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 조각이 돈이 된다고?! 지폐와 종이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

곽재식 교수

발행일 2024.12.11. 13:30

수정일 2024.12.1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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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22) 지폐와 휴지, 재활용 이야기
곽재식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돈, 언제부터 널리 쓰이게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돈, 언제부터 널리 쓰이게 되었을까?

돈의 탄생

많은 세상 사람들이 정말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을 때, 아마 돈이라는 대답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돈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한반도는 돈이 일찌감치 탄생한 곳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럽 곳곳에 퍼져 있는 고대 그리스의 금화와 은화, 로마 제국 시대에 발행된 다양한 동전들과 비교해 보자면 고대의 한반도에서 돈이 활발하게 사용된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고려 시대 즈음이 되면, 건원중보, 해동통보 같은 이름이 붙은 다양한 엽전이 만들어져 사용된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유물도 풍부하게 나타나는 편이다. 그렇지만 역시 돈이 아주 활발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활구라고 해서 한반도 모양과 비슷하게 만든 은으로 된 작은 병을 돈으로 사용했다는 독특한 기록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활구는 은 덩어리이니 아무래도 하나의 가치가 상당히 높게 나간다. 이런 돈이 유행했다면 부유한 사람들이 큰 거래를 하거나 땅과 집을 사고 팔 때 가끔 돈이 사용되기는 했겠지만, 일상생활에 깊이 파고들어 누구나 돈을 항상 들고 다닐 만큼 돈이 널리 쓰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려 시대 즈음이면 건원중보, 해동통보 같은 엽전을 만들어 사용한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 시대 즈음이면 건원중보, 해동통보 같은 엽전을 만들어 사용한 기록이 나타난다.

조선 시대, 지폐를 만들었던 하륜

그러나 그 후에도 한국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돈을 활발하게 유통시키기 위해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런 여러 시도 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사례가 조선 초, 하륜의 생각이다. 하륜은 1401년에 종이로 된 돈, 그러니까 지폐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해 보자는 대단히 앞서가는 주장을 제안했다. 심지어 그의 제안은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몇 차례에 걸쳐 실행되기까지 했다.

지금은 세계의 누구에게나 지폐라는 물건이 너무나 친숙하다. 하지만 하륜이 종이 돈을 제안한 600여년 전에 이것은 꿈과 비슷한 이야기였다. 나에게 음식이나 옷 또는 아름다운 장신구 같은 물건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50000”이라는 숫자와 신사임당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한 장 주면 그 종이 쪽지를 받고 물건을 내어 줄 수 있을까? 도대체 5만원 짜리 돈이라는 종이에 무슨 대단한 쓸모가 있다고 그 종이 조각과 옷 한 벌을 바꾼단 말인가? 금덩어리로 된 금화나 은덩어리로 된 은화라면 금, 은이니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5만원 짜리 지폐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지폐에는 이미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메모지로도 쓸 수 없고, 감촉이 너무 뻣뻣해서 하다못해 화장지로 쓰기도 나쁘다. 그런데 그 종이에 그렇게 큰 가치가 있다고 모든 사람들이 사용한다고? 이것은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5만원 짜리 지폐에 가치가 있는 이유는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은행이 그 종이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사실을 대한민국 국민과 많은 외국인들이 모두 서로 약속하고 믿기로 했기 때문이다. 경제가 발달한 지금은 구체적인 실체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힘든 암호화폐 같은 것도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된다.

하지만, 600년 전에 이런 방식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경제가 발달한 영국만 하더라도 영국은행이 처음으로 종이 쪽지를 돈으로 사용하는 지폐를 개발해서 쓴 것이 18세기 후반 경이다. 하륜이 거의 400년 가까이 앞선다.

하륜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중국에서 앞선 시대에 비슷한 시도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상업이 발달한 중국 송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에서는 상인들끼리 ‘교초’라고 하여 물건의 영수증을 주고받으며 거래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니까 어떤 창고에 금덩어리 100개가 보관되어 있는데, 다른 상인에게 그 금덩어리를 넘기고 땅을 산다고 하면 실제로 금덩어리 100개를 힘들게 배달해 주는 대신, “창고에 있는 금덩어리 100개는 이제부터 당신 것”이라는 종이 증서를 한 장 써서 넘긴다는 것이다.

이런 거래를 자주 하다 보면 사람들은 그 종이 증서를 금덩어리 100개의 가치 마냥 취급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 종이 증서는 자연히 종이 돈 비슷하게 쓰인다. 나중에는 나라에서도 교초라는 이름으로 실제로 지폐 기능을 하는 증서를 발행해 쓰기도 했다.

하륜을 비롯한 조선 시대 초기 사람들은 중국의 이런 문화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와 거의 비슷한 생각으로 나라에서 종이로 돈을 만들어 유통시켜도 좋을 거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이렇게 만든 돈을 아예 저화(楮貨), 즉 종이로 만든 화폐라고 불렀다.

하륜이 지폐 발행에 도전한 두 번째 이유로는 조선의 종이 중에서 좋은 제품은 그 자체로 꽤 귀한 물건 대접을 받아 조선 사람들이 거래할 만한 물건으로 받아들이기가 더 쉬웠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해 볼 만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종이는 상당한 기술이 있어야만 하는 물건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종이는 상당한 기술이 있어야만 하는 물건이다.

종이 만드는 기술과 선물로 하사된 ‘한지’

21세기 한국에서 비어 있는 하얀 A4 용지 한 장을 딱히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렇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이런 종이는 상당한 기술이 있어야만 하는 물건이다. 나무를 자르고 가공해서 종이를 만든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혹시 주변에 산에서 맨손으로 나무를 잘라 종이를 만들어 본 적 있는 사람이 있는가? 맨손으로 불도 피우고, 나뭇가지로 작살을 만들어 물고기도 잘 잡는 캠핑의 달인이라고 하더라도 종이를 맨손으로 만들기란 대단히 어렵다.

종이는 그 성분을 보면 주로 셀룰로스(cellulose), 헤미셀룰로스(hemicellulose), 리그닌(lignin) 등으로 되어 있는 물질이다. 이런 물질을 얻기 위해서는 나무에서 이런 성분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부분을 잘 삶아낸 뒤 염기성을 띤 약품을 사용하는 가공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작업이 잘 이루어져 이런 성분들이 튼튼히 엮여 굳어지면 마치 얇은 나무껍질과 비슷해 보이는 얇은 물질이 나온다. 이 물질은 그러면서도 나무껍질처럼 부스러지지는 않고 천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며 나무껍질보다 훨씬 균일하고 매끈하다. 이것이 바로 종이인데, 한국인들은 고대로부터 특히 닥나무를 원료로 사용해서 종이를 잘 만들곤 했다. 하륜이 제안한 저화라는 말에서 저(楮)라는 말 역시 원래 뜻은 닥나무라는 의미다.
전통한지의 재료인 닥나무 껍질을 말리는 모습. 지리산 자락 함양군 창원마을에서 3대째 전통한지를 만들고 있는 이상옥씨. (제공: 함양군청 김용만 주무관)
전통한지의 재료인 닥나무 껍질을 말리는 모습. 지리산 자락 함양군 창원마을에서 3대째 전통한지를 만들고 있는 이상옥씨. (제공: 함양군청 김용만 주무관)
그렇기 때문에 고려 시대 사람들은 고려의 종이 중에 백추지 등 몇 가지 종류는 특히 품질이 좋아서 중국인들에게 선물로 주면 좋아한다고 여길 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조선 시대 즈음에 이르면 북방의 여진족 등 다른 민족에게 조선의 발달한 문화를 과시하기 위해서 뛰어난 기술로 생산한 깨끗하고 멋진 종이를 조선의 임금님이 선물로 내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 1437년 음력 10월 1일 기록을 보면 세종 임금이 어느 북방 이민족 무리의 우두머리인 우장아라는 사람과 오영응합이라는 사람에게 종이를 선물로 하사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요즘 나라에서 주는 기념품이 A4 용지 한 묶음이라고 하면 “무슨 장난이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 종이에 대해 잘 모르는 민족이 보면 어떻게 만드는지 짐작도 하기 힘든 새하얀 종이는 매우 신기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따져봐도 한국 전통 방식으로 만드는 종이인 한지는 질기고 오래 가는 뛰어난 품질을 갖고 있어서, 2016년에는 이탈리아 로마 국립도서병리학연구소에서 로사노 복음서 등의 이탈리아 유물을 수리하기 위한 용도로 한국의 전통 한지를 수입해서 사용했다는 소식이 있었을 정도다.

그래서 조선 시대 사람들은 특유의 질 좋은 종이 만드는 기술을 활용하면 훌륭한 지폐도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조선왕조실록》 1415년 음력 7월 25일 기록을 보면 종이 만드는 관청인 조지서라는 곳에서 저화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지금은 아마도 서울 지하철 3호선 홍제역 1번 출구 근처로 추정되는 위치다. 바로 거기가 조선 초기 사람들이 야심 차게 경제 발전을 도모하면서 돈을 찍어내던 곳이다. 세계 각지의 증권거래소 등지에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기를 기대하며 황소 동상 같은 것을 세워 놓곤 하는데, 서울에서 돈이 많이 생기는 복을 기원할 만한 장소를 짚어 본다면, 홍제역의 조지서 터도 좋은 장소일 것이다.
홍제역 인근 세검정초등학교 정류장에 세워진 ‘조지서 터’ 표지석
홍제역 인근 세검정초등학교 정류장에 세워진 ‘조지서 터’ 표지석
안타깝게도 하륜의 제안으로 탄생한 조선의 지폐는 활발히 사용되지 못하고 슬그머니 잊히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 시절 조선 시대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종이 조각에 귀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밖에 조선 조정에서 지폐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던가, 생활 속에서 쓰기에는 너무 크기가 크고 가치가 높았다는 등의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쉬고 있는 종이 ‘휴지’를 재활용한다면

그렇지만 종이로 돈 만드는 일에 도전했을 정도로 발달 된 조선 시대의 종이 기술은 지금도 우리 말 속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다 써서 쓸모 없어진 종이를 한국에서는 흔히 ‘휴지(休紙)’라고 하는데, 이정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이 말은 한자어이기는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말이라고 한다. 한자 그대로 뜻을 옮기면 ‘쉬고 있는 종이’라는 뜻인데, 다 쓴 종이를 ‘버릴 종이’, ‘쓰레기 종이’라고 하지 않고 하필 ‘쉬고 있는 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정 박사는 조선 시대에는 다 쓴 종이를 재활용해서 다시 쓰는 기술도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다 쓴 종이라고 하더라도 잠시 쉬었다가 얼마 후 새 종이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으로 휴지라는 말을 썼다고 보고 있다.

심지어 앞서 언급한 1415년, 조지서에서 지폐를 만들었다는 기록에서는 지폐를 만들 때 원료로 휴지를 재활용해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흔히 돈이나 증권이 가치가 없어졌을 때, ‘휴지 조각이 되었다’는 말을 쓰는데, 조선에서는 어찌나 종이 재활용 기술이 발달했는지 반대로 휴지로 돈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보면, 조선의 종이 기술과 휴지 문화는 현대의 우리에게도 뭔가 깨우쳐 주는 느낌이다. 한국에는 종이를 생산하기 위한 나무가 많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외국에서 나무를 많이 수입해서 종이를 만든다. 그런 만큼, 종이 재활용 기술을 발전시키면 수입을 줄일 수 있으니 한국 경제에도 좋고 나무를 아끼게 되니 숲 환경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종이 재활용 기술을 현대의 한국인들이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면, 독특한 휴지 문화가 있는 나라, 지폐의 전통이 깊은 나라에 어울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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