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막길? 오히려 좋아! 등굣길이 즐거운 놀이풍경으로!

지정우 건축가

발행일 2024.09.20. 15:23

수정일 2024.09.20. 15:56

조회 2,531

아빠건축가의 다음세대 공간 탐험
필자와 EUS+Architects가 설계한 잠신초등학교 ‘놀이시퀀스’.
필자와 EUS+Architects가 설계한 잠신초등학교 ‘놀이시퀀스’

아빠건축가의 다음세대 공간 탐험 (32) 아이 스스로 성장하는 놀이풍경

보통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면서 우리 사회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나이지리아 속담을 인용하곤 한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 사회가 이 말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바로 ‘한 아이’를 ‘내 아이’로 인식하는 순간 그렇다. 그리고 ‘키우다’는 것을 받는 대상화가 되면 더욱 본뜻과는 다르게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 피동적인 존재로서가 아닌, 다음세대 스스로 성장하는데 함께하는 마을 환경과 어른들에 대한 이야기, 그 다음세대가 책임감 있는 마을 주민의 일원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마을과 도시에서 어린이들은 그들의 놀이풍경을 스스로 만들어왔다. 딱지를 들고 골목에서 만나면 그곳이 놀이터가 되었고 비워져 있는 공터에서 술래잡기를 하면 그곳에 있는 버려진 물건들은 놀이기구가 되었다. 전쟁 후 폐허가 된 도시의 거리는 어린이들의 놀이로 채워지며 놀이풍경으로 확대되어 도시의 부흥을 상징해왔다. 여기,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와 생활을 만들며 성장하는 새로운 개념의 놀이풍경 두 가지를 소개한다. 
기존 학교 건물에서 바라본 아파트단지 고층 아파트들과 그걸 매일 보는 학생들과의 참여구상 워크샵.
기존 학교 건물에서 바라본 아파트단지 고층 아파트들과 그걸 매일 보는 학생들과의 참여구상 워크샵.
뒤에 있는 기존 학교 건물의 형태가 아이들의 활동을 담을 수 있는 입체적 프레임으로 계획되었다
뒤에 있는 기존 학교 건물의 형태가 아이들의 활동을 담을 수 있는 입체적 프레임으로 계획되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만드는 영화 같은 놀이풍경

잠신초등학교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학교다. 초중고가 모두 단지 내에 있어 단지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는 학생들에게 놀이풍경은 자율적인 성장의 장소가 되어야 했다. 고층 아파트들이 거대한 장벽을 이루며 운동장과 학교를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은 학생들에게 어디 숨을 곳 없는 답답함을 주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철봉, 사다리 같은 기존의 스테인레스 놀이 시설물들은 운동장 끝에 놓여있어서 거의 이용도가 없이 학생들 생활과 동떨어져 있었다.
필요하면 야외 수업까지 할 수 있는 놀이풍경.
필요하면 야외 수업까지 할 수 있는 놀이풍경.
학교 건물에 가까운 경계에 놀이풍경이 생기며 아이들은 잠시 멈추어갈 수 있었다.
학교 건물에 가까운 경계에 놀이풍경이 생기며 아이들은 잠시 멈추어갈 수 있었다.

이곳의 학생들과 새로운 놀이풍경을 짓기 위해 워크샵을 기획하면서 학생들의 취미를 물어봤다. 놀랍게도 많은 아이들이 ‘영상’을 만드는데 관심과 재주를 갖고 있었다. 각자 갖고 있는 핸드폰으로 쉽게 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시대를 충분히 활용하여 학생들이 생각하는 놀이와 그 공간의 구성을 영상으로 제작하도록 했다. 
학생들이 만든 놀이활동 영상들.
학생들이 만든 놀이활동 영상들.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서 기존 학교 공간 내에서 학생들의 마음이 더 담기는 곳에 대해서도 조사를 했다. 그리고 학교를 둘러싼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여러 곳의 기존 놀이터는 어떤 방식의 놀이를 할 수 있고 어떤 때에 이용하게 되는지 조사를 하며 분석적인 시각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학교 건물에 가까운 경계에 놀이풍경이 생기며 아이들은 잠시 멈추어갈 수 있었다.
학교 건물에 가까운 경계에 놀이풍경이 생기며 아이들은 잠시 멈추어갈 수 있었다.

기존의 단지 내 놀이터에서는 하지 못하는 활동을 학교에 조성될 새 놀이풍경에서 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희망도 엿볼 수 있었다. 놀이라고 해서 맹렬한 신체적 놀이만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이동하기 전 짧은 시간, 점심 먹고 난 후 교실로 들어가기 전 잠시의 시간에 친구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휴식도 갖고 싶은 욕구에 대해서 필자와 EUS+건축의 건축가들은 공감을 했다. 그 이야기와 휴식과 놀이는 기존의 평평한 운동장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마침 학교 건물과 운동장 사에 구령대와 낮은 단의 스탠드가 있었는데 그 공간이 새로운 입체적인 놀이 공간이 될 가능성이 풍부해 보였다. 
기존의 두 단이었던 스탠드를 넘나드는 계단과 그물 놀이집이 통합되어 다양한 높이에서 활동이 가능해졌다.
기존의 두 단이었던 스탠드를 넘나드는 계단과 그물 놀이집이 통합되어 다양한 높이에서 활동이 가능해졌다.
기존 구령대에서 옆으로 이어지며 얕은 언덕, 단, 지붕 캐노피로 놀이 뿐 아니라 휴식과 교육활동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기존 구령대에서 옆으로 이어지며 얕은 언덕, 단, 지붕 캐노피로 놀이 뿐 아니라 휴식과 교육활동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이 학교까지 오는데 여러 개의 문을 지난다. 아파트의 문, 학교의 교문, 학교 교사동의 거대한 콘크리트 캐노피까지 ㄷ자를 돌려 엎어놓은 것 같은 형태의 프레임이 반복되는 특징이 있어서 그것을 놀이풍경에도 적용했다. 대신 다양한 비례와 입체감을 갖게 되어서 들어가기 싫은 프레임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의 성장을 담는 느슨한 프레임이 되었다. 
기존 학교 건물의 거대한 콘크리트 캐노피는 아이들의 스케일에서는 너무 크지만, 새 놀이풍경에서의 캐노피는 목재와 반투명의 지붕을 가지며 풍부한 표정을 갖게 되었다.
기존 학교 건물의 거대한 콘크리트 캐노피는 아이들의 스케일에서는 너무 크지만, 새 놀이풍경에서의 캐노피는 목재와 반투명의 지붕을 가지며 풍부한 표정을 갖게 되었다.

놀이풍경을 구성하는 다양한 프레임은 학생들이 만든 영상의 프레임과도 닿아있다.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형태적인 단지 내 놀이터들과는 달리 중성적인 프레임들은 학생들이 스스로 혹은 같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담는 장면의 연속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놀이 시퀀스’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기존 구령대도 놀이풍경의 일부가 되도록 발전시켰다. 설계 단계의 스케치와 모형.
기존 구령대도 놀이풍경의 일부가 되도록 발전시켰다. 설계 단계의 스케치와 모형.

운동장에서 학교를 연결하는 놀이풍경

서울시 동대문구에 자리 잡은 배봉초등학교는 배봉산이라는 귀중한 자연환경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과의 연결성 없이 공간이 평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 학생들은 매일 높은 언덕과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며 학교를 다닌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사용자 참여 설계를 통해 학생들이 매일 지루하게 경험하는 공간이 지역성을 담은 건강한 장소가 되고, 획일적인 놀이터가 아닌 ‘특별한 기억을 담을 수 있는 놀이풍경’을 만들어 학교가 가진 공간들의 장점을 되살리는 데 있다.
마치 배봉산 둘레길 같이 학교에서부터 운동장까지 이어지는 ‘놀이키움’ 놀이풍경.
마치 배봉산 둘레길 같이 학교에서부터 운동장까지 이어지는 ‘놀이키움’ 놀이풍경.

필자와 EUS+건축은 세 차례에 걸쳐 배봉초 3~5학년 20명 학생과 함께 디자인 워크숍을 가졌다. 대부분의 학생이 본관 뒤 필로티 공간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했지만, 놀이법은 걷기, 달리기, 더 빠르게 달리기 등의 다소 단조로운 행위 중심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가 가진 ‘지형적 특징인 언덕’을 활용해 보기로 했다. 

두 번째 워크숍에서는 ‘입체’를 주제로 평면적인 놀이법을 입체화하는 디자인 워크숍을 진행했으며, 결과적으로 웅크리기, 미끄러지기, 기대기, 올라타기 등 다양한 언어를 가진 놀이풍경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을 마지막 시간에 서로 연결해 봄으로써 필로티 사이에서만 한정된 놀이 공간이 학교 전체, 공간과 공간 사이의 놀이 경험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엄청나게 높은 스탠드 위에 있는 학교 교사동은 아침에 등교하는 학생들이 보기만 해도 지치게 만들었다. 놀이키움이 생기고 난 후에는 오르는 그 길이 더 즐거워졌다.
엄청나게 높은 스탠드 위에 있는 학교 교사동은 아침에 등교하는 학생들이 보기만 해도 지치게 만들었다. ‘놀이키움’이 생긴 후에는 오르는 그 길이 더 즐거워졌다.
‘놀이키움’의 여러 공간들.
‘놀이키움’의 여러 공간들.

배봉초의 주변으로는 배봉산이라는 커다란 아이덴티티가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삼국시대 보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며 산을 감싸 안는 ‘배봉산 둘레길’은 지역민의 명소로 지난 2018년 공공디자인 대상 수상작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를 모티프 삼아 둘레길의 형태를 대지로 가져왔다.

본관에서 운동장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된 패스는 아이들의 놀이 활동 반경을 확장하고 기존 놀이 공간들 사이를 긴밀하게 연결한다. 둘레길의 계단을 올라가면 보이는 트리하우스는 에코스쿨 내 화단과 어우러진 놀이풍경을 형성한다. 

산속의 오두막 같은 이 공간은 아이들이 도심 속에서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자연 친화적 입체 놀이 경험을 할 수 있게 한다. 높은 경사로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거쳐 교실로 가던 학생들은 더는 언덕이 지루하고 힘든 공간이 아닌, 놀이의 공간이자 커뮤니티의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마주하는 학교의 새로운 등교길은 더 이상 부담스러운 계단의 모습이 아니라 자연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완만한 언덕의 모습이다.
아이들이 마주하는 학교의 새로운 등교길은 더 이상 부담스러운 계단의 모습이 아니라 자연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완만한 언덕의 모습이다.
배봉초 놀이풍경 다이어그램. 계단과 화단을 이어주는 둘레길을 만들고, 운동장과 놀이경사로 연결해 놀이공간 확장. 우드하우스를 배치해 작은 놀이공간 제공.
배봉초 놀이풍경 다이어그램. 계단과 화단을 이어주는 둘레길을 만들고, 운동장과 놀이경사로 연결해 놀이공간 확장. 우드하우스를 배치해 작은 놀이공간 제공.
운동장과 면하는 경사면은 그물과 클라이밍으로 이루어져 있어 아이들의 놀이 반경을 점진적으로 확장시킨다.
운동장과 면하는 경사면은 그물과 클라이밍으로 이루어져 있어 아이들의 놀이 반경을 점진적으로 확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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