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기자의 눈에 비친 120년 전 서울의 모습은 어땠을까?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4.08.13. 17:05

수정일 2024.08.13. 18:35

조회 3,817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00여년 전 경성 거리 전경. 멀리 인왕산과 무악재의 능선이 보이고, 집집마다 일장기가 걸려 있다.
100여년 전 경성 거리 전경. 멀리 인왕산과 무악재의 능선이 보이고, 집집마다 일장기가 걸려 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77) 스웨덴 기자의 서울 여행기

2024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북유럽 4국(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북유럽 여행 후 우리나라와 북유럽 나라의 인연들을 찾아봤다. 1950년 6.25전쟁 때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가 의료 인력과 시설, 의약품 등을 지원했으며, 이들 3개국의 지원으로 1958년에 개원한 국립의료원은 현재 국립중앙의료원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경주에 위치한 신라 고분 중 서봉총(瑞鳳塚)은 스웨덴 왕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이 무덤의 발굴에 참여한 인연 때문에 생긴 명칭이었다. 스웨덴은 한자로 서전(瑞典)이라 표현했는데, 스웨덴의 ‘서’와 봉황 문양이 장식된 금관의 발굴에서 따온 ‘봉’자를 합성해 ‘서봉총’이라 한 것이다.

러일전쟁으로 한국에 온 스웨덴 기자

북유럽의 나라 중 스웨덴은 한국인 입양아를 많이 받아들인 나라이기도 했다. 1991년에 상영된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은 스웨덴에 입양된 수잔 브링크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고국의 친모를 찾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였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인물 알프레드 노벨의 흔적은 수도 스툭홀름의 중앙 광장에 위치한 노벨박물관, 노벨상 시상식과 만찬이 열리는 스톡홀름 시청사에서 확인할 수가 있었다.

북유럽 여행으로 스웨덴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과정에서 지금부터 120년 전인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으로 온 스웨덴 기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손 그렙스트는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도쿄에 왔는데, 일본 군부가 한반도 취재를 금지하자 영국인 무역상으로 밀입국했다.

1904년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해, 1905년까지 한국을 여행한 후 1912년에 스웨덴에서 책을 출간했다. 스웨덴판을 저본으로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김상열 번역)라는 책이 2005년 '책과함께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필자는 이 책을 중심으로, 120년 전 스웨덴 기자의 눈에 비친 서울의 모습들을 찾아봤다.
아손 그렙스트는 1904년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해, 1905년까지 한국을 여행한 후 1912년에 스웨덴에서 책을 출간했다.
아손 그렙스트는 1904년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해, 1905년까지 한국을 여행한 후 1912년에 스웨덴에서 책을 출간했다.

나가사키에서 출발하여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으로 가는 니폰(日本)-유센(郵船) 소속의 증기선 ‘나토마루’에 승선한 아손은 책의 첫 부분에 “일본과 러시아 제국이 여순항을 둘러싸고 한창 치열하게 접전 중이고, 대한해협은 떠다니는 수뢰로 가득 차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고 기록해 러일전쟁 발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틀간의 항해 끝에 부산항에 도착한 후 처음 접한 한국인들의 인상에 대해서는 “전형적인 몽고 인상의 그들은 온화하고 무관심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피부색은 연노랑에 검붉은 구리색까지 다양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사람 좋다는 인상을 줬고 회색이나 파란 기모노 차림으로 영국식 여행 모자를 쓰고 있는 일본인들보다 더 호감을 줬다.”고 기록해 한국인들의 첫인상에 호감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아손의 기행 후 120년 만인 2024년에 스웨덴에 첫발을 디뎠던 필자 역시 체격은 크지만 늘 온화한 모습으로 친절하게 외국인을 접대하는 스웨덴 사람들에 좋은 첫인상을 가질 수 있었다. 부산역에서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출발했다. 

120년 전 서울에 대한 인상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한 아손은 ‘멋지고 품위가 있는’ 스테이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한 후 나는 즉시 푹신하고 깨끗한 침대에 몸을 눕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스테이션 호텔은 영국인 선교사 엠벌리(Emberley)가 운영했던 호텔로, 1901년 4월 서대문역 부근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1900년 8월 경인선의 전 구간이 개통되면서 종착역이 된 곳은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이 아닌 서대문역으로, 현재의 이화여고 일대에 위치하였다. 이화여고 정문 앞에 ‘서대문정거장 터’라는 표석을 찾아볼 수가 있다.

스테이션 호텔을 이곳에 세운 것도 기차의 종착역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1901년 조선을 방문했다가 스테이션 호텔에 투숙했던 미국인 버튼 홈즈는 “역을 나와 스테이션 호텔로 따라 갔는데, 여러 채의 소규모 조선식 가옥이 이어진 곳에 위치한 조용하고 아담한 여관이었다. 정거장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이곳 주인 엠벌리 씨와 부인은 영국 사람으로 예전에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적이 있다고 했다.”고 기록했다.

1904년 12월 스테이션 호텔을 찾았던 아손은 “서구식으로 지어진 건물인데, 엠벌리라고 하는 영국인 선교사가 운영하고 있었다. 마침 손님이 나 혼자 밖에 없던 것이 큰 작용을 했는지 주인은 자상하고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 후, 엠벌리의 말을 인용해, “이 도시는 조용하고 외국인들이 아무 이유 없이 곤욕을 치르는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라 하고 있다. 현재에도 외국인들에게 안전한 대표적인 도시 서울의 이미지가 120년 전에도 그대로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1900년경의 경성 전경
1900년경의 경성 전경

아손은 서울에 도착한 첫인상에 대해,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은 갈색의 동산들과 검고 거친 화강암으로 둘러싸여 마치 거대한 독의 밑바닥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울 동안 동산들은 헐벗고 황량하나 이른 봄이면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여 산비탈을 덮는다. … 남동쪽의 몇몇 고지대에 있는 숲은 사시사철 푸르고 싱싱하며 서울 교외의 서편으로 폭넓은 한강이 도도히 흘러간다. 북동쪽에는 거대한 북한산이 하늘을 찌를 듯 군림하며 험준하고 웅대한 자태를 자랑한다.”고 기록했는데, 120년 전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손은 호텔에서 윤산달이라는 통역을 소개받았고, 함께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우리도 외국에 나가면 그 나라의 시장을 꼭 둘러보는 것처럼 아손도 시장을 둘러보고 자신의 소감을 적었다. “서울의 거리는 단조로운 편이고 상점은 도시의 몇 구역에만 따로 위치해 있다. 상점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개방적이고 다른 하나는 폐쇄적이라 할 수 있다. … 길 옆에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진열해 놓아서 행인들은 언제든지 걸음을 멈추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자기가 원하는 상품을 고를 수 있다.”

가게에서 파는 물건도 기술하고 있는데, “주석으로 만든 반지, 납, 유리잔, 별갑, 얼룩 문양이 조각된 나무 빗, 창호지로 된 갓상자, 화장 용구, 머리핀, 나막신, 일본 나막신, 거울, 수판, 담뱃대, 안경 돈주머니 등 온갖 것이 다 있다.”고 기록해, 120년 조선인들의 생필품이 무엇인지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아손은 신분을 위장하기는 했지만 종군 기자로서, 당시의 가장 큰 사건인 러일전쟁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다. “서울에 있는 일본인들은 발틱 함대의 격침을 축하하느라 파티에 파티를 거듭했고,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승리의 기쁨에 흠뻑 젖어 있었다. 떠오르는 태양의 붉고 하얀 깃발은 집집마다 높이 세워져 펄럭였다. … 공사관 밖에 일렬 황대로 정렬한 이들은 발틱 함대를 전멸시킨 용사들의 전공을 노래로 축하했다.”

순명황후 장례식 모습과 고종 황제와의 만남
순종비 순명효황후의 사진
순종비 순명효황후의 사진

아손이 서울에 있던 시기 순종의 첫 번째 왕비 순명황후(純明皇后:1872~1904)가 승하했고, 아손은 독일 영사의 도움으로 장례식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순명황후는 1882년에 11살의 나이로 세자빈으로 책봉됐다. 1897년 황태자비로 책봉됐으나,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인 1904년 11월 5일 경운궁에서 33세로 사망했다. 무덤은 현재 어린이대공원 내 유강원(裕康園)에 안장했다. 어린이대공원 일대를 지금도 능동이라 부르는 것은 유강원이 이곳에 조성된 것에서 유래한다.

아손은 당시의 장례식 행렬을 목격하면서, “그때 내 논 앞에 펼쳐진 한 폭의 그림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으리라. 아무리 비용이 많은 가면무도회라 할지라도 여기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한마디로 말해 웅장했다. 눈이 부셨다. 동양의 찬란함이요 아낌없는 풍성함이었다.”라고 하여 황태자비의 장례식이 매우 성대하게 진행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고종황제, 순종황제, 순정효황후, 영친왕의 초상 사진이다. 맨 위가 고종황제로, 고종의 오른쪽 아래는 순종황제, 고종의 왼쪽 아래는 순정효황후, 그리고 맨 아래는 영친왕이다.
고종황제, 순종황제, 순정효황후, 영친왕의 초상 사진이다. 맨 위가 고종황제로, 고종의 오른쪽 아래는 순종황제, 고종의 왼쪽 아래는 순정효황후, 그리고 맨 아래는 영친왕이다.

장례 행렬을 전송한 후 각국의 외교 사절은 고종 황제와 태자에게 조의를 표하는 시간이 마련됐는데, 아손은 이때 고종과 태자를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다. “황제의 얼굴은 개성이 없었으나 원만해 보였고 체구는 작은 편이었다. 조그만 눈은 상냥스러워 보였고 약간 사팔뜨기였다. ... 성긴 턱수염과 콧수염을 길렀지만 노란색 옷차림에 서양의 나이트 캡과 비슷한 높은 모자를 쓴 모습이었다.”고 고종의 외모를 기록한 후,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황제에 대한 이미지와는 사뭇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 한 많은 황제에게 나는 일종의 연민을 느끼게 됐다.”고 했다. 황태자에 대해서는 “황제의 옆에 서 있는 태자는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다. 작고 뚱뚱한 체격에다가 얼굴은 희멀겋고 부은 듯해서 생기가 없어 보였다.”고 기록했다.

순종의 건강이 좋아지지 못한 데는 1898년 12월에 있었던 커피 독살 미수 사건이 있다. 김홍륙이 주도해, 커피에 아편을 집어넣어 고종의 독살을 시도한 사건이 일어났다. 커피 맛에 익숙한 고종은 이상함을 느끼고 뱉었지만 순종은 그대로 마신 후 독에 중독돼 18개의 치아를 잃는 등 큰 화를 당했다.

이외에도 아손의 여행기에는 아들 하나를 두는 게 딸 백 명을 두는 것보다 좋다는 남아선호사상, 책을 읽어주는 직업인 전기수(傳奇叟), 족보를 중시하는 문화, 쥐통이라 불리기도 했던 콜레라를 물리치기 위해 고양이 언덕으로 피난하는 사람들, 스웨덴에서도 수도에 사는 시민들이 스톡홀름과 시골의 두 범주로 나누는 것처럼, 서울의 토박이들도 코레아를 서울과 시골로 나눈다는 것 등 흥미로운 기록들이 자주 보인다.

필자가 스웨덴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된 데는 무엇보다 스웨덴 출신 혼성 그룹 ‘아바’의 영향이 컸다. 주옥같은 노래들과 뮤지컬 ‘맘마미아’는 스웨덴에 깊은 호감을 가져다준다. 이제 120년 전 코레아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해 준 스웨덴 기자 아손과 그의 서울 기행문도 스웨덴에 대한 좋은 기억으로 담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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