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빛과 그늘이 서린 '흥선대원군의 별장'을 찾아서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05.10. 14:05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6) 석파정과 아소정
석파정의 주인이 바뀐 까닭은?
인왕산 자락에 풍광이 뛰어나고 계곡이 흐르는 곳에 위치한 삼계동 정사를 탐낸 인물은 흥선대원군이었다. 1863년 아들인 고종을 왕으로 올린 후 섭정을 통해 최고 권력자가 된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의 별장을 차지하고 싶어했다.
삼계동 정사를 차지한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바위 언덕이 많은 것에 감탄하면서, 자신의 호를 ‘바위 언덕’이라는 뜻으로 ‘석파(石坡)’라 하였다. 이후 삼계동 정사는 ‘석파정(石坡亭)’으로 바뀌게 되었다.
흥선대원군 사후 석파정은 고종의 친형이자 흥선대원군의 장자인 흥친왕(興親王) 이재면(李載冕), 흥친왕의 아들 영선군(永宣君) 이준용(李埈鎔), 이준용의 양자가 된 이우(李鍝:의친왕의 차남)에게로 세습되었다. 6.25 전쟁이 끝난 뒤에는 천주교에서 코롬바 고아원으로 사용했으며, 이후에 개인 소유로 넘어갔다. 이후에도 여러 번 경매에 오르는 등 소유자가 자주 바뀌었다.
석파랑 내에 있는 석파정 별당
석파정 별당으로 불리는 이 건물은 석파정 본채 건물과 함께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23호로 지정받았다. 1981년 손재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옥은 타인 소유로 넘어갔으며, 1993년에는 한정식 식당 석파랑으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건물 측면 끝마다 붉은 벽돌로 쌓은 벽을 두었으며 벽 가운데에 창을 두었는데 서쪽 창은 원형, 북쪽 창은 반원형, 동쪽 창은 사각형이다.
권력을 잃은 후에 거처했던 공간, 아소정
흥선대원군은 근대사의 전개와 함께 부침을 거듭한 인물이었다. 1863년 고종의 즉위를 계기로 섭정을 했지만 10년 만인 1873년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의 섭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최익현(崔益鉉)의 상소가 결정적이었다.
많은 수모를 당하며 3년간 유폐 생활을 한 대원군은 난초 그리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이때의 난초 그림 석파란(石波蘭)은 청나라에서도 유명해졌다.
1885년 청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을 조선으로 돌아가게 했다. 청나라에서 벗어나려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흥선대원군은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고, 아소정은 말년을 보낸 대표적인 별장이었다. ‘아소정’은 흥선대원군 시 ‘아소당(我笑堂: 내가 웃는 집)’에서 비롯되었다. 이 시는 장지연이 편한 대동시선에 수록이 되어 있다.
나랏일 물러나 한적한 날 술잔만 기울인다
지난 일들 모두가 꿈이었구나
남은 삶 세속에 맡기자니 부끄럽기만 하다
나는 전생과 이생을 생각하며 웃는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일어나던 날 일제는 아소정에 머물던 고령의 흥선대원군을 경복궁 앞으로 오게 했다. 명성황후 살해를 계획하면서 며느리와 대립했던 흥선대원군 세력이 주도한 일로 꾸미려는 의도였다. 마지막까지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던 흥선대원군은 1898년(고종 35) 2월 2일 79세의 나이로 운현궁 노안당(老安堂)에서 생을 마감했다.
흥선대원군의 무덤 흥원(興園)이 처음 조성된 곳도 말년에 자주 머물렀던 아소정이었다. 아소정은 당시 공덕리 본궁으로 불렸음이 『승정원일기』의 기록에서 확인이 된다. 흥선대원군 묘소는 1906년 파주시 대덕리로 이장하였다가 1966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소정 자리에 흥선대원군의 묘소가 위치하면서 한때 이곳을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 불렀다고 한다. 아소정은 해방 후 국유지가 되었고, 1955년 동도공업 고등학교가 이 자리에 개교하였다. 아소정의 건물 상당수는 동도공업 고등학교 증축 공사 때 헐려서 일부는 서대문구 봉원사로 이전되었고, 지금은 우물의 디딤돌만이 남아 있다. 봉원사의 대방(大房) 건물은 아소정에서 가져온 것이다. 동도공업 고등학교는 2004년 서울디자인고로 교명을 바꾸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흥선대원군 권력의 상징은 ‘석파정’, 그리고 권력에서 물러나 스스로 웃을 수밖에 없었던 집 아소정은 흥선대원군의 빛과 그늘을 보여주는 대표적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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