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우리들의 통장 아저씨

admin

발행일 2009.09.15. 00:00

수정일 2009.09.15. 00:00

조회 3,545

오늘의 인터뷰 주인공은 아마도 하이서울뉴스 인터뷰 코너 사상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독특한 인물로 기록될 것 같다. 하이서울뉴스 편집실과 이혁진 시민기자는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말없이 봉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시민상을 찾아보기로 하고, 여기저기 수소문하던 끝에 김경환 씨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런데 정작 그와의 인터뷰는 시쳇말로 대략난감이었다. 말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까? 어디 말주변뿐인가? 중년의 아저씨가 왜 이리 또 숫기는 없을까? 한사코 '내세울 게 없다'며 부끄러워하던 그에게서 더듬더듬 이야기를 끌어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동네 아저씨 같은 얼굴의 그가 조용히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들이 얼마나 큰 바위 같은 업적인가를. 이 인터뷰는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신문지상에서 만나보지 못한 수많은 '김경환 씨(들)'에게 바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본업은 봉사, 직업이 부업으로 밀린 어떤 남자의 생활

도봉구 쌍문4동에 사는 김경환(56) 씨의 일과는 여느 생활인과 별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는 이공계 전공서적을 내는 1인출판사인 '도서출판 한동'을 운영하며 집에 조그만 사무실을 마련하여 일을 본다. 30년 잔뼈가 굵은 출판업 일이라 업무는 결코 변화무쌍하지 않다. 사무실 벽에는 큰 딸, 사위 그리고 손주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여기까지는 영락없는 대한민국 중년 가장의 삶이다.

그러나 그의 본격적인 삶은 이 사무실 문을 나서면서부터 시작된다. 거리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부터 그의 보폭도 커진다. 그는 행여 끼니를 건너뛸까 싶어 매일같이 홀몸노인들을 방문해 반찬 등 먹을거리를 전달하고 있다. 그를 가족이라 생각하는 경로당의 어르신들에게도 매일 안부 인사를 챙긴다. 매주 2시간은 북부지원에서 민원인 안내봉사를 하고 있다. 동네 통장으로서 주민센터의 대민정보도 날마다 신속하게 전달해야 한다. 이웃들의 경조사에 참가하는 것 정도는 기본이다. 이 정도 듣고 나니 그의 수첩이나 달력이 궁금해진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깨알같은 메모는 찾아볼 수 없다. 일주일에 적어도 3일은 오전 업무만 마치면 '사무실밖' 일정에 나설 정도로 그에게는 봉사가 생활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변을 살피고 불우 이웃을 챙기는 등 자원봉사에 나서게 된 것은 12년 전 통장이 되고 나서부터다. 쌍문4동 주민센터 서무 이상헌 씨는 “김경환 통장님은 동네 일을 자기 일처럼 봉사하시는 분으로 공무원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분”이라면서 “아파트를 가가호호 모두 찾아다니며 직접 동네소식을 전하는 꼼꼼하고 성실한 자세는 주민들에게도 이미 정평이 나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통장이 어떤 존재인가? 지금은 동주민센터로 바뀐 동사무소의 대민정보를 현장에 전달하는 ‘동네빠꿈이’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은 통장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기에 그들에게 막중한 의무감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 무리인 시대다. 이런 세태 속에서 주민들과 가깝고 누구든 허물없이 지내는 김경환 통장을 곁에 둔 그곳 주민들은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통장의 머릿속은 동네 주민들에 관한 한 컴퓨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핸드폰도 필요 없다. 그래도 한번도 헛걸음하거나 허탕치는 법이 없다. 어디에 누가 살고 무엇을 하는 집안인지까지 누구보다도 동네사정을 두루 꿰고 있기에 주민들에게 통지서를 전달하러 갈 때조차 따로 연락하지 않고도 정확히 당사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야 '동네빠꿈이', 어려운 이웃의 사정을 보면 지나치지 못해

하지만 '동네빠꿈이'를 자처하다 보니 때로는 안타까운 가족사도 듣게 되고 간혹 못 볼 일도 보게 된다. 특히 그는 “요새 왜 그리 소위 결손가정이 많은지 깜짝깜짝 놀란다”고 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는 한부모가정, 부모가 모두 없는 자녀만으로 이루어진 청소년 가정 등 소외가정이 예전에 비해 주변에 너무도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는 “피치 못할 사정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주 보면서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불우한 결손가정을 발견하면 일시적이라도 주민센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이 기꺼이 후견인이 되어 준다. 3년 전 일이다. 동네 불우이웃 10세대를 발견하고 도울 방법을 애태우던 중 한전과 연락해 쌀을 지속적으로 지원받게 했다. 또한 곰팡이로 썩어가는 어두운 단칸셋방에 서울메트로 직원들이 도배봉사를 해줄 때는 얼마나 고마운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찾아내 후원기관을 연결하는 일에도 백방으로 열심히 뛰고 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자식과 노모가 함께 사는 알코올 중독자 가장을 발견하고 격리병원에 조치하기를 여러 번. 그런 상황에서 가족을 지원하려고 여러 곳을 수소문해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나이 마흔이 넘은 총각이 자기 방에서 혼자 숨진 채 발견됐다. 지병이 있었지만 며칠 전 찾았을 때 강제로라도 병원에 보낼 걸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고 한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잠깐 화제를 돌리다가 12년째 통장을 맡고 있는 김씨에게 2년 임기를 고려하면 '장수'통장인 셈인데 그 비결은 무엇이냐며 넌지시 물었다.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의 대답은 “특별히 내세울 건 없지만 주민들이 성실한 거 하나 보고 통장을 맡겨주시는 것 같다”는 게 전부다. 이번에는 짓궂은 질문도 던졌다. 통장의 한 달 수당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는 “월 20만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20만원. 그렇다면 김경환 씨는 명백히 매월 적자다. 물론 그가 통장을 하는 이유는 수당보다는, 어려운 이웃을 돕고 함께 나누려는 그만의 아름다운 봉사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만원 봉사직에도 2백만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일을 하고 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20만원의 봉사직에도 2백만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일을 하는 사나이

마지막으로 하이서울뉴스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인터뷰 내내 부끄러워하던 그가 말문이 트인 것처럼 입을 열었다. “홀몸노인에게 반찬을 배달하고 경로당을 찾아 어르신들과 말벗을 하며 개인적으로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면 후원자나 기관 그리고 단체를 연결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쌍문동 성원아파트 노인회 현정진(74) 회장은 “8년째 김통장을 마을 행사나 경로당에서 자주 보지만 언제나 정성으로 노인들을 대해 인기 있는 사람”이라며 그를 추켜 세웠다. 덕담치고는 예사롭지 않아 어르신과 김통장을 번갈아 보니 나란히 선 그들은 부자지간처럼 보였다. 그를 보며 따뜻한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사람들은 결코 대단한 능력이 있거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김씨는 분명 누구나가 이웃이 될 수 있으며 언제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김경환 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여전히 정말 내세울 게 없는 인생이니 절대 부풀려서 이야기하지 말라며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해드려야 하는데 죄송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겸양도 예의도 아니었음을 그의 눈빛을 보면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봉사하면서 공명심을 사거나 자신을 드러내는 데 급급한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 그는 한결 돋보이는 '숨은 보석' 같은 인물로 느껴졌다. 마음처럼 따스한 그의 손을 한동안 붙잡으며 말없이 악수를 나누고 헤어지는 길, 사무실 한켠에 촛농을 담는 그릇과 성경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오늘밤 기도 속에는 더불어 사는 희망도 분명 있을 게다.

시민기자/이혁진
매일 아침을 여는 서울 소식 - 내 손안에 서울 뉴스레터 구독 신청 카카오톡 채널 구독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