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 성곽길 따라 단종비 정순왕후 눈물이 흐르네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1.08.04. 15:22

수정일 2021.08.05. 09:32

조회 2,769

신병주교수
이수광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 처마 뒤 바위에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수광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 처마 뒤 바위에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5) 자지동천과 비우당

한양도성 낙산공원 부근에서 동쪽으로 500미터쯤 가면, 현재의 종로구 창신동의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눈에 띈다. ‘자줏빛 풀이 넘치는 샘물’이란 뜻의, ‘자지동천(紫芝洞泉)’은 흰 옷감을 이곳에 넣으면 자줏빛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단종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후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가 생계를 위해 이곳에서 옷감을 물들이는 일을 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1454년(단종 2) 1월 정순왕후는 왕실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단종의 왕비가 되었다.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의 지위인 남편과 혼인하여 왕비가 된 사례였다. 『단종실록』에는 “근정문에 나아가서 효령대군 이보, 호조판서 조혜를 보내어 송씨를 책봉하여 왕비로 삼았다.”고 한 후, 경복궁 근정문에서 왕비가 책봉을 받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왕비로 살아간 삶은 극히 짧았다. 1455년 윤6월 삼촌 수양대군의 압박을 받은 단종이 왕위를 내놓게 된 것이다. 단종이 상왕이 되면서, 정순왕후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다. 16세의 나이, 조선 역사상 최연소 대비가 된 것이다. 이후의 삶은 단종의 수난과 그 궤적을 같이 한다. 1457년 6월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降封)하고, 단종의 유배를 결정한다. 유배지는 서강을 앞에 두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강원도 영월 청령포였다. 이후에도 경상도 순흥의 금성대군의 역모 사건 등 단종 복위 운동이 이어지자, 1457년 10월 21일 세조는 단종의 처형을 명했다. 

비록 먼 곳으로 유배되긴 했지만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다가 들려온 청천벽력과도 같은 남편의 사망 소식은 정순왕후를 좌절의 삶 속으로 빠지게 했다. 정순왕후는 평민으로 강등이 된 후 동대문 밖에서 거처하며 자지동천을 생계의 터전으로 삼아 외롭고 고달픈 삶을 이어 갔다. 동대문 근처에 여인시장이 형성된 것도 정순왕후와 관련이 깊다. “정순왕후가 정업원(淨業院)에 있을 때 채소의 공급은 동교에 사는 여인들이 시장을 열어 이루어졌다. 여인들의 채소 시장은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경지략』은 기록하고 있다.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정순왕후는 불교에 크게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에서 은퇴한 여인들이 자주 찾은 절인 정업원은 그녀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옛 정업원이 있던 자리에 현재는 청룡사가 들어서 있으며, 이곳에 있는 ‘꽃비가 내리는 누각’이란 의미의 우화루(雨花樓)는 눈물로 얼룩졌을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이별을 기억시켜 주고 있다. 청룡사 앞에는 1771년 영조가 이곳을 방문하고 친필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고 쓴 비석이 남아 있다. 정업원 인근 산봉우리는 정순왕후가 동쪽인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여 동망봉(東望峰)으로 불리는데, 영월 청령포의 망향탑과 묘한 짝을 이룬다. 

정순왕후는 18세 때인 1457년 단종과 사별한 후 숱한 시련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고 64년을 더 살았고, 중종 때인 1521년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정순왕후의 무덤은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鄭眉壽) 집안의 종중(宗中) 산이 있는 현재의 남양주시 진건읍에 대군 부인의 묘로 조성되어 ‘노산군묘’로 불렸다. 숙종 대인 1698년(숙종 24) 노산군이 단종이 되면서, 정순왕후도 왕비의 위상을 회복하였다. ‘사릉(思陵)’이라는 무덤 이름에는 오랜 시간 동안 남편을 늘 생각했다는 뜻을 담았다. 

자지동천 자리 옆에는 세종시대 청백리 재상으로 유명했던 유관(柳寬:1346~1433)의 비우당(庇雨堂)도 있다. 비우당의 '비(庇)'는 ‘덮다’는 뜻으로, 비 맞는 것을 겨우 피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유관이 장마철에 비가 새는 방에서 우산을 받치고 앉아 우산 없는 사람들을 걱정했다고 한 데서 집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서울시 여성역사 문화공간 ‘여담재’ 옆에 이수광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이 복원돼 있다.
서울시 여성역사 문화공간 ‘여담재’ 옆에 이수광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이 복원돼 있다.

훗날 비우당은 유관의 외후손이 되는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거처로 삼게 된다. 이수광의 호 ‘지봉(芝峯)’은 동대문 밖 상산(商山)의 산봉우리 이름을 따온 것으로, 그가 자랐던 비우당은 지봉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이수광은 외가 5대조인 유관과 부친의 청백리 정신을 계승하여 허름한 초가 비우당에 거처하는 것을 긍지로 삼았다고 한다. 비우당은 실학의 선구적 저술 『지봉유설』의 산실이기도 했다. 현재는 도심 속 아파트촌 사이에 위치하여 숨어있는 유적지가 되어버린 자지동천과 비우당에서 정순왕후와 이수광의 모습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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