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드라이버, 37년 동안의 고독

admin

발행일 2009.09.22. 00:00

수정일 2009.09.22. 00:00

조회 4,805

서울에 멋진 할머니 택시 운전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김정상 시민기자가 그 주인공을 찾아나섰다. 기자의 인터뷰 요청 전화에 흔쾌히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최인심(65) 할머니를 만났다. 그녀가 살고 있는 홍은동 집은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로,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주인을 닮아 정갈하게 정돈된 자그마한 공간에서 그녀의 택시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17세 꽃다운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 핸들을 잡기까지

"서울에 가서 식모살이라도 하면서 살아!" 최인심 할머니의 아버지는 고향에서도 꽤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 아는 사람들에게 속아 재산을 탕진하고 빚을 지게 됐을 때, 아버지는 고향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어린 딸을 쫓아보내듯 서울로 올려보냈다. 그때 그녀의 나이 17세였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나이였던 것이다.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머물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간신히 어느 부유한 집의 식모살이를 시작하면서 서울에서의 삶이 시작됐다. "아, 내 고향? 굴비로 유명한 전라도 영광이야. 지금은 옛 이야기가 됐지만, 암튼 그때를 기억하면 온 바닷가에 굴비가 널려 있는 모습이 떠오르곤 하지."

그런데 가정집에 식모를 두지 않는 풍토가 되면서 최 할머니는 이내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나서야 했다. 급한 대로 채소도 팔아보고, 과일 행상을 하기도 했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서 신문과 호떡장사도 해봤지만, 기대만큼 생활은 나아지지가 않았다. "그때 우연히 택시운전 하는 사람을 봤어." 우연히 길을 가다가 보게 된 택시운전 기사. 25살이었던 최인심 처자는 불현듯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혼자 살려고 마음 먹고 서울 올라온 지 꼭 8년 만이었지."

40년 전에 운전을 배울 수 있는 곳은 서울에 딱 3곳뿐이었다. 그 중 한 곳에 등록을 했는데, 여성은 통틀어 3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나중에 수료를 할 때는 최 할머니 혼자뿐이었다. "운전을 배우는 게 힘들기도 했을거야. 하지만 모두 예뻐서 운전강사들이 가만 두질 않은 거지. 나는 못나서 끝까지 배웠나봐(웃음)." 이렇게 해서 그녀는 처음으로 택시회사에 취직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납입금을 채우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조그만 집도 얻고, 차를 살 돈도 모았다.

택시는 그녀에게 서울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해주었고 새로운 기회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도 택시와 함께 서울을 누비며 새로운 추억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여자' 운전사 생활,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여자로 택시운전을 하다 보니, 참 이상한 일도 많이 겪었지. 젊었을 때인데, 한번은 한 남자 승객이 몸을 더듬는 거야. 그래서 이 아저씨 안되겠네, 하면서 경찰서로 모셔다드린 적이 있어(웃음)." 옛날 같으면 눈물을 터뜨릴 일들도, 살다보니 조금씩 독해지기도 했고, 차분하고 냉정하게 처리하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택시는 그녀의 취미생활이 아니라 바로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세상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여자들은 그곳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돼." 텃새랄까? 기존까지 금녀의 공간이던 모범운전사 휴게실에 그녀가 처음 등장한 날부터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서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떤 기사들은 남자들 사이의 진한 성적 농담을 시침 뚝 떼고 던지면서 최 할머니의 반응을 곁눈질로 살피곤 했단다. 그러나 할머니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더 진한 농담으로 되받아쳐주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서로를 인정하게 되었다. 자신만의 생존방법이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은 남자 운전자들은 난폭한 것 같아." 그녀가 한평생 서울에서 택시 운전을 해온 '베스트 드라이버'로서 느낀 점은, 어찌된 일인지 남자들이 운전을 너무 난폭하게 한다는 것이다. 여자 운전사를 보면서 욕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부러 위험한 상황을 만들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 할머니는 차선 걸쳐서 운행하기, 난폭운전, 과속 등 몇몇 택시 기사들의 나쁜 행태를 꼬집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를 바란다는 한마디도 덧붙인다. "버스전용차로제, 대리운전 등으로 택시운전자의 수입이 예전 같지 못해. 그래서 자기에게 허락된 시간에 더 많이 일하려다 보니, 자신도 위험한 난폭운전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 특히 회사택시는 매일 납부해야 하는 금액이 있거든. 게다가 요즘에는 서울 대중교통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택시를 타는 사람도 없어.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버스전용차선을 12시에서부터 오후 4시까지만이라도 열어주면 좋겠는데."

"그러고보니 택시운전을 한 지도 37년이 됐네." 최인심 할머니는 택시와 함께 한 햇수를 손꼽아 보더니 스스로도 놀라는 눈치다. 택시 운전이라는 직업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서 세월의 흐름을 잘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녀의 눈에는 37년간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지나가는 듯했다.

스쳐지나가는 모든 인연들에게도 감사한다

최인심 할머니는 택시를 통해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한번은 워커힐 쪽에 한 어르신을 모셔다 드린 적이 있지. 그런데 도착하니까 어르신의 아드님이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아드님이 내게 꾸벅 인사를 하면서 우리 아버님 잘 모셔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거야." 최 할머니는 감격했다. 그때까지 한번도 택시 드라이버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존중해주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새마을 교통봉사대 중앙회도 했어." 불교 신자이기도 한 그녀가 복덕을 많이 쌓아야 한다는 말이 뒤늦게 와닿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선택한 것이 바로 새마을 교통봉사대였다. "교통정리도 하고, 플랭카드도 들고 서 있고, 함께 모여 불우이웃 돕기도 하는 거지." 최인심 할머니는 벌써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종로3가, 청운동 등지에서 교통경찰을 대신해 출근길 교통체증이 심한 곳에서 통제를 해오고 있다.

또한 교통봉사대를 통해서 불우노인을 위해 쌀, 연탄을 전달하는 일도 하고 있다. 그녀의 나이도 이제 곧 일흔을 바라보지만, 아직도 주변의 어르신들을 보면 애틋한 마음이 든다. "틈틈히 배운 수지침으로 침도 놓아드리고 그래." 얼마 전부터는 장애인들의 이동편의도 돕고 있다. "상계동쪽 친목 단체에 가입해서 신체장애인, 시각장애인 분들을 원하는 곳에 모셔다 드리지." 최인심 할머니는 요즘 수입이 많이 줄었지만 한달에 8~9만원씩 기부하는 일도 계속 하고 있다. 최 할머니는 이를 통해서 가장 많이 얻은 사람은 봉사하는 자신이라고 한다. 자신의 삶도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웃음을 지었다.

“돈이 없으면 베풀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야. 마음으로도 충분히 베풀 수 있어.” 최인심 할머니는 조그만 마음 씀씀이가 모두 베푸는 삶이라고 말한다. 택시에서 내리면서 ‘수고하세요’라고 건네는 말 한 마디가, 또는 누군가 주울 사람을 생각해서 길가에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이 모두 베푸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어 최 할머니는 주변의 고마운 사람들을 하나하나 손꼽는다. 우선 급할 때 화장실을 사용하게 해 주는 주유소 사장님이 고맙다. 주유를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운전자들에게 화장실을 빌려주기 때문이다. "정작 택시 운전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화장실에 갈 수 없다는 점이야." 요즘 정말 고마운 분들은 차를 돌리기 어려울까봐 골목에 들어서기 전에 내려주는 손님이다. 나이가 드니까 예전만큼 민첩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서다. 차로 가득한 골목길에서 후진으로 내려와야 하는 곳은 37년 경력자인 그녀에게도 꽤 힘든 코스다. 또한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주는 사람이 고맙고, 아무도 아닌 나를 찾아와 주는 사람도 고맙고, 그리고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고맙다.

37년간의 고독을 달래준 운송수단이자, 친구이자, 남편인 택시

얼마 전 몸이 안 좋아 몇 달을 쉬면서 할머니는 그만 둘 때가 되었나 싶었다. 그런데 한 스님이 "좀더 돌아다녀야 한다"고 말해 주었단다. 이곳저곳 달리던 사람은 갑자기 멈춰서면 그게 바로 더 견디기 힘든 일이라는 의미였다. "75세까지는 계속 해야 할 것 같아"라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근데 말야. 실은 하나밖에 없는 택시를 팔면 그 돈을 금방 다 써버릴 것 같기도 했어." 최 할머니는 오랫동안 일을 했지만, 이렇게 산꼭대기 길이 끝나는 조그만 방에서 살고 있는 이유가 손에 돈이 모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 있는 재산인 택시를 팔면 그것도 어디론가 먼지처럼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불안하기도 했다고. 그러나 그것보다도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이동수단으로, 친구로, 때론 남편으로 지내온 택시가 없으면 허전할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욕심이 없어 보이는 최인심 할머니도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하나 있다. 59년 서울에 올라왔을 때 자신에게 도움을 줬던 친구를 찾는 일이다. 당시에 인사도 못하고 그 친구의 집을 떠나온 것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 이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서로 의지하면서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이 최 할머니의 마지막 바람이다. (당시 최인심 할머니는 최영미라는 예명을 썼고, 그 친구는 안명란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 친구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마포구 도화2동에 살다가 왕십리로 이사 간 것이 전부다.)

순백의 단발머리가 인상적인 할머니는 긴 세월 동안 한번도 머리를 길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제는 하얗고 곱게 빗어넘긴 머리는 그녀만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찬란히 빛나는 백발에는 한 평생을 서울을 누비며, 또 혼자서 고독히 무언가를 떠올렸을 시간들이 담겨 있었다. 언제까지나 서울을 달릴 거라는 최인심 택시 운전사, 그녀의 행복한 '드라이브'가 오래도록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시민기자/김정상
매일 아침을 여는 서울 소식 - 내 손안에 서울 뉴스레터 구독 신청 카카오톡 채널 구독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