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하는 라면은 언제 어디서 태어났을까?

곽재식 교수

발행일 2025.11.12. 15:50

수정일 2025.11.12. 16:01

조회 2,968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한국 라면의 고향
한국 라면의 고향
  43화   라면의 고향은 하월곡동

지금은 상월곡동과 하월곡동으로 나뉘어 있는 월곡동은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별로 사람들이 살지 않는 언덕배기와 산등성이 사이의 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왜 이 지역을 월곡동이라고 부르는 지에 대해서도 명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는 않다.

그나마 성북구청 누리집을 보면 한 가지 전설을 소개하고 있기는 하다. 그에 따르면, 지방에서 서울로 소를 팔러 온 사람들이 소를 끌고 월곡동 근방에 오면 달밤에 도착해서 달이 사라지기 전에 정육점 주인들과 소를 거래했기에, 이 지역의 이름이 월곡동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월곡동의 뜻은 대략 달빛 보는 골짜기 정도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지금이야 말 그대로 월곡동은 서울 한 복판이 되었다. 그러니 이 지역에서 소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런데 이상한 연결 고리로 이 지역은 지금도 소와 아주 약간의 인연이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에서 새로운 식품 사업에 도전하고자 한 창업자 중에 전중윤 사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전 사장은 20세기 초 강원도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는데 그 시절 똑똑한 젊은이들이 으레 그랬듯이 처음에는 나랏일을 하는 공무원이나 공기업에서 일을 하면 그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전 사장이 처음에 취직한 곳은 우체국이었다.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식품 사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는데 마침 우체국에서는 금융 업무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 사장은 우체국에서 보험을 취급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광복이 찾아왔고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탄생했으며 세상이 변해 자본주의 사회가 열렸다. 자연히 각종 금융, 투자, 보험의 수요가 급격히 커졌다. 그렇다 보니 보험 사업을 해보려는 사업가들이 나타났고 이들이 보험에 대한 경험이 많았던 전 사장을 영입해 사업을 시작했다. 전 사장의 수완은 훌륭해서 그는 보험 업계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사업과 투자에 대한 감각도 상당히 익혔던 것 같다. 전 사장은 이후 보험 업계를 떠났지만, 그가 일했던 보험 회사의 후신은 지금도 거대한 보험 회사로 남아 있다.

밑천을 모은 전 사장은 자신만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 보려고 했다. 1960년 전후 굶주리는 사람이 넘쳐나던 가난한 한국에서 그는 식품 사업을 잘해 본다면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먼저 기름 사업으로 식품 사업을 시작했다. 기름은 그냥 농사를 지어 수확만 얻으면 바로 제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기름을 짜기 위해 원료를 가공하고 그것을 포장해야 제품이 된다. 그러면서도 기름은 누구나 요리를 할 때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제품이므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만 확보한다면 판매하기가 좋았다.

1960년대 서울의 한 스타트업, 라면을 만들다

그리고 전 사장은 기름 사업 다음으로 그때까지 한국에 없었던 혁신적인 사업에 도전하기로 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스타트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시작한 사업은 다름 아닌 라면이었다.

전 사장은 보험 업계에서 일하던 시절 일본에 출장 갔다가 우연히 그 무렵 일본에서 개발된 인스턴트 라면을 보게 되었다. 라면은 일본에서 한자로는 “랍면(拉麵)”이라고 쓰고 “라멘”이라고 부르던 음식으로 원래는 일본의 중국 음식점에서 팔리던 음식이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이런 면 음식을 중국 음식점에서 만들 때 손으로 면을 잡아 뽑는 수타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손으로 붙잡는다는 뜻의 “랍(拉)”자를 써서 랍면이라는 이름이 생겼던 것 같다. 지금은 인스턴트 식품의 대표가 라면이지만 그 본래 뜻은 오히려 수타면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이 시기 일본의 랍면은 대체로 닭 육수를 기본으로 하던 음식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친숙한 음식을 꼽자면 기스면과 닮은 점이 꽤 많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1958년에 일본에서 랍면이 인스턴트 식품으로 개발되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팔리기 시작했다. 인스턴트 랍면 한 그릇을 끓여 먹어 본 전 사장은 그 제품이 한국에서도 팔릴 수 있을 만한 제품이라고 생각했다.

식량 사정이 좋지 않던 그 시절의 한국은 미국에서 밀가루를 꽤나 많이 원조받고 있었는데 막상 한식 요리에는 밀가루 음식이 많지 않아 식사로 밀가루 음식을 소비하기가 좋지 않았다. 전 사장은 값싼 밀가루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랍면을 만들어 한국인들에게 공급한다면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해서 전 사장은 한국 최초의 라면 공장을 바로 지금의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건설했다.
1963년 9월 15일 국내 최초 인스턴트 라면이 출시됐다. 1963~1988 사이 생산된 라면들.
1963년 9월 15일 국내 최초 인스턴트 라면이 출시됐다. 1963~1988 사이 생산된 라면들.

라면 만드는 기술과 한국식 라면의 유래

오래 보관하면서 필요할 때면 바로 끓여 먹을 수 있는 라면을 만드는 기술의 핵심은 재료에서 수분을 잘 제거하는 데 있다. 시간이 지나 음식이 상하고 썩는다는 것은 사실 세균이나 곰팡이 따위의 미생물이 음식 위에서 자라나면서 그 음식을 사람 대신 먹어 치우고 사람에게 해가 되는 성분을 뿜어내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균과 곰팡이가 자라날 수 없는 조건을 만들면 음식은 잘 썩지 않는다. 만약 생명이 자라나는데 꼭 필요한 물을 없애 버린다면 세균, 곰팡이도 살 수 없을 테니 음식을 오래 보존할 수 있다.

라면을 만들 때 튀기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라면을 튀겨서 익힌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현대의 라면 공장에서는 굳이 면을 익히기 위해 튀기는 작업을 할 필요는 없다. 라면 공장에서는 튀기는 공정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뜨거운 증기를 쏘여서 찌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면을 익혀 놓는다. 튀기는 작업은 그 후에나 이루어진다.

이때 뜨거운 기름으로 면을 튀기면 기름의 열기 때문에 수분이 끓어 올라 날아가게 되며, 남아있던 세균, 곰팡이도 열기에 죽어 버린다. 이 상태에서 다른 세균, 곰팡이가 최대한 들어가지 않게 밀봉해서 포장하면 면에서 자라날 미생물도 없고 설령 어디서 약간 미생물이 온다고 해도 물이 없으니 살아 남기가 어렵다. 물론 튀기는 작업이 면에 기름기를 집어넣어 맛을 좋게 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1960년대 초에 전 사장은 이미 라면을 튀길 때 필요한 기름 사업을 먼저 시작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라면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바탕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후 한국인의 식생활을 영원히 바꾸어 놓은 한국식 라면이 1963년 9월 15일 하월곡동에서 태어났다. 제품 이름은 일본어 발음인 라멘에서 “라”는 그대로 따오고 국수요리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면”이라는 발음은 한국식 한자 발음을 살려서 “라면”이 되었다.

초창기에는 낯선 음식이라 판매가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인스턴트 국수 요리를 사 먹는다는 생각이 생소하던 시기인지라 제품 이름에 “면”이 들어가 있으니 무엇인가 면으로 된 옷감과 관련된 제품일 거라고 오해하던 사람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전 사장의 계획은 들어맞았다. 특히 한국 라면의 맛이 한국 사람 입맛에 맞게 개량되고 일본 라멘과는 다른 매운맛이 들어가면서 라면은 완연한 한국인의 음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전 사장의 회사에서는 소기름을 이용해 라면을 제조하는 방법과 쇠고기 육수 맛을 내는 방법을 사용하면서 더욱 맛을 개선해 나갔다.

중국에서 유래해 일본에서 인스턴트 식품으로 재탄생한 일본 라멘과는 또 다른 한국만의 한국식 라면이 생긴 셈이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겠지만 묘하게 소를 사고파는 월곡동의 전통이 라면으로 이어지는 느낌도 있다.
1967년 라면 생산 모습 (출처 : 대한뉴스 제 635호)
1967년 라면 생산 모습 (출처 : 대한뉴스 제 635호)
라면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높아지자 전 사장은 라면 공장을 서울 도봉구로 확장했다. 이것도 독특한 전략이다. 당시 서울에 식품 공장들은 대개 영등포 인근에 건설되는 곳들이 흔했다. 그러나 전 사장은 하월곡동에서 가까운 도봉동 지역에 큰 공장을 만들었다.

지금이야 도봉구는 전국에서도 내로라할 만큼 깔끔하게 정리된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선 멋진 도시이지만, 60년 전에는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먹고 살길이 막막한 사람들이 많은 동네가 곳곳에 있었다고 한다. 전 사장은 바로 그 인력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준다면 누구보다 성실히 일해 훌륭한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이후 6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좀 잘될 때도 있고 여러 난관을 겪으며 잘 안될 때도 있었지만 전 사장과 열심히 살아 보려는 피난민 출신 직원들이 힘을 합쳐 키워나간 회사는 꾸준히 이어졌다. 특히 2020년대에 들어서는 특별히 매운 맛을 내는 라면 몇 종류가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면서 전 세계에 한국식 라면이 인기를 끄는 시대가 찾아왔다.
한국 라면은 매년 1조 원치 이상 수출되는 한국 경제의 효자가 되었다. 서울의 한 라면 매장.
한국 라면은 매년 1조 원치 이상 수출되는 한국 경제의 효자가 되었다. 서울의 한 라면 매장.

세계에서 널리 팔리는 K푸드, 라면

덕택에 지금은 다양한 회사에서 만든 한국 라면들이 두루두루 세계에서 널리 팔리며 매출을 높이고 있다. 요즘은 꽤 많은 해외 매장에서 라면이라는 제품을 표기할 때 일본식 이름인 “ramen” 대신에 한국어 발음 라면을 살린 “ramyeon”이라는 표기가 더 인기 있을 정도로 한국 라면은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상품이 되었다.

이런 역사를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도 든다. 한때는 한국 기술의 자랑거리이자 최고의 첨단 산업이라고 하던 TV용 LCD를 만드는 사업 같은 것들은 어느새 중국 제품과의 경쟁에 밀려 사실상 국산이 사라지게 되었는데, 60년 전부터 이어 오던 라면 공장의 제품들은 어느새 매년 1조 원치 이상 수출되는 한국 경제의 효자가 되었다.

서울의 땅값이 오르고 다양한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지금은 하월곡동이나 도봉동의 라면 공장들은 모두 사라졌다. 공장들은 지방 곳곳으로 옮겨 갔다. 그렇지만 아직도 전 사장이 창립한 회사는 하월곡동에 본사 건물을 두고 운영 중이다. 지금은 워낙 라면 장사가 잘되다 보니 회사 건물을 더 넓혀서 서울 중심가의 충무로 쪽으로 옮기는 중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세계에 퍼져 나간 한국 라면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하월곡동의 빈자리가 조금은 섭섭해 보일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하월곡동이나 아니면 도봉동 즈음에 다양한 라면을 구경하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든가 라면에 관한 재미난 거리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서울 시민에게는 너무나 오랜 세월 익숙해져서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기도 하는 라면에게 무엇인가 기념할 만한 곳을 남겨 주어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곽재식 #라면 #K푸드 #라면공장 #하월곡동
매일 아침을 여는 서울 소식 - 내 손안에 서울 뉴스레터 구독 신청 카카오톡 채널 구독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