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문살 장식으로 만든 윤씨 가옥의 개흘레ⓒ이선미
- 개흘레는 집 벽 밖의 벽장처럼 쓰는 공간이다. ⓒ이선미
친일파 윤덕영의 '윤씨가옥', 열린 공간으로 변신한다는데?
발행일 2024.02.26. 09:05
‘옥인동 윤씨가옥’이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순종황제 비 순정효황후 생가로 알려져 서울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그의 큰아버지 윤덕영의 소실의 집이었던 것으로 규명돼 지정이 취소된 후 방치돼 있던 가옥을 서울시가 열린 공간으로 리모델링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윤씨가옥을 둘러싼 이야기와 리모델링 프로젝트의 이모저모를 담은 과정은 ‘다시 여는 윤씨가옥’이라는 네 편의 영상으로 제작해 소개하게 된다. 2월 21일 그 첫 번째 ‘벽수산장과 윤씨가옥 이야기’가 공개됐다.
윤씨가옥을 둘러싼 이야기와 리모델링 프로젝트의 이모저모를 담은 과정은 ‘다시 여는 윤씨가옥’이라는 네 편의 영상으로 제작해 소개하게 된다. 2월 21일 그 첫 번째 ‘벽수산장과 윤씨가옥 이야기’가 공개됐다.
‘다시 여는 윤씨가옥’의 첫 번째 이야기 ‘벽수산장과 윤씨가옥 이야기’가 공개됐다. ⓒ서울한옥
현재 서촌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인왕산에서 흘러내리는 옥류동 계곡이 관통하던 곳으로, 계곡 주변의 절경 덕분에 조선 시대 중기부터 많은 양반과 중인이 찾는 곳이었다. 정조 임금 때 천수경이 인왕산 아래에 송석원을 지은 후 이 일대가 지금까지 송석원으로 불리고 있다.
송석원은 세도가들이 이어서 소유했는데, 바로 이곳에 윤덕영의 벽수산장이 들어섰다.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파 윤덕영이 나라를 일본에 넘긴 대가로 얻은 어마어마한 은사금을 바탕으로 프랑스 저택의 설계도를 가져와 지은 저택이었다. 당시 옥인동의 절반 이상이 그의 땅이었다고 하는데 벽수산장 인근에는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은 집과 소실의 집 등 한옥 20여 채, 배를 띄워 유람을 즐기던 연못과 드넓은 정원이 조성됐다.
송석원은 세도가들이 이어서 소유했는데, 바로 이곳에 윤덕영의 벽수산장이 들어섰다.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파 윤덕영이 나라를 일본에 넘긴 대가로 얻은 어마어마한 은사금을 바탕으로 프랑스 저택의 설계도를 가져와 지은 저택이었다. 당시 옥인동의 절반 이상이 그의 땅이었다고 하는데 벽수산장 인근에는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은 집과 소실의 집 등 한옥 20여 채, 배를 띄워 유람을 즐기던 연못과 드넓은 정원이 조성됐다.
옥인동 거리에 송석원 터 표석이 있다. ⓒ이선미
벽수산장은 해방 후 덕수병원으로 쓰였고, 한국전쟁 때는 미군 숙소가 되었다가 1954년부터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언커크) 본부로 사용되었다. 1966년에 불이 나 전소된 후 1973년에 철거돼 남아 있는 흔적도 거의 없다.
원래 딸에게 주었던 집으로 지금은 ‘박노수미술관’이 된 건물과 ‘옥인동 윤씨가옥’이라고 불리는 소실의 집만 남아 있는데, ‘서울한옥 4.0 재창조 추진계획’과 연계해 윤씨가옥을 시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리모델링해 내년 상반기에 공개한다. 궁궐 목수가 지었다는 품격 있는 한옥이지만 오랫동안 훼손되고 방치된 이 건물이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의미를 담게 될지 궁금해진다.
원래 딸에게 주었던 집으로 지금은 ‘박노수미술관’이 된 건물과 ‘옥인동 윤씨가옥’이라고 불리는 소실의 집만 남아 있는데, ‘서울한옥 4.0 재창조 추진계획’과 연계해 윤씨가옥을 시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리모델링해 내년 상반기에 공개한다. 궁궐 목수가 지었다는 품격 있는 한옥이지만 오랫동안 훼손되고 방치된 이 건물이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의미를 담게 될지 궁금해진다.
벽수산장에서 윤덕영. 벽수는 윤덕영의 호이다. ⓒ서울한옥
벽수산장은 당시 총독부 건물에 버금갈 규모로 부속 건물과 연못, 정원이 조성됐다. ⓒ서울한옥
남산골한옥마을의 ‘옥인동 윤씨가옥’
남산골한옥마을에 옥인동 윤씨가옥을 보러 갔다.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한옥마을 마당에는 보름달 아래 태울 달집에 소원을 적어 매달고 있었다.
애초에는 옥인동 가옥을 그대로 옮기려고 했지만, 부재가 너무 낡고 손상이 심해서 원래의 모습을 본떠 새로 지었다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자 ‘벽수산장과 윤씨가옥 이야기’에서 건축가 김원천이 말한 것처럼 창덕궁 석복헌에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 집이 공간 구성과 규모, 배치 면에서 1848년 헌종이 경빈 김씨의 처소로 지은 석복헌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면서 막대한 재력으로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을 동원해 지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애초에는 옥인동 가옥을 그대로 옮기려고 했지만, 부재가 너무 낡고 손상이 심해서 원래의 모습을 본떠 새로 지었다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자 ‘벽수산장과 윤씨가옥 이야기’에서 건축가 김원천이 말한 것처럼 창덕궁 석복헌에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 집이 공간 구성과 규모, 배치 면에서 1848년 헌종이 경빈 김씨의 처소로 지은 석복헌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면서 막대한 재력으로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을 동원해 지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정월대보름을 앞둔 남산한옥마을에 달집이 만들어져 있다. ⓒ이선미
석복헌과 공간 구성이나 배치가 유사한 윤씨가옥 ⓒ이선미
‘ㄷ’자형으로 이루어진 안채 위주로 문간채와 마루방과 합쳐져서 전체적으로 ‘ㅁ’자형인데, 아담하지만 조금 닫힌 구조다.
궁궐 목수들을 동원해 지었을 테니 기술이야 그렇다 치지만 왕실 여성들의 주거지를 그대로 본따 소실의 집을 지었다는 건 위세를 드러내고자 한 윤덕영의 탐욕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흔적 같았다.
궁궐 목수들을 동원해 지었을 테니 기술이야 그렇다 치지만 왕실 여성들의 주거지를 그대로 본따 소실의 집을 지었다는 건 위세를 드러내고자 한 윤덕영의 탐욕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흔적 같았다.
고지대에 있는 옥인동 가옥의 지형까지 살려 지은 남산한옥마을 윤씨가옥 ⓒ이선미
소실의 집이지만 윤덕영의 위세와 재력을 짐작할 수 있는 요소들이 곳곳에 있었다. 특히 안채 기둥머리의 익공식 공포는 최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 집에서 공력이 느껴지는 또 한 가지는 집의 벽 밖으로 만들어 벽장처럼 쓰는 공간인 개흘레이다. 대부분 판벽 형태인데 반해 이 집은 문살 장식이 화려하다.
이 집에서 공력이 느껴지는 또 한 가지는 집의 벽 밖으로 만들어 벽장처럼 쓰는 공간인 개흘레이다. 대부분 판벽 형태인데 반해 이 집은 문살 장식이 화려하다.
진짜 윤씨가옥과 벽수산장을 찾아 옥인동으로
필운대로 9가길 7-9번지를 찾아 들어가니 꽤 경사가 심한 돌계단이 버티고 있었다. 하나하나 계단을 올라서는데 그 옛날 이 계단을 올라서던 사람들이 느꼈을 심리가 조금 느껴졌다.
계단 주변에는 일본식 장식도 보였다. 계단 끝에 여전히 위용이 남아 있는 사랑채 누마루가 이어졌다.
계단 주변에는 일본식 장식도 보였다. 계단 끝에 여전히 위용이 남아 있는 사랑채 누마루가 이어졌다.
동네에서 ‘엉컹크길’로 불리던 옥인동 필운대로 9길. 인왕산이 바로 뒤에 드리워져 있다. ⓒ이선미
윤씨가옥의 사랑채는 궁이 내려다보일 만큼 높은 곳에 자리했다. ⓒ이선미
오랫동안 방치돼 있어서 외관도 흉물스러웠다. 건축가 김찬중은 “무서웠어요. 보통 낡은 한옥이라고 할 때의 선입견을 초월할 만큼 많은 켜가 쌓여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막막하고 기괴한 상황이었죠.”라고 말했다.
해방 후 그 공간에서 집 없는 많은 사람들이 칸을 나눠 살았다. 나라를 판 대가로 호의호식하던 권력자의 소실의 집이 방 한 칸 없는 이들이 등을 기댈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는 역설이 이 집에서 생각해 볼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 것 같기도 했다.
해방 후 그 공간에서 집 없는 많은 사람들이 칸을 나눠 살았다. 나라를 판 대가로 호의호식하던 권력자의 소실의 집이 방 한 칸 없는 이들이 등을 기댈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는 역설이 이 집에서 생각해 볼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 것 같기도 했다.
해방 후 많은 사람이 깃들어 살았던 옥인동 윤씨가옥 ⓒ이선미
오랫동안 방치되고 있었던 윤씨가옥 내부 ⓒ서울한옥
다시 계단을 내려가 벽수산장의 자취를 찾아보았다. 병원이나 미군 숙소,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본부로 쓰일 때는 제법 시끌벅적했을 길이지만 지금은 주택들이 들어선 고즈넉한 골목이었다.
윤씨가옥에서 조금 내려간 한 아파트 쪽문 안쪽에서 벽수산장의 흔적을 보았다. 수성동 계곡(옥류동천)이 벽수산장을 감싸고 흘렀는데 정문에서 산장으로 들어가던 다리 오홍교의 난간석 일부였다.
윤씨가옥에서 조금 내려간 한 아파트 쪽문 안쪽에서 벽수산장의 흔적을 보았다. 수성동 계곡(옥류동천)이 벽수산장을 감싸고 흘렀는데 정문에서 산장으로 들어가던 다리 오홍교의 난간석 일부였다.
벽수산장으로 들어가는 계곡에 놓였던 다리 난간석 일부 ⓒ이선미
벽수산장 입구가 있었던 골목에는 정문의 기둥도 남아 있었다. 그 안쪽으로는 역시 벽수산장의 자취인 붉은 벽돌로 쌓은 아치의 한쪽 너머로 인왕산이 보였다.
대한제국 황후의 친족이면서도 친일을 하고 그 대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윤덕영의 벽수산장은 사라졌다. 남아 있는 윤씨가옥은 이제 현재에 맞는 쓰임새로 다시 태어난다. 그 과정을 전해 줄 ‘다시 여는 윤씨가옥’은 내년 2월까지 세 편을 더 공개한다. 복원된 딜쿠샤에서는 고마운 마음으로 감동을 느꼈는데, 다시 열릴 윤씨가옥에서는 어떤 감정이 찾아올까.
‘친일’ 행적은 여전히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현재진행형이다. 친일의 자취가 배인 ‘다크 헤리티지’ 윤씨가옥이 과연 어떻게 변신할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 좋겠다.
대한제국 황후의 친족이면서도 친일을 하고 그 대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윤덕영의 벽수산장은 사라졌다. 남아 있는 윤씨가옥은 이제 현재에 맞는 쓰임새로 다시 태어난다. 그 과정을 전해 줄 ‘다시 여는 윤씨가옥’은 내년 2월까지 세 편을 더 공개한다. 복원된 딜쿠샤에서는 고마운 마음으로 감동을 느꼈는데, 다시 열릴 윤씨가옥에서는 어떤 감정이 찾아올까.
‘친일’ 행적은 여전히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현재진행형이다. 친일의 자취가 배인 ‘다크 헤리티지’ 윤씨가옥이 과연 어떻게 변신할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 좋겠다.
벽수산장 입구 기둥. 안쪽에는 붉은 벽돌로 쌓은 아치가 부서진 채 남아 있다. ⓒ이선미
'다시 여는 윤씨가옥' 볼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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