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은 어떻게 조선을 팔아먹었나? 역사의 현장을 가다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10.18. 14:06
을사늑약 체결의 현장 재현 모습. 중앙의 이토 히로부미 좌우로 을사오적 등이 앉아 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56) 을사늑약과 경술국치의 현장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대한제국을 둘러싼 일본, 청나라, 러시아의 세력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대한제국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한 일본은 본격적인 한일병합 정책에 나섰고, 1905년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에 이어 1910년 한일강제 병합을 성공시켰다.
을사늑약과 통감부의 설치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중립을 주장하는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1904년 2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하였다. 외무대신 이지용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명의로 맺어진 6개의 조항에는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수용할 수 있을 것”과 같은 내용을 집어넣어, 대한제국이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필요한 군수품과 노동력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유리한 상황을 점해 가자, 일본은 1904년 8월 일본인 고문(顧問)의 정치 참여를 핵심으로 하는 한일협약(1차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러한 작업의 완결은 1905년 11월에 체결된 을사늑약(2차 한일협약)으로, 이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이 가져가게 되었다.
을사늑약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압박하고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을 움직여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현재의 국무총리와 같은 참정대신 한규설은 끝까지 강하게 반대했지만, 학부대신인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등은 조약에 찬성했다.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부른다.
을사늑약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압박하고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을 움직여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현재의 국무총리와 같은 참정대신 한규설은 끝까지 강하게 반대했지만, 학부대신인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등은 조약에 찬성했다.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부른다.
1910년 8월 22일 통감 데라우찌 마사다케와 이완용이 강제병합조약을 조인한 통감관저(統監官邸) 터 표지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야시의 명의로 발표된 을사늑약의 핵심 내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하여 금후 한국과 외국의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와 영사(領事)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관리와 백성, 그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온전하게 할 책임을 지며,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폐하의 아래에 한 명의 통감(統監)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서울에 주재하며, 친히 한국 황제 폐하를 알현할 권리를 가진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온전하게 할 책임을 지며,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폐하의 아래에 한 명의 통감(統監)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서울에 주재하며, 친히 한국 황제 폐하를 알현할 권리를 가진다.
남산 ‘국치길’을 따라 보도블록에서 볼 수 있는 ‘ㄱ’ 자 모양의 동판 로고.
고종 황제를 겁박하여 을사늑약의 발판을 삼은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웠다. 동상 이름은 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男爵林權助君像)
통감부는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후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등 세 통감을 거쳤다.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 개청식을 열었고, 육조거리에 있던 대한제국 외부 청사를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였다. 1년 후인 1907년 2월에는 남산 왜성대(현재의 서울 애니메이션센터 자리)에 2층 목조 건물을 새로 짓고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였는데, 통감부 청사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는 총독부 청사로 1926년까지 사용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은 경운궁 중명전(重明殿)이었다. 중명전은 원래 주한 외국 선교사들의 숙소로 사용된 곳으로 경운궁 안에 있지 않았다. 중명전이 경운궁 영역에 포함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인 1897년 무렵이다. 이때 고종은 기존의 선교사 숙소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서양식 도서관인 수옥헌(漱玉軒)을 짓게 했다.
중명전은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처음에는 수옥헌이라 불렸으며 단아한 분위기가 시선을 끄는 곳이다
수옥헌은 ‘옥을 씻는 집’이라는 뜻이며, 이때 옥은 왕실의 도서를 의미한다. 경복궁에 왕실도서관인 집옥재(集玉齋)를 세운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1901년 수옥헌이 화재로 소실되자 대한제국의 주요 건물 공사를 담당했던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친이 이를 2층의 벽돌 건물로 재건했다.
1904년 경운궁 본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고종은 거처를 이곳으로 옮겼고, 수옥헌을 중명전으로 개칭하였다. 중명은 주역의 리(離) 괘에 나오는 용어로, 위와 아래 군신이 모두 밝아짐을 의미한다. 이름을 바꾼 후 불과 1년 만에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중명전은 비극의 역사 공간이 되었다. 1906년 12월 31일 윤택영(尹澤榮)의 딸을 순종의 황태자비(후의 순정효황후)로 간택하는 의식이 중명전에서 거행되었다.
1904년 경운궁 본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고종은 거처를 이곳으로 옮겼고, 수옥헌을 중명전으로 개칭하였다. 중명은 주역의 리(離) 괘에 나오는 용어로, 위와 아래 군신이 모두 밝아짐을 의미한다. 이름을 바꾼 후 불과 1년 만에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중명전은 비극의 역사 공간이 되었다. 1906년 12월 31일 윤택영(尹澤榮)의 딸을 순종의 황태자비(후의 순정효황후)로 간택하는 의식이 중명전에서 거행되었다.
끝내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평화회의장으로 진입하지 못한 헤이그 특사 3인 이준, 이상설, 이위종. 위는 근현대기념관 전시 일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하여 1907년 4월 고종이 이준 등을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한 곳도 중명전이었다.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1907년 7월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 물러나게 된다. 이후 황태자 순종이 고종의 양위를 받아 7월 19일,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로 즉위했다. 8월 2일에는 연호를 광무(光武) 대신 융희(隆熙)로 고쳤으며, 8월 27일 경운궁의 돈덕전(惇德殿)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중명전은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다시 소실되었다가 재건 후에는 외국인을 위한 사교 클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국유 재산으로 편입되었고, 1963년 박정희는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 1977년 민간에 매각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던 중명전은 2006년부터 문화재청이 관리하게 되었다.
현재는 덕수궁 담장 밖에 위치해 있지만, 2007년 2월 7일 문화재청은 중명전을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 영역에 편입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복원을 하였으며, 현재 중명전은 을사늑약, 헤이그 특사 사건 등 대한제국 시기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활용이 되고 있다.
중명전은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다시 소실되었다가 재건 후에는 외국인을 위한 사교 클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국유 재산으로 편입되었고, 1963년 박정희는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 1977년 민간에 매각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던 중명전은 2006년부터 문화재청이 관리하게 되었다.
현재는 덕수궁 담장 밖에 위치해 있지만, 2007년 2월 7일 문화재청은 중명전을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 영역에 편입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복원을 하였으며, 현재 중명전은 을사늑약, 헤이그 특사 사건 등 대한제국 시기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활용이 되고 있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창덕궁 흥복헌(興福軒)에서 열렸다.
강제병합의 공간, 흥복헌
1907년 7월 고종의 양위를 받는 형식으로 순종(純宗)은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가 되었지만 황제로서의 역할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일제는 한일 강제병합을 더욱 노골화했다. 1909년 7월 12일 사법권을 일본 정부에 이양하는 기유각서(己酉覺書)를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박탈했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창덕궁 흥복헌(興福軒)에서 열렸다. 흥복헌은 창덕궁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의 동쪽에 있는 부속 건물이다. 1917년 창덕궁 내전 일대에 큰 화재가 일어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교태전을 비롯한 경복궁의 내전 건물을 뜯어내 그 목재로 창덕궁의 대조전, 희정당, 흥복헌, 경훈각 등을 재건했는데, 현재의 흥복헌은 경복궁의 내전 건물을 옮긴 것이다.
일제의 압박을 계속 받고 있던 순종은 어전회의에 앞서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일본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상의해서 협정할 것을 지시했다.
이완용과 데라우치 간에 맺어진 협정은 총 8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조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는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등이었다.
8월 29일에는 순종의 이름으로 한일 강제병합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상황이 『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한다. ...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창덕궁 흥복헌(興福軒)에서 열렸다. 흥복헌은 창덕궁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의 동쪽에 있는 부속 건물이다. 1917년 창덕궁 내전 일대에 큰 화재가 일어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교태전을 비롯한 경복궁의 내전 건물을 뜯어내 그 목재로 창덕궁의 대조전, 희정당, 흥복헌, 경훈각 등을 재건했는데, 현재의 흥복헌은 경복궁의 내전 건물을 옮긴 것이다.
일제의 압박을 계속 받고 있던 순종은 어전회의에 앞서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일본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상의해서 협정할 것을 지시했다.
이완용과 데라우치 간에 맺어진 협정은 총 8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조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는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등이었다.
8월 29일에는 순종의 이름으로 한일 강제병합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상황이 『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한다. ...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친일파 윤덕영의 호화주택인 벽수산장의 정문으로 알려진 두 개의 돌기둥이 골목 양쪽에 보인다
당시 순정황후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파악하고 마지막까지 협정 체결을 막기 위해 옥새를 치마폭에 숨겼는데, 큰아버지 윤덕영이 강제로 옥새를 빼앗아 위임장에 도장을 찍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완용을 능가하는 친일파 윤덕영은 한일 강제병합 이후 최고의 부와 권력을 누렸다. 현재의 서촌 지역(옥인동 471번 일대)에는 윤덕영의 별장인 벽수산장(壁樹山莊)이 있었고, 그 규모와 호화로움이 대단하여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리기도 했다. 벽수산장은 윤덕영이 프랑스 귀족의 집 설계도를 보고 지었다고 하는데 짓는 데만 20여 년이 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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