.
한국 인삼을 잘 알고 있던 일본, 중국 관광객들 사이에서 삼계탕이 인기를 끌었던 것은 벌써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듯하고 지금은 전 세계에 서울에 가면 삼계탕을 먹으라는 유행이 뻗어 나가고 있는 듯하다.
현대에 들어 와서 인삼이 약초를 넘어서 재미난 식재료로 자리 잡으면서 다시 한번 서울의 인삼 문화가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런 만큼 인삼차에서부터 다른 다양한 건강식에 이르기까지 소중한 서울의 인삼 문화가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도 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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