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상·화가 박노수 숨결이 남아있는 '서울 핫플'은?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4.04.17. 16:07

수정일 2024.04.17. 16:07

조회 3,894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타이틀 이미지
이상의 집 맞은 편에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중의 하나인 ‘대오서점’이 있다.
이상의 집 맞은 편에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중의 하나인 ‘대오서점’이 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69) 서촌의 문인과 예술가들

서울의 서촌 지역은 최근 젊은 층들의 핫플레이스로 완전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지난 4월 10일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도 한국인은 물론이고, 여러 나라에서 온 이국인들이 서촌 곳곳의 명소들을 찾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가 있었다. 특히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의 모습에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곳의 경쟁력을 접할 수가 있었다. 

근현대 시기 서촌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서촌의 품격을 더욱 높여준 인물들이 있었다. 국어책에도 나오는 대표적인 근대 시인 이상과 윤동주, 그림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이상범, 박노수 화백과 서촌과의 인연을 보여주는 공간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천재 시인 이상이 20년 넘게 살았던 집 터, '이상의 집'
천재 시인 이상이 20년 넘게 살았던 집 터, '이상의 집'

시인 이상과 ‘이상의 집’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서촌을 향해 북쪽으로 올라오다 보면, 우리은행 건물이 보인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길을 들어서면 ‘이상의 집’을 만날 수가 있다. 이상(李箱:1910~1937, 본명 김해경)은 세 살부터 20여 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이 집은 철거가 될 위기에 몰렸지만 2009년 문화유산 국민신탁이 시민 모금을 주도하고 기업 후원으로 매입하여 일부라도 원형이 유지될 수가 있었다.

이 집은 원래 이상의 백부 집이었는데 이상이 양자로 들어가면서 1912년 세 살 때부터 이곳에 살게 되었다. 백부가 사망하자 이상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 150평 이상이 되었던 저택은 도시형 한옥으로 나누어 졌다. 현재의 ‘이상의 집’은 그중 하나이다. ‘이상의 집’은 현재 이상 기념관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열린 공간으로 개방하여 서촌의 새로운 명소가 되고 있다.
이상의 사진 액자가 걸려있고 한 벽면 전체에는 생전에 발표된 시, 시화, 소설들이 스캔되어 시간 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이상의 사진 액자가 걸려있고 한 벽면 전체에는 생전에 발표된 시, 시화, 소설들이 스캔되어 시간 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서촌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이상의 절친한 벗은 화가 구본웅(具本雄:1906~1953)이었다. 구본웅은 필운동에서 태어나 서촌과 인연을 맺었는데, 척추 장애를 앓아 허리가 굽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장애 화가 툴르즈 로트렉에 비유하여. ‘한국의 로트렉’이라고도 불린다. 구본웅은 이상과 같이 다니며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구본웅이 1935년 이상을 모델로 그린 ‘친구 초상’은 한국 야수파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삽화가 이승만은 털북숭이 수염의 이상과 키가 작은 구본웅이 함께 걷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남기도 했는데, 1930년대 모던보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부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각각 따서 대오서점이라고 하였다.
부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각각 따서 대오서점이라고 하였다.

이상의 집 바로 맞은 편에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중의 하나인 ‘대오서점’이 보인다. 조대식, 권오남 부부가 1951년에 개점한 헌책방으로 부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각각 따서 대오서점이라고 하였다. 2016년까지 책방 영업을 했지만, 재는 헌책방 외관을 유지한 채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가수 아이유의 앨범 자켓 촬영 장소로 알려져 젊은층들이 많이 찾고 있다. 대오서점 바로 위쪽에는 5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중국집 영화루(永和樓)가 보인다. 옛날 건물 모습이어서 더욱 반갑다.

시인 윤동주와 ‘윤동주 문학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윤동주(尹東柱,:1917~1945)가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을 다니던 시절 하숙을 했던 곳도 서촌에 그 위치가 남아 있다. 통인시장을 지나 수성동 계곡으로 올라가는 길 왼쪽 편에 윤동주 하숙집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인왕산을 넘어가면 바로 연희전문 뒷산 안산에 도착할 수 있었기에 이곳을 하숙집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 집에서 하숙했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 집에서 하숙했다.

윤동주는 1941년 5월 벗이자 후배인 정병욱과 함께 연희전문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김송(金松, 1909~1988):1909~1988) 집에서 하숙하였다. 정병욱은 윤동주로부터 증정받은 자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고를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지켜 냈고, 해방 후 출간하여 윤동주를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병욱은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일 외에도 연세대와 서울대 교수로 지내면서 한국 고전문학 연구 분야에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전남 광양시 망덕에 소재한 정병욱의 집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보존되고 있다.

윤동주가 서촌에서 살았던 시간은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로 5개월 남짓이었지만, 누상동 하숙 시절 여러 시들을 창작하였다고 정병욱은 증언하였다. 윤동주와 서촌과의 인연을 기념하여 2012년 7월 윤동주 문학관을 개관하였다. 윤동주 문학관이 들어선 곳은 원래 청운아파트를 위한 상수도 가압장이었다. 1969년 건립된 청운아파트는 2005년 완전히 철거되었고, 이 자리에는 청운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윤동주문학관은 가압장의 원형을 되도록 그대로 살리면서 윤동주의 주요 시어인 ‘우물’을 주제로 한 것이 특징이다.
윤동주문학관은 가압장의 원형을 되도록 그대로 살리면서 윤동주의 주요 시어인 ‘우물’을 주제로 한 것이 특징이다.

청운공원의 조성 후에도 상수도 가압장은 그대로 남아 있다가 이곳에 윤동주 문학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문학관은 가압장의 원형을 되도록 그대로 살리면서 윤동주의 주요 시어인 ‘우물’을 주제로 한 것이 특징이다. 열린 우물과 닫힌 우물로 구성하였는데, 열린 우물은 우물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느낌을 주고, 닫힌 우물에서는 시인의 생애를 다루는 동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이상범 가옥과 박노수 미술관

서촌에서는 근대 화가들의 흔적들도 다수 찾아볼 수가 있다. ‘이상의 집’에서 조금 걸어 올라와 필운대 쪽을 가는 길 오른쪽 골목 막다른 곳에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1897~1972) 가옥이 있다. 이상범은 충남 공주시 정안면 출신으로, 1915년 서화미술원(書畫美術院)에 입학하였다.

1917년 수료 후에는 조선의 마지막 화가로 칭해지는 조석진(趙錫晉:1853~1920)과 안중식(安中植:1861~1919)의 문하에 들어가 화업(畫業)을 쌓았다. 조석진안중식은 1902년 고종의 어진과 순종의 예진을 그린 화가이다. 이상범은 누하동에 소재한 이 가옥에 1942년부터 거주하였고, 1971년 생을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근현대를 대표하는 화가 배렴(裵濂:1911~1968)과 박노수(朴魯洙) 등도 이곳에서 스승에게 배웠다. 북촌 계동길에 있는 배렴 가옥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데,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배렴가옥은 2016년까지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배렴가옥은 2016년까지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박노수가 200년까지 거처한 박노수 가옥은 현재 박노수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박노수 가옥과 이상범 가옥은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다. 안채와 사랑채, 응접실, 작가의 손길이 아직 남아 있는 화실이 개방되어 있어 화가의 체취를 직접 느낄 수가 있다. 앞마당의 꽃담과 대청마루에 놓여진 옛날 텔레비전도 반가움을 더해준다. 1929년에 지어진 이 가옥은 도시형 한옥 그대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2005년 등록문화재 제171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상범 가옥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왼쪽에는 현대의 대표적인 여성 화가 천경자(千鏡子:1924~2015)가 1959년에서 1962년까지 살았던 가옥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곳에는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 있다.

이상범의 제자로 이화여대와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낸 박노수(朴魯洙:1927~2013)는 이상범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으며, 수묵채색화로 명성을 날렸다. 스승의 집에서 5분 정도 떨어진 옥인동 47번지에 자리를 잡은 박노수 가옥은 원래 친일파 윤덕영(尹悳榮:1873~1940)의 소유지였다. 윤덕영은 서촌 일대에 대규모 저택을 짓고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 하였다. 박노수 가옥은 윤덕영이 딸 부부에게 지어준 집으로, 6.25 전쟁 이후에는 황폐해졌다.

1973년 박노수는 이 가옥을 매입하여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수필집 『화필 인생』에는 이곳에서 생활했던 풍경들이 기록되어 있다. 박노수는 2003년 1월 뇌수종으로 쓰러진 뒤, 10년 동안 세브란스 병원에서 투병하다가 2013년 세상을 떠났다. 박노수가 세상을 뜬 후 이곳은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으로 개방되고 있다.
박노수 화백의 작품과 고미술품, 수석, 고가구 등의 컬렉션을 바탕으로 2013년 9월에 박노수 미술관을 설립했다.
박노수 화백의 작품과 고미술품, 수석, 고가구 등의 컬렉션을 바탕으로 2013년 9월에 박노수 미술관을 설립했다.

종로구청은 박노수 화백의 작품과 고미술품, 수석, 고가구 등의 컬렉션을 바탕으로 2013년 9월에 박노수 미술관을 설립했다. 

조선후기 중인(中人)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면서, 이곳을 위항문학 운동의 본산으로 삼았기 때문일까? 근현대에 들어서도 서촌은 문인,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의 중심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공간들 일부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 이제 젊은층과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로 자리를 잡아가는 곳, 서촌이 문화 예술의 중심 공간으로서의 역사를 계속 이어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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