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구한 집!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07.12. 14:42
광혜원을 복원한 건물, ‘고종실록’에는 1885년 3월 12일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50) 근대식 병원 제중원
조선시대에도 의료 기관이 있었다. 오늘날과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신분별로 의료기관이 달랐던 점이다. 먼저 왕실병원으로 궁궐 안에 내의원(內醫院)이 있었다. 전의감(典醫監)은 관리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기관이었고, 백성들의 의료를 담당한 기관은 혜민서(惠民署)였다.
혜민서는 세조 때 제생원(濟生院)을 합속하면서 기구가 확대되었다. 제생원이 원래 설치된 곳은 현재의 종로구 계동 일대로, 계동의 명칭은 제생원에서 유래하였다. ‘제생동(濟生洞)’에서 어감이 비슷한 ‘계생동(桂生洞)’으로 바뀌었다가, ‘계생동’이 ‘기생(妓生)’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다시 ‘생’ 자를 떼고 ‘계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외에 빈민 구제를 위한 기관으로는 활인서(活人署)가 있었다.
혜민서는 세조 때 제생원(濟生院)을 합속하면서 기구가 확대되었다. 제생원이 원래 설치된 곳은 현재의 종로구 계동 일대로, 계동의 명칭은 제생원에서 유래하였다. ‘제생동(濟生洞)’에서 어감이 비슷한 ‘계생동(桂生洞)’으로 바뀌었다가, ‘계생동’이 ‘기생(妓生)’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다시 ‘생’ 자를 떼고 ‘계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외에 빈민 구제를 위한 기관으로는 활인서(活人署)가 있었다.
제생원은 조선시대 서민 의료기관으로, 세조 때 혜민서에 병합되었다.
제중원의 설립
전통적 방식인 의료 기관에서 큰 변화가 생긴 것은 고종 때 서양식 의료 기관인 제중원의 설치였다. 제중원은 1885년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安蓮)이 고종의 명을 받아 세운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다. 처음 명칭은 국립 광혜원(廣惠院)이었다. 그러나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2주일 만에 백지화되고, 3월 12일에 새로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원 당시부터 소급 적용하였다.
‘고종실록’에는 1885년 3월 12일의 기록에 “통리교섭통상 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 事務衙門)에서,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개칭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3월 20일에는 통리교섭통상 사무아문에서 “제중원이 지금 이미 설치되었으니, 원(院) 안의 비용에 대하여 조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혜민서와 활인서에 호조와 선혜청에서 배정한 쌀, 돈, 무명의 조목(條目)을 제중원에 옮겨 배정하여 공용(公用)을 넉넉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고종이 윤허했음을 볼 수 있다.
혜민서와 활인서의 기능이 제중원으로 통합이 된 것이었다. 제중원이 설치된 곳은 현재 서울 종로구 북촌 헌법재판소가 있는 곳으로, 헌법재판소 안에 들어가면, 이곳에 제중원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제중원 이전에 이곳에는 북학파 학자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와 개화파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던 홍영식(洪英植)의 집이 있었다. 홍영식이 갑신정변의 여파로 피살된 후 그의 집을 몰수하여 제중원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한 이후 고종과 조선 정부는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였고, 의료 분야의 근대화 사업도 추진되었다.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통해 서양식 병원을 탐색하였고, 1884년 관보(官報)인 『한성순보』의 사설을 통해 서양의학 교육기관의 설립과 양의(洋醫)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1884년 10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고종의 병원 건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우정국 낙성식에 참여한 수구파의 중심 민영익(閔泳翊)은 개화파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는데, 알렌이 서양 의술로 민영익을 살렸고, 서양 의술에 대한 고종의 신뢰가 서양식 근대 국립병원 설립 추진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종실록’에는 1885년 3월 12일의 기록에 “통리교섭통상 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 事務衙門)에서,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개칭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3월 20일에는 통리교섭통상 사무아문에서 “제중원이 지금 이미 설치되었으니, 원(院) 안의 비용에 대하여 조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혜민서와 활인서에 호조와 선혜청에서 배정한 쌀, 돈, 무명의 조목(條目)을 제중원에 옮겨 배정하여 공용(公用)을 넉넉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고종이 윤허했음을 볼 수 있다.
혜민서와 활인서의 기능이 제중원으로 통합이 된 것이었다. 제중원이 설치된 곳은 현재 서울 종로구 북촌 헌법재판소가 있는 곳으로, 헌법재판소 안에 들어가면, 이곳에 제중원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제중원 이전에 이곳에는 북학파 학자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와 개화파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이었던 홍영식(洪英植)의 집이 있었다. 홍영식이 갑신정변의 여파로 피살된 후 그의 집을 몰수하여 제중원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한 이후 고종과 조선 정부는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였고, 의료 분야의 근대화 사업도 추진되었다.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통해 서양식 병원을 탐색하였고, 1884년 관보(官報)인 『한성순보』의 사설을 통해 서양의학 교육기관의 설립과 양의(洋醫)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1884년 10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고종의 병원 건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우정국 낙성식에 참여한 수구파의 중심 민영익(閔泳翊)은 개화파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는데, 알렌이 서양 의술로 민영익을 살렸고, 서양 의술에 대한 고종의 신뢰가 서양식 근대 국립병원 설립 추진으로 이어진 것이다.
1885.9.13.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던 알렌이 발행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근대 서양식 진단서.
제중원 설립 후 새로운 의료법을 적용하여 효과를 보게 하는 알렌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하루에 최고 260여 명의 환자를 보게 된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 환자의 수가 늘어나서 진료업무가 복잡하게 되자 알렌은 미국 감리교회 선교의 스크랜턴(Scranton,W.B.)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추가로 파견된 선교 의사 헤론(Heron,J.H.)도 함께 진료를 보았다.
1886년에는 다시 미국인 여의(女醫) 엘러스(Elless, A. J.)가 파견되었다. 엘러스는 제중원에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고 왕실 여인들의 진료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중종 시대에 활약한 의녀 장금(長今)과 같이 여의(女醫)의 활동 공간도 넓어진 것이었다.
1886년에는 다시 미국인 여의(女醫) 엘러스(Elless, A. J.)가 파견되었다. 엘러스는 제중원에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고 왕실 여인들의 진료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중종 시대에 활약한 의녀 장금(長今)과 같이 여의(女醫)의 활동 공간도 넓어진 것이었다.
제중원의 변천
제중원은 설립된 직후부터 진료 업무에 활기를 띠었고, 1886년 10월에서 11월경에는 서울 남부 동현(銅峴:구리개) 왕실이 소유한 부지로 제중원을 옮겼다. 구리개는 중구 을지로1가와 2가 사이에 있던 나지막한 고개로, 황토흙으로 된 이 고개는 땅이 몹시 질어서 먼 곳에서 보면 마치 구리가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아 구리 고개 또는 구리개라는 명칭이 생겼다.
현재는 을지로 입구와 2가 사이의 하나은행 본점 자리가 이곳이다. 1887년 가을 알렌이 미국으로 특파된 전권대사 박정양(朴定陽)의 수행원으로 조선을 떠난 후에 제중원의 진료 책임을 맡은 인물은 존 헤론(John W. Heron:1856~1890)이었다.
부인부(婦人部)에서 크게 활약했던 엘러스가 결혼으로 제중원을 떠난 후에, 그 업무를 대신한 인물은 여의 호르톤(Horton, L. S.)이었다. 1890년 헤론이 병으로 사망하자 캐나다에서 다시 파견된 빈턴(Vinton, C. C.)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고, 1893년에 에비슨(Avison, O. R., 魚丕信:1860~1956)이 파견되어 제중원의 진료를 담당했다. 에비슨은 콜레라가 전국에 유행하자, 손을 씻을 것을 권장하는 공고문을 붙이도록 하는 등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에도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현재는 을지로 입구와 2가 사이의 하나은행 본점 자리가 이곳이다. 1887년 가을 알렌이 미국으로 특파된 전권대사 박정양(朴定陽)의 수행원으로 조선을 떠난 후에 제중원의 진료 책임을 맡은 인물은 존 헤론(John W. Heron:1856~1890)이었다.
부인부(婦人部)에서 크게 활약했던 엘러스가 결혼으로 제중원을 떠난 후에, 그 업무를 대신한 인물은 여의 호르톤(Horton, L. S.)이었다. 1890년 헤론이 병으로 사망하자 캐나다에서 다시 파견된 빈턴(Vinton, C. C.)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고, 1893년에 에비슨(Avison, O. R., 魚丕信:1860~1956)이 파견되어 제중원의 진료를 담당했다. 에비슨은 콜레라가 전국에 유행하자, 손을 씻을 것을 권장하는 공고문을 붙이도록 하는 등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에도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는 1890년 헤론의 안장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1886년 3월 29일 제중원 산하에 서양의학을 교육하고 양의(洋醫)를 양성하기 위한 국립 제중원 의학당(醫學堂)이 개교했다. 의학당은 현재의 의과대학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1886년 5월 미국 의사들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알렌에게 당상관(堂上官)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서양이 의료인에게 최고의 예우를 해 준 것이다.
조선 정부는 제중원에 건물과 예산을 제공하고 학생들을 선발했으며, 알렌은 교수들을 섭외하고 교육에 필요한 의학 도구 등을 준비했다. 본과 학생은 12명이었으며 영어, 화학, 해부, 약 조제법 등을 배웠다. 그러나 1890년경 제중원 의학당의 의학 교육은 중단되었으며, 정식 졸업생은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1885년 국립병원으로 개원하여 진료 활동을 시작한 제중원은 1894년 6월 갑오개혁으로 관제 개혁이 추진되면서 그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갑오개혁 때 내무아문 아래 위생국(衛生局)을 설치하여 종두(種痘) 및 의약, 전염병 예방업무 등을 주로 담당하게 하면서 제중원을 폐지하였고, 1894년 7월 18일 그 기능은 내무아문(內務衙門)으로 통합되었다.
조선 정부는 제중원에 건물과 예산을 제공하고 학생들을 선발했으며, 알렌은 교수들을 섭외하고 교육에 필요한 의학 도구 등을 준비했다. 본과 학생은 12명이었으며 영어, 화학, 해부, 약 조제법 등을 배웠다. 그러나 1890년경 제중원 의학당의 의학 교육은 중단되었으며, 정식 졸업생은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1885년 국립병원으로 개원하여 진료 활동을 시작한 제중원은 1894년 6월 갑오개혁으로 관제 개혁이 추진되면서 그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갑오개혁 때 내무아문 아래 위생국(衛生局)을 설치하여 종두(種痘) 및 의약, 전염병 예방업무 등을 주로 담당하게 하면서 제중원을 폐지하였고, 1894년 7월 18일 그 기능은 내무아문(內務衙門)으로 통합되었다.
1885년 시작한 제중원은
1894년 6월 갑오개혁으로 명칭은 사라지고,
기능은 내무아문으로 통합됐다.
1894년 6월 갑오개혁으로 명칭은 사라지고,
기능은 내무아문으로 통합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제중원은 선교사업 기관으로서 의료 업무를 계속하였지만, 병원 운영을 맡은 관리들의 부패로 업무 수행이 쉽지 않았다. 이에 정부에 쇄신을 건의하였고,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권리를 에비슨에게 맡겼다. 이로써 1894년부터 옛 제중원의 경영권이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게 되었다.
이제 선교사들이 자율적으로 병원을 운영할 수 있었지만 대신 정부 지원은 끊겼다. 에비슨은 1899년 ‘제중원 학교’를 설립하여, 제중원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려 했지만, 1904년 제중원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선교사들이 자율적으로 병원을 운영할 수 있었지만 대신 정부 지원은 끊겼다. 에비슨은 1899년 ‘제중원 학교’를 설립하여, 제중원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려 했지만, 1904년 제중원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되었다.
경성역 앞쪽에 있던 세브란스 병원의 모습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Severance, L.H.:1838~1913)가 적극적으로 재정 지원에 나서면서, 1904년에 현대식 병원을 지었고, 건물은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으로 이전되었다. 명칭도 ‘세브란스병원’으로 바꾸었다. 현재의 연세대학교에 부속된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으로, 처음에는 서울역과 남대문 사이에 설립이 되었다.
서울역에서 보이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빌딩은 한때 이곳에 세브란스 병원이 있었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서울역의 좁은 부지에서 포화 상태에 이른 세브란스병원을 신촌으로 확장 이전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하여 1962년 새 병원과 의과대학 건물을 완공해 이전했다.
현재 ‘세브란스 내과’, ‘세브란스 소아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병원 대부분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임은 짐작하는데, ‘함춘 내과’, ‘함춘 산부인과’ 등 함춘이라는 명칭을 쓰는 병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임을 알리는 것이다.
서울역에서 보이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빌딩은 한때 이곳에 세브란스 병원이 있었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서울역의 좁은 부지에서 포화 상태에 이른 세브란스병원을 신촌으로 확장 이전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하여 1962년 새 병원과 의과대학 건물을 완공해 이전했다.
현재 ‘세브란스 내과’, ‘세브란스 소아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병원 대부분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임은 짐작하는데, ‘함춘 내과’, ‘함춘 산부인과’ 등 함춘이라는 명칭을 쓰는 병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임을 알리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간호대제2연구동에 바라본 경모궁지
함춘원(含春苑)은 창경궁 동쪽에 조성한 정원으로, 창경궁을 처음 세운 성종 때 만들어졌다. 조선후기 함춘원 자리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이 들어섰고, 경모궁 자리에는 서울대학교 병원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들이 병원 이름에 ‘함춘’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이러한 역사와 관련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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