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광화문 월대 훼손해 만든 '전차 철로' 공개 현장

시민기자 조수연

발행일 2023.03.20. 15:08

수정일 2023.11.08. 16:35

조회 2,754

서울시는 3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발굴조사 현장을 공개했다. 일제강점기 때 광화문 앞 월대(궁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 등을 훼손하고 설치했던 전차 철로의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시는 문화재청과 함께 광화문광장 재조성사업부지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를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광화문 월대 복원 및 삼군부(예조)와 의정부 영역인 주변부 정비를 병행하고 있다.

이번 시민 공개 행사는 사전에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 누리집에서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고고학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참여 신청을 받았으며, 접수 시작 5분 만에 매진되는 등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 [관련 기사] 광화문 앞 전차철로 발굴 현장 공개…8일부터 선착순 접수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고고학 이야기'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시민들 ©조수연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고고학 이야기'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시민들 ©조수연

3월 18일, 광화문 역사광장 내 발굴조사 현장 시민 공개 및 해설 프로그램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고고학 이야기’ 행사에 동행했다. 이날 해설은 서울시립대학교 신희권 교수가 맡았다. 고고학자 신희권 교수는 과거 문화재청 때 광화문 복원 책임 소장으로 재직한 바 있으며, 전공은 한양도성, 백제도성 등으로 국내 도성 권위자 중 한 명이다.

먼저 신희권 교수는 '광화문광장'이라는 이름에 담긴 ‘광장’의 개념을 설명했다. 본래 광장은 서양에서 도입된 개념으로 동양에서는 광장 대신 ‘길’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조선시대 때 광화문광장은 ‘길’이라는 뜻이 담긴 ‘육조거리’로 불렸다. 여기서 육조란 오늘날 행정기관인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를 뜻하며, 행정부 최고 기관인 ‘의정부’와 군을 관리하던 ‘삼군부’가 존재했다.

당시 육조거리는 너비 50m 내외, 길이는 500m 내외로 10:1의 비율을 보였다. 현재 넓은 사람길로 변한 광화문광장에 대해 신희권 교수는 “과거 광장을 두고 양옆에 찻길이 있어 세계 최대의 ‘중앙분리대’라는 오명을 쓴 적이 있다”며 “현재는 과거 육조거리처럼 사람길로 변했다”고 전했다.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고고학 이야기’의 해설을 맡은 서울시립대학교 신희권 교수 ©조수연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고고학 이야기’의 해설을 맡은 서울시립대학교 신희권 교수 ©조수연

이어서 신희권 교수는 조선 건국 후 ‘한양도성’의 형성 과정을 설명했다. 유교가 중심인 조선은 한양도성을 계획할 때도 철저히 유교 이념을 따랐다. 1392년 건국된 조선은 1394년까지 2년 동안 풍수지리에 입각한 ‘명당’을 찾았는데, 명당으로 현재의 광화문 일대를 선점했다. 이후 신하들은 위패를 봉양하는 종묘와 사직을 놓고, 임금의 거처인 궁궐을 지어 왕의 근엄함을 보이고, 궁을 지키기 위해 도성이라고 하는 성곽을 지을 것을 말했고, 태조 이성계는 이에 한양도성을 지었다.

신희권 교수는 유교 사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국가는 중국의 ‘주나라’라며 당시 조선은 주나라 예법인 ‘주례’에 의거해 두 가지 원칙으로 한양도성을 설계했다고 밝혔다. 첫째, 임금의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놓았다. 이를 '좌묘우사(左廟右社)'라고 한다.

둘째, 앞에 관청을 두고 뒤에 시장을 두었다. 따라서 광화문을 기점으로 경복궁 앞에 육조와 삼군부, 의정부, 한성부 등 관청이 있는 셈이다. 다만 궁궐 뒤에 시장을 두지 않았고, 현재 종로 일대에 ‘시전’이라는 시장을 두었다. 그 이유에 대해 신희권 교수는 “한양 설계의 기준인 북악산이 경복궁 뒤에 있다”며 “산에 시장을 놓을 수 없으니 종로 일대에 시전을 형성하게 한 것”이라고 전했다.
조선시대 국가 정사를 총괄하던 의정부 터 ©조수연
조선시대 국가 정사를 총괄하던 의정부 터 ©조수연

이후 월대 정밀발굴조사 현장으로 이동했다. 안전을 위해 모두 안전모를 착용했으며, 발굴 도중 드러난 전차 노선부터 살펴봤다. 이 전차 노선은 일제가 조선 통치 20주년을 기념한 1929년 조선박람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물자와 인력 수송을 원활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1923년 개통한 노선이다. 1929년 조선박람회의 정문으로 광화문을 사용해 지금의 자리에 있던 광화문은 삼청동 방향으로 헐려 나갔다.
시민에게 공개된 일제강점기 때 설치한 전차 노선 ©조수연
시민에게 공개된 일제강점기 때 설치한 전차 노선 ©조수연

전차 노선은 Y자 모양으로 나 있는데, 한쪽은 서쪽 통의동 쪽으로, 또 다른 한쪽은 안국동 쪽으로 향한 노선이다. 광화문에서 전차 노선이 교차하는 셈인데, 일제가 광화문 월대를 헐고 전차 노선을 부설했던 이유는 조선의 심장부를 관통하면서 조선 왕실의 흔적을 뭉개고 일제와 일본인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이 전차 노선은 광복 후에도 사용되다가 1966년, 세종로지하도 건립 공사 때 땅속에 묻히게 된다. 이후 광화문 복원 사업으로 57년 만에 시민에게 공개된 셈이다.

전차 노선이 부설되면서 광화문 앞 돌로 만든 평평한 기단 위에 난간이 양쪽에 놓인 월대가 훼손됐고, 폭 29.7m의 월대 중앙부로 왕이 다니던 폭 7m의 어도는 허리가 잘려 나간 모습이 됐다.

월대는 궁궐의 정전(正殿),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臺)로, 19세기 흥선대원군에 의한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탄생했다.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에는 정문인 광화문 전면에 월대를 배치했고, 월대를 중심으로 서측에 삼군부, 동측에 의정부를 두었다.

이처럼 일제는 문무의 최고 통치 기구를 비롯해 조선 왕실의 모습을 상당수 훼손했다.
월대 중앙부로 왕이 다니던 폭 7m의 어도는 허리가 잘려나간 모습이 됐다. ©조수연
월대 중앙부로 왕이 다니던 폭 7m의 어도는 허리가 잘려나간 모습이 됐다. ©조수연

그 외에 삼군부와 의정부 흔적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삼군부·의정부 외행랑(도로와 접하는 건물면) 흔적과 옛 우물가, 일제강점기에 놓인 상·하수도 배관 등도 볼 수 있었는데, 특히 청소년들에게 역사와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을 알려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뜻깊은 행사였다.
신희권 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현장을 둘러보는 시민들 ©조수연
신희권 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현장을 둘러보는 시민들 ©조수연

‘광화문 월대 및 주변부 고고학 이야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인상 깊었던 점은 단층이다. 마치 화석처럼 서로 다른 색과 모양의 돌을 확인했는데, 밑으로 내려가면서 더 이전에 놓인 주춧돌이 시선을 끌었다.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주춧돌을 통해 조선시대 600년의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단층을 통해 조선시대 600년의 역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조수연
단층을 통해 조선시대 600년의 역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조수연

이처럼 이번 정밀발굴조사는 1392년, 14세기 말 조선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최고 권력 기구와 왕실의 모습, 19세기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탄생한 ‘월대’와 일제강점기 당시 놓인 상·하수도 배관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조금 불편하지만, 자랑스러운 우리의 모습을 후손에게 보여줬으면 좋겠다”라고 한 신희권 교수의 말처럼, 이번 정밀발굴조사로 인해 자랑스러운 한양도성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복원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민기자 조수연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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