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원래 3.3운동? 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11.15. 14:50

수정일 2023.11.15. 14:50

조회 2,710

사심 가득한 역사 이야기 이미지 타이틀
탑골공원 팔각정
탑골공원 팔각정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58) 3.1운동을 기억하는 공간들

힘이 있는 강대국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를 중심으로 식민지 개척에 혈안이 되었던 제국주의 시대. 이들 강대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한 움직임들이 여러 나라에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면서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나라가 바로 일제 강점 시기 조선이었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었고, 서울에는 그날을 기억하는 역사적 공간들이 많이 남아 있다.

3.1 운동의 전개 과정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배경으로는 1914년에 시작되어 1918년에 종결된 1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대두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의 영향, 1918년 시작된 파리강화회의에 1919년 1월 김규식(金奎植) 등을 파견하여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것, 1919년 2월 8일 동경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국내외적 배경 이외에 3·1운동이 본격적으로 촉발하게 된 계기로는 고종(高宗:1852~1919, 재위 1863~1919) 황제의 승하를 지적할 수가 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했다. 윤치호의 일기에 ‘황제의 혀와 치아가 다 타 없어지고 온몸이 퉁퉁 부어오른 주검으로 발견이 되었다.’는 기록에서도 보듯 일제의 의한 독살 의혹이 강하게 제기된 죽음이었다.

고종의 장례식은 3월 3일이었지만, 이날은 일제 또한 조선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독립운동 지휘부는 이러한 허점을 찔러 황제 장례식의 습의(習儀:예행 연습) 날인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포하는 의식을 준비한 것이었다.

독립선언서 준비에는 그동안 국내에서 비교적 온건하게 교육, 외교, 문화 운동을 주도했던 종교 단체 대표들이 중심에 나섰다. 손병희, 최린 등의 천도계, 이승훈 등 기독교 대표, 한용운 등 불교계 인사들이 민족대표 33인 이름의 독립선언서를 전국에 배포하였다. 선언서는 천도교계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에서 2월 27일 오후 5시부터 밤 11시 사이에 2만 1천매가 인쇄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독립선언문을 인쇄했던 보성사 터의 기념탑
독립선언문을 인쇄했던 보성사 터의 기념탑

보성사는 1910년 설립된 천도교계 인쇄소로, 기존에 있던 창신사와 보성학원 소속 보성사 인쇄소를 합병하여 만든 곳이었다. 현재 조계사가 위치에 있는 수송동 보성학교 구내에 있었다.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 인근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성사의 흔적을 보여주는 표지석은 원래의 위치에서 조금 벗어난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수송공원에는 ‘옥파(沃波) 이종일 선생상’이라는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종일(李鍾一:1858~1925)은 3.1운동의 선언을 알리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의 사장이었다.
탑골공원을 들어서면 '3·1운동기념탑'과 '3·1운동기념비'를 만나게 된다.
탑골공원을 들어서면 '3·1운동기념탑'과 '3·1운동기념비'를 만나게 된다.

운명의 1919년 3월 1일 선언서를 낭독할 장소가 바뀌었다. 원래 예정된 탑골공원에서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33인 중 23명이 회합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탑골공원에서 거사를 할 경우 자칫 폭력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의견이 되어, 민족대표들은 요릿집인 태화관(太和館)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결국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고, 선언서 낭독 후에는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스스로 체포되는 길을 택하였다. 정인보 선생이 작사한 ‘삼일절 노래’의 가사가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로 시작이 되어 3.1운동의 시작을 12시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는 오후 2시에 선언서 낭독이 있었던 것이다.
한 손에 독립선언문을 든 모습의 손병희 선생 동상이 힘 있어 보인다
한 손에 독립선언문을 든 모습의 손병희 선생 동상이 힘 있어 보인다

태화관이 원래 위치한 곳에는 현재 ‘태화빌딩’이 들어서 그 이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태화빌딩 앞에는 ‘순화궁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순화궁(順和宮)은 헌종(憲宗:1827~1849, 재위 1834~1849)의 후궁인 경빈(慶嬪) 김씨(1832~1907)로, 순화궁이라는 궁호를 받았다. 헌종 사후 경빈은 1907년 76세로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경빈 사후 순화궁은 1908년 궁내부 대신이던 이윤용에게 넘어갔다가, 이완용이 이곳을 소유했다. 이후 이곳에 조선 요리 전문점 명월관(明月館)의 사장 안순환(安淳煥:1872~1942)이 세를 얻어 명월관 분점 태화관(太和館)을 세웠다. 안순환은 대한제국의 궁중잔치 음식을 도맡았던 전선사(典膳司)의 책임자 출신이었다. 태화관은 1921년에 감리교 선교부가 매입하여 ‘태화여자관’이라는 이름의 감리교 포교지 및 여성복지 사회재단이 되었다. 태화관 건물은 해방 후에는 경찰서 청사 등으로 사용되다가, ‘태화기독교사회관’이 들어섰다. ‘태화기독교사회관’은 1980년 도시개발계획으로 헐렸고, 현재 이곳에는 ‘태화빌딩’이 들어서면서 ‘태화’라는 이름은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태화빌딩 옆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태화빌딩 옆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현재 인사동에 있는 탑골공원은 세조 때 이곳에 원각사(圓覺寺)와 10층 석탑을 세운 것에서 유래한다. 원각사 절은 사라졌지만, 국보 2호로 지정된 10층 석탑은 지금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선시대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였으며, 탑이 희게 보인다고 하여 ‘백탑’으로도 불렀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북학파 학자 박지원은 이곳을 중심으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의 제자들을 양성하여 이들은 ‘백탑파(白塔派)’로 지칭되었다.

한편 3월 1일 2시에 탑골공원에 모여있던 학생들과 시민들은 선언서를 낭독한 후 시가행진을 하면서 시위를 주도해 나갔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고종에 대한 묵념으로 애도를 표한 후 시위를 이어갔다. 3·1운동은 서울을 중심으로 대도시는 물론이고, 읍면 단위 농촌 지역까지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대략 전국 218개의 시군에서 200만 명 이상이 참여했으며, 지식인, 청년, 학생, 종교인을 비롯하여 여성, 농민, 노동자, 상공인 등 전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처음에는 비폭력과 무저항을 표방했지만, 점차 헌병 주재소와 면사무소 습격 등 폭력적인 양상도 이루어졌다. 저항이 거셀수록 일제의 탄압도 강경하고 악랄해졌다. 일제는 헌병, 경찰, 군대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한 살육과 투옥, 고문을 감행했다.

중앙고등학교와 한용운 유적지

현재 서울 북촌의 가장 위쪽에 자리를 잡아 창덕궁과도 접해 있는 중앙고등학교 구내에는 ‘3.1운동 책원지’라는 표지석이 있다. 1919년 1월 일본 동경 유학생이었던 송계백(宋繼白:1896~1920)은 중앙고를 찾아와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에게 당시 동경 유학생들이 준비하고 있던 2.8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전달했고, 이에 자극을 받아 중앙고등학교 숙질실에서 3.1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역사적 공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973년 동아일보사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3.1운동 책원비’를 세웠고, 숙직실을 복원하여 ‘삼일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앙고등학교에서 조금 내려오면, ‘3.1운동 유적지: 유심서 터’라는 표지석을 발견할 수가 있다. 유심사(唯心社)는 만해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 세운 출판사로, 잡지 ‘유심’을 간행하여 전통문화의 계승과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한용운은 3.1운동의 민족대표 상당수가 친일파가 된 상황에서도 최후까지 일제에 저항하였다.
<님의 침묵>의 시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심우장'
<님의 침묵>의 시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심우장'
'심우장'으로 올라가는 골목 입구에 조성된 공간. 만해 한용운의 동상과 시비가 놓여 있다.
'심우장'으로 올라가는 골목 입구에 조성된 공간. 만해 한용운의 동상과 시비가 놓여 있다.

한용운의 이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유적지가 성북동에 위치한 심우장(尋牛莊)이다. ‘심우’는 ‘소를 찾는다.’는 뜻으로, ‘수행자가 수행을 하여 깨들음을 얻는 것이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과 같다.’는 것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에서 유래하였다. 심우장 건물은 북향을 하고 있는데, 조선총독부 건물을 보기 싫어한 선생이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1933년부터 1944년 사망하기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한양도성과 만난다. 마루와 방 두 칸,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큰 방에는 선생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서울 도심 곳곳에 숨어 있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3.1운동 관련 역사의 현장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 현장들을 찾아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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