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을 만든 손

admin

발행일 2009.10.06. 00:00

수정일 2009.10.06. 00:00

조회 4,381

지난 5일밤에서 6일,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세종대왕상의 광화문광장 입성 작전이 벌어졌다. 에어 부직포로 온몸을 감고 270t급 초대형 크레인의 도움을 받아 무진동 특수 자동차에 실려 110km의 거리를 밤새 이동한 세종대왕상은 무사히 제 자리에 도착해 드디어 10월 9일 아침 세상에 그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반면 그날이 오면 한 남자는 찬란한 성군의 영광 뒤에서 서서히 잊혀질지도 모른다. 하이서울뉴스는 그를 담아두고 싶었다. 오직 그분의 모습을 찾고, 아련한 이미지로 눈앞을 떠돌던 얼굴을 표현하기 위해, 장장 5개월이란 시간을 오롯이 바친 김영원(62) 조각가와 제자들, 그리고 공간미술 사람들에게 그 짧고도 긴 시간은 눈물 나는 고통의 순간들이자, 설렘의 나날이었다. 이천시 설천면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마지막 채색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김영원 조각가를 김정상 시민기자가 만났다.

숨가쁜 5개월, 2,000여 명이 동원된 대작업

"주물 작업에 들어가셔서 당장 인터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영원 조각가에게 연락을 시도한 것은 9월 초였다. 직접 통화를 한 것도 아니었고, 연구원을 통해서 정중한 거절의 메시지만 받을 수 있었다. 중요한 작업 중의 하나인 주물공정을 하고 있는 중이라서 어렵다는 설명에 더 이상 떼를 쓸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10월 1일 추석연휴가 시작된 후에야 공간미술 작업실에서 김영원 조각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는 이미 모든 작업이 끝났어야 했지만, 채색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이유로 색을 벗기고 재작업을 하고 있었다.

"노란 기운이 너무 많아. 저 상태로는 힘들어." 그는 나지막히 되뇌고 있었다. 작업의 막바지라 여유로운 미소를 기대했지만, 그에게서는 마지막이라는 단어 자체가 무의미한 듯 보였다. 예술가로서의 열정, 그것은 영원히 도달하지 못하는 어딘가를 향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번 추석은 반납해야겠다"라고 선언했을 때 함께 일하던 공간미술 사람들의 얼굴에서 잠시 안타까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모두들 아무 말 없이 다시 재작업 준비에 들어갔다. 칠을 벗겨내느라 신나 냄새가 작업실 곳곳에서 풍겨왔고, 김영원 조각가는 마스크도 없이 이곳저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까맣게 그을린 그들의 얼굴에는 이내 땀방울이 하나 둘 맺히고 있었다.

"지금까지를 돌이켜 보면 어떻게 시간이 흘렀나 합니다. 정말 쉴 새 없이 시간이 흘렀죠. 당선작 발표가 4월이었고, 5월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으니, 달로 치면 4달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광화문광장을 상징할 조형물은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인 세종대왕이었고, 공모전을 통해서 당선작을 골랐다. 당선작을 발표한 날이 4월 16일이었고, 10월 9일 제막식까지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은 5개월 정도밖에 없었다. 김영원 조각가는 당선 발표 날부터 바로 움직였다. 우선은 세종대왕상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고, 장소가 정해지고 나서는 수평을 잡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어 일사분란하게 기초 작업이 진행됐고, 4월 25일 고사를 지내고, 5월 5일부터 점토를 붙이기 시작했다. "공모전에서 이미 기본적인 틀은 완성한 상태였습니다. 10분의 1 크기의 공모작을 10배로 키우는 것이 중요했죠. 많은 인부들과 조력자들이 지시서를 기본으로 세종대왕상의 기본 형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점토가 붙어 있는 세종대왕상을 깎은 것은 김영원 조각가의 제자들이었다.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거나 혹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현직 작가들이 참여해 용좌와 의복 등의 문양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부조기둥인 열조 등의 기본적인 스케치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김영원 조각가는 그들이 조각한 부분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넘치는 부분을 깎는 일을 했다.

"세종대왕상에는 용좌에만 62마리의 용이 표현되었고, 구름문양만도 1만개 이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곤룡포에만도 30마리 이상의 용이 표현되어 있죠. 이런 일을 혼자 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제자들과 지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죠."

김영원 조각가는 세종대왕상은 자신의 이름이 가장 앞에 있을 뿐,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든 작품이라고 강조한다. 그들의 마음과 정성이 하나하나 모여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세종대왕상이 얼마나 대작인지는 그 상에 표현된 조각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모두 100여 마리의 용들이 마치 하나하나 살아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분의 손과 얼굴을 어찌할까, 잠못 이룬 숱한 나날들

"열주라는 기둥이 있는데, 그 기둥에 세종대왕의 업적을 조각했습니다. 기둥에 조각하는 방식은 단순히 평면에 표현하는 것과 달리 다양한 기술적인 표현법이 필요했습니다. 기둥에 업적을 표현한 이유는 사람들이 단순히 서서 보는 것을 떠나서 움직이면서 '운동성'과 '시간성'을 만들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김영원 조각가는 관객들이 큰 기둥을 한 바퀴 돌면서 관람을 하기를 바랬다. 가만히 서서 보는 것과 달리 움직임이 있는 관람은 그 공간 자체가 동적이고, 시간이 흐르는 공간으로 만들어 준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이야기들이 단순히 옛 이야기처럼 박제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그의 의도가 전해졌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얼굴과 손이었습니다. 당시의 의복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고, 다행히 자문위원 중에 조선복식 연구가이신 단국대 박성실 교수가 직접 옷을 지어 주어서 참고할 수 있었습니다. 왕은 여섯 겹의 옷을 걸쳤는데, 그 의복 자체도 지금과 너무 달랐습니다." 세종대왕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생동감 있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던 것은 바로 사실감이었다. 그 때문에 옷의 모양과 주름이 잡히는 모습을 제대로 알기 위해 모델에게 직접 왕의 옷을 입혔고, 손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양한 연출도 했다.

"사실 왕은 손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매가 서 있으면 무릎까지 오곤 했는데, 표현상 손을 드러내자니 여러 가지로 난관이 많았습니다.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어야 했고, 다른 손은 백성을 보듬는 듯한 마음이 담겨 있어야 했죠." 그는 손을 어떻게 표현할지 하루 종일 고민하고도 잠자리에 들어서 고민을 계속 하다 잠을 설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고 말한다.

"얼굴은 제가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표현을 하고자 했습니다. 세종대왕의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애로운 느낌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엉뚱할 수는 없었죠. 그래서 태조와 정종의 어진, 그리고 고종황제의 사진, 그리고 현재 왕실가의 얼굴들을 참조했습니다." 42년간 인물만을 전문적으로 조각한 김영원 조각가도 세종대왕처럼 온 국민이 사랑하는 인물을 표현하는 데는 부담이 따랐다. 관념 속에 떠도는 이미지를 현실화하는 작업이 힘들기도 했지만, 그것이 온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얼굴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영원 교수는 약간은 미남형으로 표현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하늘이 내린 천형, 조각

"사실 수없이 그만 두고 싶었습니다. 힘들었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이렇게 아직까지 조각을 하고 있는 저를 볼 때는 이는 하늘이 내린 천형(天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말의 무게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조각이 그에게 천형이라니. 하늘이 내린 벌이라는 뜻인데, 그건 사물로부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발견해야만 하는 벌이란다.

김영원 조각가는 마산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막내라서 집안에서도 큰 기대가 없었다. 시골의 마을에서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주변의 점토가 전부였고, 그때부터 이것저것을 만들면서 조각이라는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고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홍익대 미대를 소개해 주셨고, 그쪽으로 진학을 한 게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 말고는 잘 하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죠(웃음)."

"정말 배가 고파서 뭐든지 하지 않으면 안됐습니다. 그래서 조각가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김영원 조각가의 삶은 그리 윤택하지 못했다. 윤택하기보다는 말 그대로 굶어죽기 직전까지 갔었다. 인생의 기로에서 중대한 고민을 한 적도 있다. 생계를 위해서 조각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조각을 위해서 생명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궁하면 통하는 법인가. 그는 자신의 모교로 돌아가 후배들을 가르칠 기회가 생겼고 그로 인해 조각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이율배반적으로 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자신의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는 남는 시간은 1분 1초라도 모두 자신의 작품 활동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작품 구상을 위해서 피가 마르는 듯한 고민을 하고,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또 한 번 자신을 깎아내는 고통을 참았다. 일에 몰두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완성하는 순간까지 아무 것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가장 크게 피해를 보았던 것은 그의 주변 사람들이었다. 가까이 가족들이 그랬고, 주변에 그의 친구들이 그랬다. 그리고 이번 작업 중 많은 매체들도 그랬다. 일부 방송사는 거만하다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정해진 시간에 집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사실 제 삶 전체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학교와 작업실만 왔다갔다 하다 보니, 가족들에게는 소홀한 것이 사실입니다. 학교에서 일하고, 작업실에서 작품활동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습니다."

왜 그리도 힘겹게 자신을 깎고 쪼아댔을까? 왜 그리 많은 돌을 짊어졌을까? 김영원 조각가는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학교로 돌아올 당시 자신만 구원받았다는 생각에 생활고로 조각을 영영 포기해버린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넘어서 원죄의식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은 운이 좋아서 조각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분명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생활전선으로 뛰어들면서 조각을 포기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는 그래서 일종의 책임감을 느꼈다.

"현재 국내에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2,000명 정도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죠. 우리나라 미술이 대부분 회화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2005년부터 '계간 조각'이라는 잡지도 자비로 내기 시작했다. 개인이 잡지를 낸다는 것은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엄청난 부담이 될 테지만, 이제 5년 정도 지나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는 잡지를 통하면 조각가들 간의 의견교환도 폭넓게 이뤄지고, 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생겨나리라 믿었다. 임의단체이던 조각가협회를 사단법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사람들의 뜻이 모여 지금처럼 예술가인 조각가가 조경업자의 하청업자로 인식되는 것이 개선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조각을 연구하는 사람, 그리고 조각에 대한 평을 쓰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비빌 언덕이 생겼기 때문이죠. 잡지 발행은 힘들지만, 이미 자리를 잡은 조각가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 제가 감당해야 하는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김영원 조각가는 아내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 국제 비엔날레에 아내와 함께 갔을 때 얼마나 좋아했었는지를 기억한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학교에서 나오고 나면 개인적인 작품 활동에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잠시 아내와 함께 국내의 좋은 명소들을 둘러보고 싶습니다."

세종대왕상이 많은 시민들에게 사랑받기 바래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그 작가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특히 세종대왕상은 저에게 특별하지만, 또한 서울시민, 한국인들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갈 것입니다. 또 그렇기를 바랍니다." 김영원 조각가는 조각이 가지는 매력이 다수가 문화적인 교감을 느낄 수 있는 데 있다고 말한다. 작가를 통해서 그 작품이 나오지만, 그 작품이 사람들에게 공개된 이후에는 사람들 모두가 즐기는 모두의 것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서 만든 작품이지만,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겁니다. 조금은 애정 어린 눈으로 봐주시고, 모두가 세종대왕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영원 조각가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긴장을 푼 듯했다. 그는 한걸음 물러서서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다고 밝혔다. 예술가는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기 마련이라면서 좀 더 시간이 주어지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고 하지만, 세종대왕상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 국민들이 있으니 언제까지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서 시간을 지체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일반 시민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을 줄 수 있으면 무엇보다 좋겠습니다. 세종대왕의 넉넉한 풍채는 많은 사람들을 안아줄 것입니다."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며 잠시 손을 보여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의 손은 작고 부드러워 보였다. "별로 볼 건 없죠. 차라리 좀 더 큰 손이었다면 힘도 많이 쓰고 좋지 않았을까 해요. 저는 발도 작고 여자 같은 골격을 가지고 있어서 늘 불만이었어요."

김영원 조각가는 너무도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 고향에서 열린 예술상을 받았을 때도 고향사람들이 그의 이력을 보고 나서야 이 친구가 우리 고향에서 난 사람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 하고, 작품을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세종대왕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해 준 김영원 조각가와 제자, 공간미술 외 수많은 사람들의 땀이 10월 9일 시민들, 나아가 온 국민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전해줄 수 있길 바란다.

시민기자/김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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