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힘, 밥심…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키웠다!

곽재식 교수

발행일 2024.10.30. 15:21

수정일 2024.10.30. 17:57

조회 1,881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19)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된 쌀 농사와 논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가을 추수를 앞둔 벼의 모습
가을 추수를 앞둔 벼의 모습

‘벼’를 기르기 위해 고안된 ‘논’의 등장

인도 동부의 아삼 지방은 열대 지방의 풍요로운 기후 속에서 수많은 야생 동식물들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아삼에 있는 마나스 야생동물 보호구역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자연 보호 구역이다. 그런데 한국에 넓은 땅을 할애해서 그곳을 인도 동부, 아삼 지방의 늪지대처럼 꾸며 놓은 곳이 있을까? 동물원이라도 꾸미려고 한다면 모를까, 악어 떼가 나올 것 같은 그런 곳을 굳이 한국에 왜 만들까? 그런데 의외로 한국에는 그런 장소가 많이 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최근에 생긴 것도 아니고 족히 청동기 시대 때부터 고대 한국인들은 수천 년간 그런 장소를 대규모로 건설하곤 했다. 그 장소는 바로 벼를 기르는 이다.

오랜 세월 우리가 밥으로 먹었던 쌀은 한반도에서 원래 자라던 식물이 아니다. 쌀이 처음 생겨난 곳은 인도 동부에서 동남아시아 근방에 이르는 지역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아마 처음 ‘쌀 농사’가 시작된 곳도 아마 그 근처일 것이다. 야생에서 자연적으로 자라나고 있던 쌀을 우연히 먹어 본 어느 옛사람이 그 쌀을 키워서 먹어 보자는 생각을 하면서 쌀 농사가 처음 시작되었을 것이다.

뉴욕대학교의 마이클 프루개넌 연구팀은 2011년 쌀의 유전자를 복합적으로 연구해 본 결과, 최초의 쌀농사는 중국 남부 양쯔강 근처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그 말이 맞다면, 중국 남부에서 성공한 쌀 농사 기술이 이후 세계 각지로 퍼졌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흔한 오래된 풍경이라
대단찮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은 벼라는 식물을 기르기 위해 개발된
'인공 환경'이다.
그 후 한반도에도 쌀 농사 기술을 배워 온 사람들이 등장했다. 최근에는 신석기시대 때부터 한반도에 쌀 농사가 시작되었을 수 있다는 의견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확실한 것은 대략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즈음인 청동기 시대에 쌀 농사는 한반도에서 상당히 활성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청동기 시대의 고대 한국인들은 이미 물이 찰랑거리는 연못 내지는 늪 같은 곳을 일부러 만들어 두고 그곳에서 벼를 기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논을 만든 것이다. 열대 지방의 늪지대에서 잘 자라나는 벼의 특징을 이용하기 위해 그런 모양의 땅을 만들었다고 생각해 본다면, 논 농사는 사파리 동물원에서 악어를 기르기 위해 일부러 늪지대를 만든 것과 비슷한 일이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흔한 오래된 풍경이라 대단찮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논은 악어 대신 벼라는 식물을 기르기 위해 개발된 인공 환경이다.

한국인들은 논 농사에 익숙하며 쌀에 친숙하다. 그렇기에 쌀을 키우는 곳을 일컫는 ‘논’이라는 특별한 단어가 별도로 있을 정도다. 수수 키우는 땅은 수수밭, 밀 키우는 땅은 밀밭, 콩 키우는 땅은 콩밭이라고 하지만 쌀을 키우는 땅은 쌀 밭이라고 하지 않고 따로 논이라는 말로 부른다. 심지어 한국인들은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논을 따로 표현할 글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논이라는 뜻의 한자 ‘답(畓)’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논 답(畓)’자는 중국에는 없는 한국에서만 쓰는 글자다.
논은 벼를 기르기 위해 개발된 인공 환경이다. 전통 모내기를 체험하는 모습.
논은 벼를 기르기 위해 개발된 인공 환경이다. 전통 모내기를 체험하는 모습.

쌀을 논에서 키울 때의 장점은?

이렇게 논이 중요해진 이유는 쌀을 논에서 키우면 여러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논을 만들면 땅에 물을 계속 채워 두기 때문에 농사지을 때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되는 잡초 문제가 줄어든다. 잡초 또한 식물이므로 빛을 받으며 광합성을 해야 잘 자라날 수 있다. 그렇기에 흙탕물을 채워 놓은 논의 물속에서는 잡초도 자라나기가 어렵다. 기껏해야 벼처럼 늪지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특이한 몇몇 식물이 겨우 자라날 수 있을 뿐이므로, 그런 몇몇 예외만 신경 쓰면 된다.

논은 진흙탕 물을 채워 넣기에 그 자체가 비료 역할을 어느 정도 해준다는 것도 또 다른 장점이다. 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비료를 뿌리지 않는다면 땅속에 있는 영양분을 농작물이 빨아 먹는다. 그러면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밭은 농사 짓기 어려운 황폐한 땅으로 변해 간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수분이야 보충이 되겠지만 다른 영양분은 달리 보충될 방법이 마땅찮다. 그렇기에 비료를 쉽게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농사짓는 것을 멈추고 2, 3년 땅을 쉬게 해주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에 비해 논은 늪지대 같은 특수한 환경을 만들어 놓는다. 그렇기에 보통 땅에서 세균 등의 미생물이 영양분이 될 수 있는 물질을 분해해서 날려 보내는 작용이 논에서는 덜 일어난다. 그러면서 냇물, 연못 물, 봇물을 끌어와 논에 채워 넣어 주면 그 흙탕물 속에 들어 있는 성분이 새로운 흙 역할을 해주어, 비료와 비슷한 작용을 하기까지 한다. 덕택에 밭에 비해 논은 땅을 덜 쉬어 주어도 된다.
논은 늪지대 같은 특수한 환경을 만들어 놓는다. 미생물 등이 살아가는 생명의 보고가 된다.
논은 늪지대 같은 특수한 환경을 만들어 놓는다. 미생물 등이 살아가는 생명의 보고가 된다.
여기에 더해서 쌀은 다른 작물에 비해 씨앗 하나를 길렀을 때 나오는 수확이 많다는 장점까지 갖고 있다. 그러므로 땅이 좁아도 쌀 농사를 지으면 많은 수확을 얻어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다. 인도에서부터 한국까지 아시아 동부의 쌀 농사 지역은 세계적으로 가장 인구가 많이 몰려 사는 인구 조밀 지역에 속한다. 이 지역에 원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 수 있었던 것이 따지고 보면 쌀 덕택일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제 꽤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33년에 백제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서 나라의 남쪽 주(州)와 군(郡)에서 벼농사를 시작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은 한국사에서 정부가 벼농사를 추진한 최초의 기록이다. 옛 기록이라 연대에는 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백제에서 그 역사의 초기에 벼농사의 장점이 많다는 점을 깨닫고 더 많은 사람들이 벼농사를 더 잘 짓도록 벼농사 보급 정책을 실시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인들은 원래 북쪽에서 내려와 한강 주변에 정착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한반도 북부만 하더라도 벼농사가 잘 되지 않는 지역이므로 초기 백제인들은 벼농사의 중요성을 잘 몰랐을 것이다. 그러다 시일이 흐르면서 벼농사는 경제적인 효율이 높기 때문에 잘만 해내면 사람들이 굶주림을 벗어날 수 있고 많은 수확을 거두어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여 농업 발전 계획을 추진한 것 아닐까?

백제의 초창기 중심지는 서울 지역이었으므로 아마도 서울 남쪽 지역이 최초로 벼농사에 대한 국가 정책이 시작된 곳이라고 추측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마침 그로부터 5년 후의 《삼국사기》 기록에는 백제에서 흉년이 들었다며 술 빚는 것을 금지하는 금주령을 내렸다는 내용도 보인다. 이 역시 한국 역사 최초의 금주령 기록이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곡식을 원료로 술을 만들어 먹는 일을 중단하면, 그만큼 곡식이 남아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곡식 가격이 내려가고 가난한 사람들도 더 싼 값에 곡식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당시의 금주령은 도덕이나 건강을 강조하는 정책이었다기 보다는 식량 확보 정책이었다. 이 역시 초창기 백제 조정에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이야기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생태경관보전지역 내 논 습지에서 전통 벼베기 행사에 참여한 어린이들
서울 송파구 방이동 생태경관보전지역 내 논 습지에서 전통 벼베기 행사에 참여한 어린이들

쌀 품종 개발, 조선 시대엔 27종까지 늘어나

이런 여러 노력 덕분인지 세월이 흐르면서 벼를 키우는 방법은 계속 발전했다. 벼와 같은 작물은 특정한 습성을 나타내는 무리들만 모아서 기르거나, 혹은 서로 다른 습성을 나타내는 무리들끼리 잡종을 만드는 방식으로 품종을 개량할 수 있다. 현대의 유전자 조작 기술처럼 원하는 유전자 하나하나를 끼워 넣는 기술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이런 방법으로 품종 개량을 거치면 옛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한 품종에 유전자를 몰아 주어 독특한 특징이 있는 쌀 품종을 개발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백제 시대로부터 천 수백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조선 시대 정도가 되면 이미 각기 특성이 다른 다양한 쌀 품종이 나와 있어서, 땅 조건에 맞게 잘 자라나는 특별한 쌀을 기르는 것도 가능했다. 15세기에 지금의 서울 금천구에 살던 강희맹이 쓴 책 《금양잡록》을 보면, 그 옛날에도 그가 쌀 농사를 지을 때 선택할 수 있었던 쌀 품종이 자채, 저광, 황금자, 우득산도, 사노리 등 27개나 있었다고 한다.
다양한 쌀 품종으로 개량된 우리 쌀
다양한 품종으로 개량된 우리 쌀
원래 열대작물인 쌀은 날씨가 덥고 비가 많이 내리는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남부, 일본 등지에서 잘 생산된다. 그와 비교해 보면 한반도의 쌀 농사는 어려운 점도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이렇게 다양한 쌀 품종을 개발했던 것은 악조건을 극복하고 한반도에서 더 잘 자라나는 벼를 얻기 위한 시도였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자원이 부족하고 땅도 넓지 않은 한국에서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된 것도 수천 년간 더 농사를 잘 짓고, 더 좋은 벼를 기르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수없이 도전했던 그 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분 아닐까 싶다.

백제 시대 쌀 농사에 대한 최초의 역사 기록이 남아 있고, 조선 시대 쌀 농사 기술의 중심지였던 서울은 지금 완전한 상업 도시로 변모했다. 그렇기에 벼농사 짓는 논이라고 하면 이제는 아무래도 서울에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사실 찾아보자면 지금도 서울에는 일부 지역이긴 하지만 벼농사를 하는 곳이 있다. 서울 강서구에는 여전히 논이 약간 남아 있어서 지금도 농협이 운영되고 있으며 쌀 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금년에는 인근 어린이집의 어린이들과 벼베기 체험 행사를 하며 쌀을 수확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청동기 시대 때부터 시작된 쌀 농사의 전통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꾸준히 내려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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