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과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경희궁'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4.07.31. 16:39

수정일 2024.07.31. 19:09

조회 2,341

사심 가득한 역사 이야기
2026년, 조선 후기 대표궁궐인 경희궁지에 역사정원이 들어선다.
2026년, 조선 후기 대표궁궐인 경희궁지에 역사정원이 들어선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76) 영광과 수난의 역사, 경희궁

지난 7월 17일 서울시는 서울 종로구 경희궁(慶熙宮) 일대에 서울광장 10배에 달하는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경희궁 주변 한양도성과 돈의문을 복원해 역사성을 살리고, 녹지를 조성해 시민들의 휴식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우선 2026년 경희궁 내에 역사공원이 조성되는데, 궁궐숲을 조성하고, 왕의 정원을 연출한다는 계획이다.☞[관련기사]서울광장 10배 규모…경희궁 일대, 역사문화공원 된다

경희궁의 시작과 거처한 왕들

조선시대에 조성된 5대 궁궐이면서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에 비해 가장 인지도가 낮은 궁궐이 경희궁이다. 경희궁은 현재 궁궐의 원형 복원이 가장 적게 조성된 궁궐이기도 하다.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 광해군의 주도로 창건의 역사가 시작됐다. 1620년(광해군 12)에 완성했는데, 경복궁을 북궐(北闕), 창덕궁을 동궐(東闕)이라 했고, 경희궁은 서쪽에 있는 궁궐이라는 뜻으로 서궐(西闕)이라 불렀다.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이 후에 ‘경덕’이라는 시호를 받으면서, 궁궐 이름을 경희궁으로 바꿨다.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이 후에 ‘경덕’이라는 시호를 받으면서, 궁궐 이름을 경희궁으로 바꿨다.

경희궁 창건은 1617년(광해군 9) 6월 새문동(塞門洞)에 왕의 기운이가 서려 있다는 술사(術士) 김일용(金馹龍)의 말을 빌미로 광해군이 추진한 것에서 시작했다. 풍수지리설에 의한 왕기설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인조의 아버지, 원종으로 추존됨)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개입돼 있었다.

흉년에 따른 물자 수급의 어려움 속에서도 광해군은 공사를 강행했고, 궁궐 이름을 ‘경덕궁(慶德宮)’이라 했다. 그런데 정원군이 후에 ‘경덕’이라는 시호를 받으면서, 이를 피해 궁궐 이름을 경희궁으로 바꿨다.

『궁궐지(宮闕志)』 기록에 의하면 경희궁은 1620년(광해군 12)에 완공을 봤는데, 정전과 동궁, 침전, 별당 등 1,500여 칸에 달하는 규모였다. 완공의 당사자인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경희궁에 입궁하지 못한 채, 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됐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후에도 경희궁에는 조선후기 왕들이 다수 거처했고, 경종정조, 헌종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정조는 세손 시절을 경희궁의 동궁인 존현각(尊賢閣)에서 주로 보냈다.

이 기간에 정조 암살 시도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내(大內)에 도둑이 들었다. 왕이 어느 날이나 파조(罷朝)하고 나면 밤중이 되도록 글을 보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날 밤에도 존현각에 나아가 촛불을 켜고서 책을 펼쳐 놓았고, 곁에 내시(內侍) 한 사람이 있다가 명을 받고 호위하는 군사들이 직숙는 것을 보러 가서 좌우(左右)가 텅비어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보장문(寶章門) 동북쪽에서 회랑(回廊) 위를 따라 은은하게 울려왔고, 어좌(御座)의 중간 기둥 쯤에 와서는 기와 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어 쟁그랑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 ... ”고 한 『정조실록』은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범인은 홍상범의 사주를 받은 강용휘, 전흥문 등임이 밝혀졌는데, 정조 암살 시도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가 2014년 개봉한 영화 〈역린(逆鱗)〉이었다.

조선후기 왕과 경희궁의 인연

1624년(인조 2)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긴 인조는 종묘에 나아가 신주를 봉안하고 돌아와서는 경덕궁에서 순직자의 직위를 추증하고 순절자에게는 정표(旌表)를 내렸다. 1627년(인조 5)에는 후금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신했다가 돌아와서 이곳에 거처했다.

현종은 재임 기간을 주로 경희궁에서 보냈으며, 숙종은 1661년(현종 2) 8월 회상전에서 탄생했다. 재위 46년 동안창덕궁과 경희궁에 번갈아 거처한 숙종은 경희궁과 가장 큰 인연을 맺었는데, 1680년(숙종 6)에는 왕비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인경왕후는 두창 발병 8일 만인 1680년 10월 26일 경희궁에서 승하했다. 『숙종실록』은 “2경(二更)에 중궁(中宮)이 경덕궁(慶德宮)에서 승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창덕궁, 창경궁에 있던 숙종은 1717년(숙종 43) 왕세자(경종)에게 정사를 맡기고 경희궁으로 옮겨 여생을 보냈다. 1719년에 보령 60세의 헌수 하례를 숭정전에서 받았다. 숙종이 승하한 곳도 경희궁이었다. 1720년(숙종 46) 6월 숙종은 융복전에서 승하했고, 경종은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경종은 경희궁에서 즉위식을 올린 최초의 왕이 됐다.
정조는 1776년 3월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린 후 태령전(泰寧殿)을 영조의 혼전으로 삼았다.
정조는 1776년 3월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린 후 태령전(泰寧殿)을 영조의 혼전으로 삼았다.

영조는 1760년(영조 36)에 궁호를 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개칭했다. 원종의 시호에 ‘경덕’이 들어가 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1776년(영조 52) 3월 영조가 경희궁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하자, 정조는 1776년 3월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린 후 태령전(泰寧殿)을 영조의 혼전으로 삼았다. 정조는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으면서 왕위를 계승할 신분이 되자,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혜경궁 홍씨의 적극적인 권유가 이뤄졌는데, 혜경궁은 할아버지와 손자의 만남을 미리 주선한 것이다. 정조는 1776년 왕위에 오를 때까지 경희궁에서 생활했는데, 경희궁에서 암살 시도가 자주 일어나자 1777년 8월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1829년(순조 29) 10월 경희궁은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화재가 발생했다. 왕의 침전인 융복전, 왕비의 침전 회상전(會祥殿), 편전 흥정당(興政堂), 사현합(思賢閤), 월랑(月廊) 등의 건물이 화재의 피해를 봤다. 순조는 경희궁의 대규모 화재 이후 복원 사업을 지휘했고, 1832년 4월 경희궁 복원 공사 기록인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를 완성했다. 당시 화재를 당한 건물들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어서 현재의 경희궁 복원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이다.

순조는 1832년 7월 새로 중건된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1834년 11월 회상전에서 승하했다. 헌종은 1834년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가진 후 경현당 등에서 업무를 보다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철종은 1859년(철종 10) 9월 26일에 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861년 4월 12일 창덕궁으로 환어했다. 철종의 환어로, 왕이 거처하는 궁궐로서의 경희궁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됐다.

고종과 순종은 경희궁을 거처로 삼지 않았다. 1868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여 법궁으로 활용하면서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됐고, 관청의 필요에 따라 창고나 다른 용도로 쓰였다. 고종 대에 경희궁에는 조폐소, 양잠소 등이 설치됐다. 1884년 9월 독일인인 마에르텐스가 양잠소의 운영을 맡았으며, 1886년에는 청나라에서 뽕나무를 수입해 양잠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1901년에 외국인이 제작한 지도에서는 ‘뽕나무 공원(mulberry park)’이라고 표기했다.

근·현대 시기의 경희궁

경희궁은 조선후기 창덕궁, 창경궁과 더불어 왕이 거처하는 궁궐로서 주요한 기능을 했지만,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전후한 시기부터 큰 수난을 당하게 된다. 1908년부터 일본인들이 학교를 세운다는 구실 아래 경희궁 자리의 서쪽부터 정지(整地) 작업을 시작했다. 1909년에는 숭정전 앞쪽이 크게 변형됐으며, 1911년 6월 소유권이 조선총독부로 이관됐다.
숭정전은 1926년 중구 필동에 있는 일본 사찰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 현 동국대 구내)로 이전됐는데, 현재 동국대에서 정각원(正覺院)이라는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숭정전은 1926년 중구 필동에 있는 일본 사찰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 현 동국대 구내)로 이전됐는데, 현재 동국대에서 정각원(正覺院)이라는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각원을 원래의 숭정전 자리로 이전하는 계획도 검토됐으나, 건물 훼손이 심해 현재의 자리에 두고 있다.
정각원을 원래의 숭정전 자리로 이전하는 계획도 검토됐으나, 건물 훼손이 심해 현재의 자리에 두고 있다.

1910년 강제 병합 당시까지만 해도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과 부속 건물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이후 건물 다수가 파괴되거나 다른 곳으로 넘겨졌다. 숭정전은 1926년 중구 필동에 있는 일본 사찰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 현 동국대 구내)로 이전됐는데, 현재 동국대에서 정각원(正覺院)이라는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각원을 원래의 숭정전 자리로 이전하는 계획도 검토됐으나, 건물 훼손이 심해 현재의 자리에 두고 있다.

회상전은 1911년 4월부터 1921년 3월까지 경성중학교 부설 임시 소학교원 양성소로 사용되다가 1928년에 일본식 사찰 조계사에 팔려 주지 집무실이 됐다. 흥정당은 1915년부터 1925년까지 단급소학교(單級小學校) 교실로 사용되다가 1928년 일본인 사찰인 광운사(光雲寺)에 팔려 옮겨졌다.
흥화문은 1932년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사(博文祠)로 옮겨진 후 한동안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됐다.
흥화문은 1932년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사(博文祠)로 옮겨진 후 한동안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됐다.

흥화문은 1932년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사(博文祠)로 옮겨진 후 한동안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됐다. 1988년에 경희궁으로 다시 옮겨졌지만 원래의 정문 자리는 아니다. 흥화문은 현재의 서울역사박물관 동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경희궁의 전체 규모를 기억하게 해 준다.

일제는 경희궁 자리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궁궐의 지형을 변형시켰다. 숭정전 일대와 회상전과 융복전터에 거대한 방공호를 1937년에서 1945년 사이에 만들었다. 현재 275평의 규모로 남아 있다.

1910년 이후 설립된 경성중학교는 해방 이후 잠시 폐교됐다가 1946년 2월부터 1980년 6월까지 서울고등학교가 이 자리에 들어섰다. 1978년 서울시의 강남 개발과 병행해 시내에 소재한 고등학교 이전이 발표됐다. 서울고등학교는 서초동으로 이전하는 것이 결정됐고, 현재 서초구 효령로에 자리를 잡고 있다. 서울고등학교의 이전 후 이곳은 현대건설에 매각됐다.

1980년 9월 경희궁터가 사적으로 지정되고, 서울시가 현대건설로부터 경희궁터를 매입함으로써 경희궁의 옛 모습을 찾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1990년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숭정전, 숭정문 및 부속회랑, 자정전 및 부속회랑, 태녕전 및 부속회랑 등이 완공됐지만, 2002년 5월에 개관한 서울역사박물관의 존재는 경희궁 복원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번 서울시의 발표 계획으로 경희궁의 복원에 대한 기대가 커진 만큼, 서울역사박물관의 활용과 이전 등 산재한 문제들도 합리적으로 제시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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