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도파, 새로나, 화신…지금은 사라진 서울의 백화점들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12.13. 15:50

수정일 2024.02.2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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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 이야기 타이틀 이미지
미쓰코시 백화점
미쓰코시 백화점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60) 백화점의 탄생

12월이 되면 연말과 연시임을 알리는 찬란한 조명들이 눈에 들어온다. 도심의 밤을 밝히는 조명을 선도하는 대표적인 공간이 백화점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한동안 이러한 분위기가 자제되었지만, 올해만큼은 크리스마스트리를 비롯한 화려한 조명들이 다시 시민들의 발걸음을 사로잡고 있다. 100여 년 전 근대의 상징으로 도심에 우뚝한 모습으로 서서 오늘날까지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를 잡은 백화점. 근대화와 풍요, 소비의 중심 공간으로 탄생했던 백화점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서울에 등장한 백화점들

백화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일본의 미쓰코시(三越)가 1906년 서울에 지점을 설립하면서부터다. 미쓰코시 지점은 지금의 백화점 형태는 아니었고, 오복점(吳服店:포목점)에서 출발하였다. 위치는 충무로 1가, 현재의 사보이호텔 건너편에 있었다.

미쓰코시가 백화점 형태를 띠게 된 것은 1929년에 경성부 청사가 있던 진고개 입구(현재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신축 건물을 완공하면서였다. 1926년 경성부 청사는 현재의 서울시청 자리로 이전하였고, 원래 경성부 청사 자리에 미쓰코시 백화점이 지하 1층, 지상 4층의 근대식 건물로 탄생한 것이었다.

미쓰코시 백화점영업이나 관리 형태가 체계화된 최초의 백화점 형태였으며, 직원이 일본인과 조선인 고객에 따라 자국의 언어로 인사를 하게 하는 등 서비스에도 만전을 기하였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두꺼운 유리로 된 쇼윈도였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미쓰코시 백화점의 지하층에는 일반 잡화, 식료품, 식당 등, 1층에는 양주와 담배, 핸드백, 화장품, 여행안내소 등, 2층에는 서양 옷감, 조선 옷감, 일본 옷감, 기모노 등 주로 의류를 취급하였다. 3층에는 완구, 운동기구, 도서와 잡지, 구두, 신사 양복, 숙녀 양장 등, 4층에는 무대 홀, 전기 가스 기구, 축음기, 피아노, 귀금속, 시계 등, 옥상에는 차실, 갤러리, 옥상 정원, 분수, 온실, 휴게실 등이 있었다.
미쓰코시는 1945년 8.15 광복 후엔 귀속재산이 되어 동화백화점으로 운영되었다.
미쓰코시는 1945년 8.15 광복 후엔 귀속재산이 되어 동화백화점으로 운영되었다.

1936년 잡지 <조광> 11월 호에 실린 이상의 단편소설 ‘날개’에는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이 등장한다. 어느 날 정신없이 거리를 쏘다니다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라고 주인공 ‘나’가 말하는 장면이 있다. 식민지 시기 무기력한 ‘나’가 근대의 욕망을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백화점의 매력에 빠졌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쓰코시는 1945년 8.15 광복 후엔 귀속재산이 되어 동화백화점으로 영업을 하다가, 1962년 동방생명을 거쳐 1963년에 동방생명과 함께 삼성그룹에 인수되어 신세계백화점으로 개칭하였다.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출발한 건물 외관은 현재의 신세계 백화점 본점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2024년 1월 31일까지 화려한 크리스마스 미디어파사드(건물 외벽 조명) 행사가 이어진다.
미디어파사드로 화려하게 빛나는 신세계백화점 본점.
미디어파사드로 화려하게 빛나는 신세계백화점 본점.

히라타, 미나카이, 조지야 백화점

미쓰코시 백화점 옆으로 길 건너 진고개 쪽으로는 히라타(平田)와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이 세워졌다.

히라타는 1906년 조선에 진출하여, 1926년 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 본정 입구(현재의 명동)라는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었다. 서울의 백화점 중 가장 적은 자본인 20만 원을 투입하여(화신백화점은 50만 원), 일용 잡화와 식료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염가주의를 표방하였다.

미나카이는 대구에서 오복점으로 출발하여 1911년 경성에 본점을 두었다. 1929년 5층 건물의 신축을 시작하여 1933년 미나카이 백화점의 완성을 보았다. 미나카이는 조선과 중국에 가장 많은 지점을 두어 ‘조선, 대륙의 백화점 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며 모든 지점을 잃고 백화점 영업이 종료되었다. 미쓰코시, 히라타, 조지야가 해방 이후에도 영업을 한 것과는 달리, 바로 한국에서 철수한 것이다. 이후 적산 건물로 분류된 미나카이 백화점 건물은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2번째 청사로 잠시 사용되기도 하였고, 이후에는 군사원호청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지야(丁字屋) 백화점은 1921년 주식회사로 바꾸고 본점을 조선으로 옮겼다. 1925년 기존 건물을 양옥으로 바꾸었으며, 1929년 3층 건물을 새로 세우며 현재의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자리에 백화점을 개업했다. 1939년 지하 1층, 지상 5층의 신관을 신축하였는데, 당시 경성의 백화점 중에서는 가장 큰 면적을 보유하였다.
조지야(丁字屋) 백화점은 해방 후 미도파 백화점으로 불렸다.
조지야(丁字屋) 백화점은 해방 후 미도파 백화점으로 불렸다.

해방 후에는 미도파 백화점으로 불렸으며, 2002년 롯데백화점에 매수되었고, 2013년 롯데쇼핑에 흡수 합병되었다. 현재는 롯데 영플라자로 사용되고 있다. 1979년 12월 소공동에 롯데백화점이 등장하기 전까지 미도파 백화점은 신세계 백화점과 더불어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였다. 미도파 백화점은 1978년 기존의 가고파 백화점을 인수하여, 동대문구 제기동에 청량리점을 개관하기도 하였다.

대학생 시절 제기동 지하철역 근처에 위치한 미도파 백화점을 보고, 시내가 아닌 곳에 미도파 백화점이 있음을 보고 신기해했다. 이외에도 명동에는 1970년에 개점하여 1992년에 폐점한 코스모스 백화점이 있었으며, 남대문 시장에 자리를 잡은 상동(尙洞) 교회 안에는 1977년에 개관한 새로나 백화점이 있었다. 1978년 겨울방학 때 대구에서 올라와 서울 여행에 나섰던 필자는 새로나 백화점 식당가에서 짜장면을 사 먹은 기억이 있다.
남대문 시장 내 상동교회 안에는 1977년 개관한 새로나백화점이 있었다.
남대문 시장 내 상동교회 안에는 1977년 개관한 새로나백화점이 있었다.

소설가 구보씨가 찾았던 화신백화점

1930년대 서울의 5대 백화점 중 유일하게 조선인 자본으로 세운 백화점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이었다. 화신 백화점의 출발은 신태화(申泰和)가 세운 화신상회(和信商會)이다. 신태화는 1918년 금은 상점을 세우고, 광신상회(廣信商會)라 하였다가, 곧 자신의 이름에서 ‘화(和)’ 자를 집어넣고 화신상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1년 박흥식(朴興植, 1903~1994)은 신태화에게서 화신상회를 인수하고, 1932년 동아백화점을 인수 합병하여 화신백화점을 탄생시켰다. 두 백화점을 육교로 연결하였으며, 1934년 전국의 연쇄점을 모집하여 1천 개의 가맹점을 열었다. 1935년 1월 27일 화신백화점에 화재로 인해 건물이 전소되었으나, 화신백화점은 박길룡과 이천승의 설계로 1937년 11월에 지하 1층, 지상 6층의 현대식 백화점 건물로 재건되었다. 1936년 12월에는 6층 콘크리트 건물로 재개관하였다.

화재 이후 재건된 건물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내부에 엘리베이터 4대와 에스컬레이터 2대가 설치되고 옥상에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이 설치되었다. 서울의 시민들에게 근대 문명의 시대를 체험하게 한 것이다. 실제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기 위해 백화점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필자는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74년 대구백화점을 처음 찾았다. 그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바로 에스컬레이터였다. 자동으로 계단을 오르는 그 신기한 물건을 접하고 몇 번이나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백화점 안내원의 진한 눈총을 받은 기억이 있다. 1970년대에도 정말 신문명이었는데, 1930년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처음 본 서울 시민들은 그야말로 놀라움과 신기함에 빠졌을 것 같다.
종로 네거리 화신백화점 주변의 거리 풍경
종로 네거리 화신백화점 주변의 거리 풍경

1934년에 박태원이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소설 ‘소설가 구보(仇甫)씨의 일일’에서는 구보씨가 화신백화점을 방문한 내용이 보인다.
전차선로를 두 번 횡단하여 화신상회 앞으로 간다.
그리고 저도 모를 사이에 그의 발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기조차 하였다.
젊은 내외가 너덧 살이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승강기가 내려와 서고 문이 열려지고 닫히고,
그리고 그 내외는 구보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소설 ‘소설가 구보(仇甫)씨의 일일’

화신백화점이라는 말보다는 화신상회가 익숙했던 시대상, 승강기가 오르내리는 백화점 식당에서 오찬을 하는 가족은 근대의 풍요와 소비를 상징하고 있음을 구보는 보여주고 있다.

화신백화점은 박흥식의 탁월한 경영 수완과 조선인 백화점이라는 점이라는 민족주의 마케팅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전쟁에 일어나고, 박흥식은 전시 체제에서 일제의 정책에 적극 협조하는 친일파 기업인이 되었다. 해방 이후 박흥식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체포되었다. 6.25 전쟁 발발 후에 화신백화점은 인민군 치하에서 국영백화점으로 운영되기도 했고, 1956년 전체 수리를 마친 뒤 재개점하였다. 이후 무리한 사업 확장과 경영 악화, 신세계 백화점과 롯데 백화점, 미도파 백화점 등에 밀려 1987년 2월 폐점하였다.

화신백화점 자리에는 1999년 종로타워(밀레니엄타워)가 들어섰다. 연말연시를 맞아 백화점의 화려한 조명 앞에서 사진도 찍고, 100년의 시간 동안 변화해 온 백화점의 역사와 문화를 떠올려 보았으면 한다.

※ 미쓰코시 백화점 등 서울의 백화점 탄생에 관한 주요한 내용은, 최지혜, 『경성 백화점 박물지』(2023, 혜화)를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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