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촌동 100년 된 빨간 벽돌집 '딜쿠샤'에 얽힌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11.29. 16:41

수정일 2024.02.20. 15:19

조회 2,996

사직터널 인근의 행촌동에는 ‘딜쿠샤’라고 불리는 붉은 벽돌의 건물이 있다.
사직터널 인근의 행촌동에는 ‘딜쿠샤’라고 불리는 붉은 벽돌의 건물이 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59) 테일러 부부와 딜쿠샤

사직터널 인근의 행촌동에는 붉은 벽돌의 외관과 은행나무로 유명한 2층의 서양식 가옥이 있다. 한동안 폐가로 방치되었던 이 집은 2000년대 중반 ‘딜쿠샤(DILKUSHA) 1923’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돌이 발견되면서, 미국인 사업가이자, UP와 AP 통신원으로 활약하며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와 영국인 부인 메리 테일러의 집이었음이 밝혀졌다.
앨버트 W. 테일러(좌)와 메리 L. 테일러(우)
앨버트 W. 테일러(좌)와 메리 L. 테일러(우)

3.1 운동 하루 전에 아들을 낳다

영국인 메리 테일러는 연극배우로 동양 각지에서 순회공연을 하던 중 일본에서 앨버트 테일러를 만나,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17년 한국으로 온 부부는, 1923년 인왕산 자락에 벽돌집을 지었다.

이곳은 원래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 장군의 집터로, 장군이 손수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은행나무가 있다. 권율 장군의 뒤를 이어 사위인 이항복이 이 집을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율이 이항복에게 물려준 집터로는 현재 배화여고 교내에 자리를 잡은 필운대(弼雲臺)도 있다. 현재에도 이곳을 행촌동(杏村洞)이라 하는데, 행촌동 지명의 유래는 이 은행나무에서 유래하고 있다.
딜쿠샤 1923 시편 127편 1절 (DILKUSHA 1923 PSALM CXXVII. I)이라고 새겨져 있는 딜쿠샤 정초석.
딜쿠샤 1923 시편 127편 1절 (DILKUSHA 1923 PSALM CXXVII. I)이라고 새겨져 있는 딜쿠샤 정초석.

집이 완성되자, 부부는 ‘DILKUSHA 1923’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딜쿠샤’란 힌두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이란 뜻으로, 인도에서의 결혼식 기억을 새겨 넣었다. 부부는 이 저택에서 1923년부터,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된 1942년까지 살았다. 메리 테일러는 ‘호박목걸이’라는 자서전을 완성했는데, 호박으로 만든 목걸이는 메리가 결혼 선물로 남편에게 받은 것으로, 늘 그녀가 몸에 지니고 다니던 것이었다. ‘호박목걸이’에는 이들 부부와 한국과의 깊은 인연이 생생히 나타나 있다.

1919년 3·1 운동 하루 전날인 2월 28일 메리 테일러는 큰 진통 끝에 세브란스병원에서 아기(브루스 테일러)를 출산하였다. 세브란스 병원은 현재의 신촌 자리가 아닌 남대문 밖 복숭아 골, 현재의 서울역 맞은편 연세재단 세브란스 빌딩이 위치한 곳이다. 이곳에서 부부는 3·1 운동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할 수가 있었다.
메리와 아들 브루스 T. 테일러
메리와 아들 브루스 T. 테일러
입원한 다음 날 아침, 나는 창밖을 보았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나와 있었다.
인파가 몰린 것은 황제의 죽음 때문이리라.
‘호박목걸이’ 중에서 

‘호박 목걸이’에는 “입원한 다음 날 아침,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국방색 군복을 입은 일본 군인들이 병원 정문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거리에는 흰옷을 입은 한국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나와 있었다. 소달구지를 타고 나온 사람도 있었고, 조랑말을 탄 사람들도 있었다. 역 쪽에서도 수많은 인파가 몰려오는 것으로 봐서는 기차를 타고 도착한 사람들도 많은 듯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몇 주에 걸쳐서 수백 킬로 미터나 되는 거리를 두 발로 걸어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하여 3·1 운동에 많은 인파가 몰려든 현장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이어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은 황제의 죽음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고 하여, 3·1 운동의 주요 원인이 고종의 승하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앨버트 테일러는 고종 황제의 장례식 기사를 쓸 특별 통신원에 지원하여 기자 자격을 얻었다. 마침 부인이 입원해 있는 세브란스 병원의 이불에 한국인이 독립선언서를 숨긴 것을 발견했고, 테일러는 구두 뒤축에 감춘 기사를 동생에게 보냈고, 동생은 도쿄에서 미국으로 이 사실을 타전했다. ‘호박목걸이’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침대 속에 감춰져 있던 종이 뭉치들이 드러났다.
브루스는 빛이 들어오는 창가로 달려갔다.
‘대한독립선언문’이라며 놀라서 소리쳤다.
‘호박목걸이’ 중에서 

“그러는 와중에 아직도 내 침대 속에 감추어져 있던 종이 뭉치들이 드러났다. 브루스(앨버트 테일러는 브루스라는 애칭으로 불림)는 급히 아기를 내려 놓고, 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빛이 들어오는 창가로 달려갔다. ‘대한독립선언문’이라며 브루스는 놀라서 소리쳤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서운한 마음에 그날의 일을 힘주어 말한다. 당시 갓 신문기자가 된 브루스는 아들을 처음 만난 것보다 그 문서를 발견한 것에 더 흥분했다고 말이다. 그날 밤 시동생이 독립선언서 사본과 그에 관해 브루스가 쓴 기사를 구두 뒤축에 감춘 채 서울을 떠나 도쿄로 갔다. 금지령이 떨어지기 전에 그것을 전신으로 미국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2월 28일의 아기 출산, 세브란스 병원에서의 독립선언서 발견과 해외 타전 등 테일러 부부는 3.1 운동과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딜쿠샤의 옛 모습
딜쿠샤의 옛 모습

아들과 손녀까지 이어진 딜쿠샤와의 인연

3·1 운동의 열기는 서울의 전 지역은 물론이고 지방의 도시들까지 들불처럼 번져 갔다. 앨버트 테일러는 전국의 독립운동의 현장 취재를 위해 발 벗고 나섰음이 나타난다. ‘호박 목걸이’에 기록된 “남편은 수원과 전주 두 도시를 다녀왔노라고 말했다. 학살행위가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확인하고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3.1운동은 일제강점 시기부터 시작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차원 높게 승화시킨 사건으로서, 4월 11일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앨버트 테일러와 같은 외국인의 생생한 보도 또한 국제적으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는데 한 몫을 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테일러 일가족은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고, 이듬해 5월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추방되어 캘리포니아 지역에 살았다. 광복 직후인 1945년 미군정청의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하기도 하였던 앨버트는 1948년에 사망하였다. 

메리 테일러는 “죽거든 자기 재를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부탁한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미군함을 타고 한국으로 들어와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앨버트를 묻었다. ‘호박목걸이’에서 메리 테일러는 “양화진 묘지에서 장례식을 치를 준비를 모두 끝냈다. ... 그 동안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옛 친구들이 모두 참석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메리 테일러는 1982년 미국 캘리포니아 멘도시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테일러 부부의 한국과의 깊은 인연은 그 아들 브루스 테일러에게로 이어졌다. 3.1운동 전날 한국에서 태어나, 딜쿠샤에서 유년기를 보낸 브루스는 1925년 캘리포니아로 갔고, 태평양 전쟁에도 참전을 했다. 브루스는 노년의 어머니와 캘리포니아에서 함께 살다가, 1982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 유고를 정리하여 1992년에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이 바로 ‘호박목걸이’이다. 

브루스는 자신이 태어난 한국을 늘 생각했다. 그리고 어릴 적 기억에 있었던 은행나무 옆에 있었던 붉은 벽돌집에 가고 싶어 했다. ‘서양 사람 집’, ‘은행나무 집’이라는 이름 외에도 ‘귀신 나오는 집’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딜쿠샤를 마침내 찾을 수 있게 된 아들 브루스는 2006년 2월 한국 땅을 밟고, ‘딜쿠샤 1923’이라 새겨진 글씨를 확인했다.  
내부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 거주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했다.
내부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 거주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했다.

새롭게 개방한 딜쿠샤

서울시는 부르스 테일러와 그의 가족들에게 명예 시민증을 부여하면서 이들 가족과 이어진 깊은 인연에 감사를 표했다. 2019년 서울 역사박물관에서는 앨버트와 메리 테일러 부부의 삶을 돌아보는 기증유물 특별전시회를,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라는 제목으로 개최하였다. 일시적으로 내부를 개방하였지만, 건물 내 거주민들과의 법적 분쟁이 있어서 내부 공개는 잠정 중단되었다. 

다행히 2021년 3월 1일부터 딜쿠샤는 전시관을 전면 개방하여 지금은 누구나가 찾아볼 수 있다. 기존 내부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거주할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고, 나머지 공간은 테일러 가족의 한국에서의 생활상과 앨버트 테일러의 언론 활동 등을 조명하는 6개의 전시실로 구성했다. 
딜쿠샤 유물 기증자이자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인 제니퍼 L. 테일러
딜쿠샤 유물 기증자이자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인 제니퍼 L. 테일러

브루스 테일러와 손녀 제니퍼 린리 테일러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 딜쿠샤, 테일러 가문의 자료가 전시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들 전시품에는 테일러 부부가 1917년부터 1942년까지 서울에 살면서 경험한 흔적들이 잘 나타나 있어 이 시기 서울의 모습 복원에 매우 유용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1919년 고종 국장 행렬을 찍은 사진, 메리 테일러가 쓴 자서전 초고, 호박목걸이와 귀걸이, 한국에서 수집한 여러 물품, 딜쿠샤를 담은 사진첩 등을 통해 테일러 부부와 그 아들 손녀까지 이어진 한국과의 각별한 인연을 찾아볼 수 있다.

※ 위 내용 중 ‘호박목걸이’ 번역 내용은, 메리 린리 테일러 지음, 송영달 옮김, ‘호박목걸이’(2016, 책과 함께)를 주로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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