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면 생각나는 '일장기 위에 그려진 태극기'를 찾아서...
발행일 2022.03.10. 09:20
진관사 입구 풍경 Ⓒ김정희
2019년,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제1기 서포터스로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에 다녀온 후, 매년 3.1절을 나만의 방식으로 기념하곤 한다. 올해는 일장기 위에 그려진 태극기로 유명한 진관사를 찾았다.
진관사 태극기 안내문 Ⓒ김정희
일장기 위에 그려진 태극기
일장기 위에 그려진 태극기는 2009년 진관사 칠성각 해체 복원 작업 중에 발견되었다. 태극기 한쪽이 찢기고 불탄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3.1 운동 당시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칠성각의 불단과 기둥 사이의 벽면에서 발견되어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짐작하게 한다.
진관사 입구에는 현재 사용하는 태극기와 일장기 위에 그려진 태극기가 함께 펄럭이고 있다. Ⓒ김정희
진관사 칠성각 해체 복원 작업 중 발견된 것은 일장기에 그려진 태극기뿐이 아니다. 독립신문과 호외 등의 독립운동 관련 유물들도 함께 발견되었다. 태극기를 비롯한 유물들은 당시 진관사에서 포교 활동을 하고 있던 스님이 숨겨 두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바로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이다.
진관사 태극기와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 Ⓒ김정희
백초월 스님에 대한 안내문 Ⓒ김정희
백초월 스님을 재조명하다
백초월 스님은 1878년 경남 고성에서 출생해 14세에 입산 출가하였다. 1916년 명진학교 교장을 지낸 스님은 3.1 운동 이후 항일 인쇄물을 발행했던 한국민단부의 부장을 맡기도 했으며, 항일신문 <혁신공보>를 발간하여 상해 임시 정부 및 길림성의 독립군에게 보냈다고 한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진관사 및 천은사, 화엄사 등의 사찰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진관사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사찰을 왕래하며 활발한 포교 활동과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장기 위에 그려진 태극기 Ⓒ김정희
이후 1939년, 철도국 노동자 박수남이 용산역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 열차에 '대한 독립 만세'를 적은 '용산역 낙서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3년 간 투옥되기도 했으며, 출옥 후에도 임정에 군자금을 보내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청주형무소에서 고문 끝에 순국하셨다고 전해진다.
독립운동과 진관사
진관사가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된 것은 일제하에서 불교계의 독립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3.1 운동 이후 사찰에서 모금한 의연금을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군에 제공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진관사는 전국의 사찰과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법회를 통해 모금한 돈으로 독립신문과 호소문 등을 발행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국민들에게 배포하였고, 그 중심에는 백초월 스님이 있었다.
태극기와 함께 발견된 <독립신문> Ⓒ김정희
2009년 진관사 칠성각에서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이 발견된 후, 진관사와 진관동 자치 센터에서는 2010년 '내 고장 해설사' 과정을 개설했다. 당시에는 태극기와 인쇄물들을 모두 진관사에서 보관하고 있었고 과정에 참가했던 필자도 실물을 접하여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 태극기를 비롯한 유물들은 현재는 은평한옥역사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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