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총국, 북촌…3일 천하 '갑신정변'의 현장을 찾아서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06.28. 15:33
급진개화파들은 동료 홍영식이 책임자로 있는 우정총국의 개국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9) 1884년 갑신정변의 현장들
우리 역사 속에서 20, 30대의 젊은 층들이 과감하게 주도한 개혁정치의 대표적인 사례는 무엇일까? 16세기 30대의 개혁가 조광조가 주도한 개혁정치는 중종과 훈구파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핵심 인물 조광조는 1515년(중종 10)부터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나, 1519년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았다. 38세 젊은 개혁가의 최후였다.
1884년에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20, 30대의 젊은 개혁가들이 조광조의 후예가 되었다.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이들은 우정총국에서 열리는 개국 축하 낙성식을 목표로 삼아 거사에 들어갔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시작이었다.
1884년에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20, 30대의 젊은 개혁가들이 조광조의 후예가 되었다.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이들은 우정총국에서 열리는 개국 축하 낙성식을 목표로 삼아 거사에 들어갔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시작이었다.
우정총국 낙성식에서 시작된 정변
현재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조계사 바로 옆에 위치한 우정총국은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 우편 업무를 위해 설치된 기관으로 초대 총판(總辦)은 개화파의 중심 홍영식(洪英植:1855~1884)이었다.
김옥균(金玉均:1851~1894), 박영효(朴泳孝:1861~1939), 서재필(徐載弼:1864~1951) 등 급진개화파들은 동료 홍영식이 책임자로 있는 우정총국의 개국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김옥균(金玉均:1851~1894), 박영효(朴泳孝:1861~1939), 서재필(徐載弼:1864~1951) 등 급진개화파들은 동료 홍영식이 책임자로 있는 우정총국의 개국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우정총국 초대 총판은 홍영식이었다.
1884년 10월 17일의 『고종실록』은 급박하게 전개되었던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날 밤 우정국에서 낙성식(落成式) 연회를 가졌는데 총판 홍영식이 주관하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때 민영익(閔泳翊:18601914)도 우영사(右營使)로서 연회에 참가하였다가 불을 끄려고 먼저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는데, 밖에서 여러 흉도들이 칼을 휘두르자 나아가 맞받아치다가 민영익이 칼을 맞고 대청 위에 돌아와서 쓰러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자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궐내(闕內)로 들어가 곧바로 침전에 이르러 변고에 대하여 급히 아뢰고 속히 거처를 옮겨 변고를 피할 것을 청하였다.”
“이날 밤 우정국에서 낙성식(落成式) 연회를 가졌는데 총판 홍영식이 주관하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때 민영익(閔泳翊:18601914)도 우영사(右營使)로서 연회에 참가하였다가 불을 끄려고 먼저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는데, 밖에서 여러 흉도들이 칼을 휘두르자 나아가 맞받아치다가 민영익이 칼을 맞고 대청 위에 돌아와서 쓰러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자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궐내(闕內)로 들어가 곧바로 침전에 이르러 변고에 대하여 급히 아뢰고 속히 거처를 옮겨 변고를 피할 것을 청하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민영익이 칼을 맞고 쓰러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졌다.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민영익이 칼을 맞고 쓰러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졌다.
고종실록
개화파들은 우정총국의 거사 성공을 확인한 후 바로 고종이 거처한 창덕궁으로 향했다. 사전 계획한 대로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景祐宮)으로 납치해 오기 위해서였다. 경우궁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綏嬪) 박씨를 모신 사당으로, 1824년 처음 세웠다. 경우궁은 고종 때 현재의 청와대 옆에 위치한 육상궁(毓祥宮: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으로 옮겨지면서, 왕을 낳은 후궁 7명의 사당을 모셨다는 의미인 ‘칠궁(七宮)’의 하나로 소재하고 있다.
경우궁은 고종 때 육상궁으로 옮겨지면서 ‘칠궁’의 하나로 소재하고 있다.
개화파가 왕과 왕비의 거처를 경우궁으로 옮긴 목적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소수의 병력으로는 이곳을 방어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고종을 압박하여 그들이 추진하는 혁신 정강들을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경우궁 자리에는 1904년 9월 민영휘(閔泳徽:1852~1935))가 세운 광성의숙(廣成義塾)이 들어섰는데, 광성의숙은 1906년 5월 고종이 하사한 교명 '휘문(徽文)'으로 개교하였다. 1978년 휘문고등학교가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전한 후에는 현대사옥이 이곳에 들어섰다. 계동 현대사옥 건물이 있는 도로변에는 이곳에 경우궁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개화파들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후원을 약속받았고, 실제 일본 공사관에서 150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창덕궁의 서문인 금호문(金虎門)과 경우궁 사이를 경계하면서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청나라 군대 상당수가 조선을 빠져나갔다는 정치적 계산도 고려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병력 파견이 쉽지 않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거사 다음날 개화파는 고종의 왕명을 빙자하여 수구파들을 경우궁으로 오게 했고, 이곳에서 개화파는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조영하, 민영목, 민태호 등 수구파 대신과 고종의 수라를 준비하던 내시 유재현 등을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고종이 죽이지 말라고 하교했지만, 개화파들은 이를 무시하였다. 이날만은 왕보다도 개화파들의 권력이 위에 있었다.
개화파들이 발표한 혁신 정강은 김옥균이 쓴 『갑신일록』에 모두 14개조로 기록되어 있는데, 1868년에 단행된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받은 내용들이 많았다.
경우궁 자리에는 1904년 9월 민영휘(閔泳徽:1852~1935))가 세운 광성의숙(廣成義塾)이 들어섰는데, 광성의숙은 1906년 5월 고종이 하사한 교명 '휘문(徽文)'으로 개교하였다. 1978년 휘문고등학교가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전한 후에는 현대사옥이 이곳에 들어섰다. 계동 현대사옥 건물이 있는 도로변에는 이곳에 경우궁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개화파들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후원을 약속받았고, 실제 일본 공사관에서 150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창덕궁의 서문인 금호문(金虎門)과 경우궁 사이를 경계하면서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청나라 군대 상당수가 조선을 빠져나갔다는 정치적 계산도 고려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병력 파견이 쉽지 않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거사 다음날 개화파는 고종의 왕명을 빙자하여 수구파들을 경우궁으로 오게 했고, 이곳에서 개화파는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조영하, 민영목, 민태호 등 수구파 대신과 고종의 수라를 준비하던 내시 유재현 등을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고종이 죽이지 말라고 하교했지만, 개화파들은 이를 무시하였다. 이날만은 왕보다도 개화파들의 권력이 위에 있었다.
개화파들이 발표한 혁신 정강은 김옥균이 쓴 『갑신일록』에 모두 14개조로 기록되어 있는데, 1868년에 단행된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받은 내용들이 많았다.
정변을 일시적으로나마 성공시켰던 개화파의 위세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경우궁을 벗어나, 창덕궁으로 환궁하면서 급격히 무너지게 된다. 위기를 직감한 명성황후가 끈질기게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요구했고, 마침내 종친 이재원의 집을 거쳐 마침내는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왕과 왕비를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한 것은 개화파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조선에 비중을 둔 청나라 군대가 급히 파견되었고, 창덕궁을 포위하면서 개화파 공격에 나선 것이다. 10월 19일 고종은 북묘(北廟:북관왕묘)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 길로 또 선인문 밖에 있는 청나라 통령(統領) 오조유(吳兆有)의 영방(營房)으로 옮겼다. 밤 7시경에는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경당(演慶堂)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왕과 왕비를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한 것은 개화파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조선에 비중을 둔 청나라 군대가 급히 파견되었고, 창덕궁을 포위하면서 개화파 공격에 나선 것이다. 10월 19일 고종은 북묘(北廟:북관왕묘)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 길로 또 선인문 밖에 있는 청나라 통령(統領) 오조유(吳兆有)의 영방(營房)으로 옮겼다. 밤 7시경에는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경당(演慶堂)으로 피신하였다.
고종이 피신했던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경당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지휘하는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자, 일본은 개화파 지원에서 한발 물러섰다. 홍영식과 박영교 등은 현장에서 피살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핵심 세력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명동의 서울중앙우체국 앞에 홍영식의 동상이 있는 것은 우정총국의 총판으로서의 그의 위상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정변이 성공하기는 했지만 개화파의 권력은 3일 만에 그쳤기에, 갑신정변은 ‘3일 천하’라 지칭하기도 한다.
개화파들의 거점, 북촌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들은 김옥균만 34세로 30대였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은 20대의 혈기왕성한 청년들이었다. 훗날 독립협회의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서재필의 나이는 겨우 21세였다.
개화파들 대부분은 조선후기 집권 세력인 노론(老論) 명문가 자제 출신으로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지칭하는 ‘북촌’에 주로 거주하였다. 김옥균과 홍영식의 집은 현재의 정독도서관 인근으로, 정독도서관 앞에는 이들의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개화파들 대부분은 조선후기 집권 세력인 노론(老論) 명문가 자제 출신으로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지칭하는 ‘북촌’에 주로 거주하였다. 김옥균과 홍영식의 집은 현재의 정독도서관 인근으로, 정독도서관 앞에는 이들의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김옥균 집터는 정독도서관 인근에서 볼 수 있다.
서재필의 집 역시 김옥균 집과 가까이에 있었다. 김옥균의 집에서 5분 정도의 거리, 현재의 인사동에는 박영효의 집이 있었다. 박영효는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혼인하여 왕실의 부마가 된 인물로,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박영효가 거주했던 한옥 자리에는 1983년 경인미술관이 들어섰고, 이곳에 있던 박영효 한옥은 1996년 남산에 한옥마을이 조성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원래 박영효의 집이 있던 공간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생활했기에 개화파들의 결속력은 커질 수 있었고, 여기에 이들의 멘토가 등장한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1807~1876)였다. 박규수는 20대에 정계에 진출하여 효명세자를 보좌하며 북학사상을 조선에 적용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북학사상의 근대적 요소를 개화사상으로 연결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고, 그의 사상은 젊은 개화파들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박규수의 집은 현재 헌법재판소가 자리한 곳으로, 헌법재판소 안에 들어가면 박규수 집터라는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
박지원의 연보에 의하면 60세 되던 1796년 3월 안의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돌아온 박지원은 장차 저술 활동에 전념할 생각으로 계산동(桂山洞:현재의 서울시 종로구 계동)의 과원 하나를 사들여 중국의 건축제도를 모방한 다락 얹은 집을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지었다.
“처남 이재성이 이사 와 살았고 그가 이사 간 뒤로는 아들 종채가 물려받아 평생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박종채의 장남인 박규수도 박지원이 마련한 북촌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고, 이곳에서 개화파들의 멘토로서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원래 박영효의 집이 있던 공간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생활했기에 개화파들의 결속력은 커질 수 있었고, 여기에 이들의 멘토가 등장한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1807~1876)였다. 박규수는 20대에 정계에 진출하여 효명세자를 보좌하며 북학사상을 조선에 적용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북학사상의 근대적 요소를 개화사상으로 연결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고, 그의 사상은 젊은 개화파들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박규수의 집은 현재 헌법재판소가 자리한 곳으로, 헌법재판소 안에 들어가면 박규수 집터라는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
박지원의 연보에 의하면 60세 되던 1796년 3월 안의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돌아온 박지원은 장차 저술 활동에 전념할 생각으로 계산동(桂山洞:현재의 서울시 종로구 계동)의 과원 하나를 사들여 중국의 건축제도를 모방한 다락 얹은 집을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지었다.
“처남 이재성이 이사 와 살았고 그가 이사 간 뒤로는 아들 종채가 물려받아 평생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박종채의 장남인 박규수도 박지원이 마련한 북촌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고, 이곳에서 개화파들의 멘토로서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600년 된 천연기념물 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 안에서는 수령 600년 정도의 백송(白松)이 상징처럼 남아 있는 것도 눈에 띈다.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로 사신으로 갔던 사람들이 묘목을 가져와 심기 시작했는데, 현재 헌법재판소 안에 있는 백송이 가장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박규수의 집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모여들었던 개화파들도 이 백송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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