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이발사
admin
발행일 2009.09.08. 00:00
3대에 걸쳐 80년의 시간을 지나온 이용원 어느 정도 나이가 된 남자들은 누구나 이발소에 관한 기억이 있다. 오래돼 녹슨 난로, 난로 위에 하얀 김이 올라오는 주전자, 손때 묻은 만화책, 슥삭슥삭 비벼지는 면도 크림, 그리고 은은히 퍼져오던 면도 크림 향.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온다. 그런 기억들을 따라 아무런 약속도 없이 불쑥 그곳에 찾아가 보고 싶었다. “어서오세요.” 문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너무도 오래된 그 풍경을 마주하다 보니 문턱을 넘으면 저 멀리 과거 서울의 어딘가로 떠나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발사는 잠시 이발을 멈추고 안경 위로 쳐다봤다. “다들 지나다가 아니면 근처에 왔다가 뭔가에 이끌려서 저 문을 열고 들어오곤 하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불쑥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 드렸는데도 쾌히 승낙하시는 이남열 이발사는 오래된 이발관처럼이나 여유로움이 몸에 배어 있는 분이었다. “이 집은 1927년 외할아버지의 작품이지. 언젠가부터 지붕에 구멍이 났는데 일부러 고치지는 않아. 그게 다 자연스러운 멋이거든.” 80여 년 전 외할아버지께서는 어쩐 일인지 서울역 뒤편인 지금의 만리동에 자리를 잡으셨다. 당시에는 이름을 지을 필요도 없어서 그냥 이발소라고만 불렀다. 그러던 것이 6.25전쟁을 겪으면서 아버지 고(故) 이성순 씨가 이발소를 물려받았고, 이때 이름 가운데 ‘성’자를 따고, 우리에서 ‘우’자를 따서 지금의 ‘성우이용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여기는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또 내가 자란 곳이기도 하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이 집을 지금처럼 지키지 않을까 생각해.” 이발소는 옛 가게들이 그렇듯 영업과 생활을 같이 하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발소의 뒷문을 열면 바로 가정집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는 그 공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그곳에서 자랐다. 그런 집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것저것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집도 낡아서 얼마 전 생활을 하던 집만 이사를 했는데, 하고 보니 또 그때가 그립고 매일 가게 문을 열 때마다 애틋함이 느껴진다고. 뛰쳐나가면 어느 순간 여기 와 있더라, 이발사라는 직업의 매력 “아버지는 내가 이발사가 되기를 바라셨지만, 나는 싫었어. 그래서 공부도 하고, 나가서 직장도 구했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내가 여기 와 있는 거야.” 그는 젊은 시절 이용원이라는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수를 많이 주는 직업도 가져보고, 번듯한 직장에도 들어가 봤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멀리서 볼 때는 매력적이던 그 일들이 직접 생활이 되니 그를 답답하게만 했다. 그렇게 직장을 뛰쳐나오기를 수십 번. 올 때마다 편하게 받아주던 곳이 아버지가 있는 이발관인 집이었다. “아버지에게 많은 것을 배웠지. 자식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많은 기술을 다 가르쳐 줄 수 있었을까 싶어. 대부분의 장인들이 대물림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 같기도 해.” 그는 이십대 중반이 되어서야 아버지에게 이발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이발이 그렇게 기술이 필요한 직업인지 몰랐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처음부터 이발 기술을 배웠던 것은 아니다. 처음 그가 한 일은 가위를 들고 신문지를 머리카락 두께로 자르는 일이었다. 그러자면 가위의 날이 서 있어야 했고, 그래서 하루 종일 숫돌에 가위를 갈아야 했다. 그렇게 이발소 구석에서 '신문지 분쇄기' 역할을 하며 수개월 거쳤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게 이발사가 되기 위한 기본이었어. 이발사가 사용하는 도구는 가위, 칼과 같은 굉장히 날카로운 물건이야. 그래서 자칫하면 손님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지. 그래서 이발하는 순간은 누구보다도 더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아버지는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서 그걸 가르친 거였어.” 그렇게 이발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매력에 빠져가던 그도 한번은 이발을 그만두려고 했던 적이 있다. 이발사라는 직업을 가지고는 도저히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퇴폐이발소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는데, 맞선을 보러 가도 그가 이발사라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보곤 했었다. “계속 할 가치가 있는지 회의가 들었지.” 그러나 때마침 그는 아름다운 신부를 만나 이발소를 그만두지 않아도 되었다고. “그때 이후론 한번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거나, 그만두겠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어. 차라리 이런 기술을 가르쳐 준 아버지에게 매일 감사하고 있지.” "어느날 한번은 청심환으로 유명한 모 제약회사 회장님이 수십명의 사원들을 데리고 온 적이 있어. 그런데 다짜고짜 직원들더러 나한테 절을 하라고 시키는 거야.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했지. 그때 그 회장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아.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킨 것만으로도 우리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됩니다." 그는 엉겁결에 절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 회장님과 직원들은 모두 그곳에서 머리를 깎고 갔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을 지나가는 듯했다. “이 이발소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 같아.” 성우이용원을 찾았던 사람들 중에는 동네 사람들도 있고, 유명인도 있고, 외국인도 있다. 유명인 중에는 정치인도 있었고, 기업가도 있었다. 일본처럼 가까운 곳 사람들도, 프랑스와 같이 먼 곳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들 저마다 성우이용원을 찾아 바깥세상 이야기를 해 주었고, 이남열 이발사는 그들의 지저분해진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이발 기술자와 이발사는 다르다, 머리카락만 봐도 사람 알 수 있어 “이발에도 장인이 있을까들 생각하지만, 분명 가능한 이야기야. 나도 지금의 내가 만들어지기까지 3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 같아.” 이남열 이발사는 이발도구를 다듬고 관리하는 것, 그리고 이발도구를 사용하는 것, 마무리 하는 것 등이 모두 연결돼 ‘이발’이라는 하나의 완성된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 자신만 해도 그 모든 일들을 충분히 이해할 때까지 7년이라는 세월을 보냈고, 그 이후에도 그것들을 조금씩 완성하기 위해서 지내온 시간이 나머지 23여 년의 시간이라고 한다. “이발기술자와 이발사를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는 아마도 가위와 면도칼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느냐라고 생각해.” 이남열 씨는 이발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사용하는 용구를 최고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손이나 다름없는 도구를 아무렇게나 두거나,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은 훌륭한 이발사라고 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제는 사람들의 머리만 봐도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지. 성격은 어떤지, 건강 상태는 어떤지 모두 머리카락에 나타나거든.” 가령 당뇨병을 가지고 있는 고객은 일반인에 비해서 모발을 지탱하는 힘이 약하고, 한번 머리가 빠지면 다시 자라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되도록 날이 잘 다듬어진 가위를 써서 바람이 스치듯 이발을 해야 한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머리의 부위에 따라서 머리카락이 다르기 때문에 서너 개의 적당한 가위를 찾아서 이발을 해야 한다. 이 정도의 내공을 쌓는 데는 적어도 20년 이상이 걸린다고 이남열 이발사는 강조한다. “요즘 헤어디자이너들은 너무 쉽게 배우려고 하고, 또 드러나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는 후배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멋에만 너무 집중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말한다. 또 이발 기술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애착을 가지고 고민하는지 모르겠단다. 혹시라도 자신의 실력이 좀처럼 발전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후배가 있다면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보는 것도 좋다고 충고한다. "가장 기본적인 것에 진리가 들어 있는 법이지." 시간의 힘은 무쇠로 만든 가위도 비틀어버린다
"유리도 흘러내리고, 쇠도 비트는 게 시간의 힘이야." 이남열 이발사는 갑자기 시간의 무시무시한 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많은 사물들이 시간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데, 이발 가위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이발소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가위는 140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쓰시던 이발가위가 아버지를 통해서 지금의 이남열 이발사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 가위를 쓰면 손에 착 달라붙는 것 같아 편안하다고. 그러나 현재는 헝겊과 고무줄로 꽁꽁 묶어서 보관 중이다. 시간이 지나니 무쇠로 만든 가위도 조금씩 비틀어졌기 때문이란다. 지금은 일 년에 한번 정도 귀한 손님이 오시면 꺼내 이발을 한다고. “서울시장님이 들러주시면 한번 꺼낼 수도 있지(웃음).” “숫돌만 해도 종류가 다양해. 몰랐을 거야. 어떤 숫돌을 이용하는지에 따라서 칼날을 다듬을 수 있는 정도가 다르지.” 그는 현재 사용 중인 숫돌을 꺼내 보여준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에서부터 노란 빛깔이 나는 돌까지 다양했다. 그렇게 다양한 숫돌 위에서 갈아진 가위는 저마다의 성격을 가지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가죽에 대고 일정한 방향을 만들어 주면 번뜩이는 날이 서게 된다. “날카롭다고 꼭 다 좋은 것은 아니야.” 사람마다 또 사람의 머리카락의 위치별로 성격이 다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다양한 날카로움을 가진 가위가 필요한 거란다. 날에는 결이 있어서 자르는 동시에 머리카락을 밀어내기도 하고 붙들고 있기도 한다. “요즘에는 시간이 날 때 그림을 그리는 취미가 생겼지.” 그는 최근 그림 그리는 취미에 푹 빠져 있다. “조금씩 그리다가 보니까 되는 거야. 물론 이발사다 보니 머리 모양이 세밀하게 묘사되곤 하지.” 그가 대상으로 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인물 그 자체보다는 인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머리카락이나 수염이다. 그러고 보니 이발소 구석에는 오사마 빈 라덴이라든지 아내의 모습, 또는 김동길 박사의 초상 등 그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모르겠어. 수염이나 머리카락이 가지고 있는 힘이 있는 것 같아. 그게 카리스마라고 할 수 있으려나?” 옛집은 쓰러지긴 해도 무너지는 법은 없다 “아들이 이 이발관을 이어가면 좋겠지. 하지만 어렵다고 봐.” 이남열 이발사는 이 말을 하면서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이발에 전혀 관심이 없다. 3대를 이어온 이발관이 자신에게서 문을 닫는다고 생각하니 조금 갑갑하기도 하다. 또 자신이 평생을 보내면서 쌓아온 이발 기술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다. “그래도 강요할 수 없는 것이, 이발사라는 직업이 과거만큼 기술자로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남열 씨는 만약 아들이 지금이라도 이발을 배우겠다고 하면 바로 독일로 가서 최고급 숫돌과 가위를 하나 구입해 올 생각이다. 가장 좋은 것으로 아들을 격려하고 싶기 때문이다.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성우이용원은 이제 조금만 시간이 더 흐르면 기억 속의 공간이 될지도 모른다. 나무가 삭아서 부서지고 있는 문도, 나무 창틀에 끼워진 유리창도, 구멍난 천정도, 오래된 이발의자도, 낡은 드라이기도, 휘어진 빗도, 그리고 140년이란 시간을 견딘 무쇠 가위까지도 모두 한순간에 추억이 될지 모른다. 그런 안타까움을 아는지 이남열 이발사는 자신이 살아있는 한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옛집들은 벽속에 사기를 넣어서 쓰러지긴 해도 무너지는 법은 없어.” 성우이용원, 그리고 이남열 이발사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주변을 풍요롭게 해줄 거라고 믿는다. 시민기자/김정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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