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한 번쯤 돌아보는 아날로그 세상

시민기자 이나미

발행일 2014.06.18. 00:00

수정일 2014.06.18. 00:00

조회 1,278

[서울톡톡] 몰랐다. 빨리 변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에도 '아날로그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중고 LP부터 오디오, 우표, 기념주화까지.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으로 치면 역사자료 격인 이 수집품들을, 1978년부터 우직하게 지켜온 자리가 있었다.

살다가 기억 속 추억과 감성을 되찾고 싶다면 바로 그 자리를 찾아가면 된다. 서울에서도 정 가운데 위치한 '아날로그 세상'. 우리는 그 자리를 '회현지하상가'라 부른다.

추억여행이 펼쳐진 회현지하상가. 공단은 지난 13,14일 이틀동안 페스티벌을 마련해 상가와 시민들과의 소통을 모색했다.

한국은행과 서울중앙우체국 도로 지하보도에 위치한 회현지하상가. 이 상가는 평소 주변 시설보다 한 템포 늦게 시작해, 한 템보 빨리 하루를 마감해왔다.

그래왔던 이곳에서 지난 13, 14일 평소와 다른 진풍경이 펼쳐졌다. 평상시 상점이 문을 닫았을 저녁 7시 무렵, 상가 중앙광장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날 광장에서는 공개 라디오 방송 무대가 차려졌고 진행을 맡은 DJ가 한국어로 번안한 올드팝송을 들려주며, 분위기를 한껏 높였다. 서울시설공단이 주관한 '아날로그 페스티벌'은 상가의 특성을 살려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 있는 행사로 꾸며졌다.

13일 회현지하상가에서는 뮤지션 볼빨간이 DJ로 나서 특색있게 편곡된 번안곡과 추억의 원곡을 함께 소개하는 음악해설을 들려주었다.

현재 서울소재 지하상가들은 총 29개로 이 지하상가들은 모두 '서울시설공단'이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90년대부터 보행자 편의를 위한 횡단보도 설치 등으로 지하상가를 찾는 유동 인구가 줄면서 상가 상인들이 어려움을 겪어 왔다.

서울소재 지하상가 중 '회현지하상가'의 경우 서울에서 유일무이한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오디오 LP, 우표 등 아날로그 수집품들이 한 곳에 모여 있어 말 그대로 '서울의 생활역사'를 볼 수 있는 특화된 상가다. 공단은 이 특성을 살려 상가에 활력을 불어넣고 나아가 상가 활성화를 모색하고자, 이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중고LP, 오디오 가게는 전국 100여 개 점포 중 15개 점포가 회현지하상가에서 영업할 정도로 회현지하상가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회현지하상가는 지상에 있는 한국은행과 서울중앙우체국의 영향으로 우표 및 기념화폐 수집점포가 생겨났다.

한편, 아날로그 감성공연으로 상가 분위기가 한껏 들뜬 가운데 기자는 조용히 자신의 일에 집중하던 몇몇 상점주들을 만나보았다. 각자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추억을 지켜온 사연, 또 그들이 말하는 회현지하상가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다.

"도구가 방망이에서 바늘로 바뀐 것 밖에 없어요"

상가를 둘러보던 중 한 상점 간판이 기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작은 사이즈지만 한 눈에 들어오는 간판명은 '뜨개질을 하는 남자'. 호기심에 상점 안을 들어가 보니 간판명 그대로 정문호 씨가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뜨개질 장인인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합류한 남동생이 함께 이 상가에서 상점을 운영 해 온지도 20여 년. 그를 만나 가족이 한 자리에서 뜨개질을 하게 된 사연을 들어보았다.

정문호 씨는 대학시절까지 야구선수로 활동했다. 그러다 1989년 열차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는 아픔을 겼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서 먹고 살 일을 찾던 중, 평생 뜨개질을 해 오신 모친과 함께 이 곳에 자리를 잡아 오늘까지 뜨개질 바늘을 놓치 않았다.

"야구선수였던 남자가, IMF로 실직한 동생과 같이 뜨개질 한다. 이런 내용이 남들 눈에 주목 받을 수 밖에 없는 독특한 사연이죠. 어릴 때는 야구방망이를 들면 무서운 게 없었지만, 지금은 무엇가를 하고 있으면 제가 개척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그의 삶을 크게 차지해온 야구와 뜨개질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이에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도구가 방망이에서 바늘로 바뀐 것' 밖에 없다는 것.

"저는 뜨개질과 야구는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야구는 날라 오는 공을 집중해서 맞추고, 뜨개질도 집중해서 뜨고 줄이고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해야 하죠. 그래서 전 야구와 뜨개질 모두 '집중의 예술'이라 표현하고 싶어요."

뜨개질을 하는 남자 정문호 씨

지금처럼 가족과 계속 하면서 온라인으로도 사업을 넓히겠단 소망을 간직 중인 그에게 회현지하상가를 향한 바람도 들어보았다.

"몇 해 전, 일본의 지하상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지역 상가까지 다 하나로 연결되어있는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바램이라면 시가 회현을 포함해 명동, 소공, 을지, 시청 광장을 하나로 연결한다면 지하상가가 더 활성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장년층 남성들의 영원한 향수, 밀리터리룩'

90년 초 걸프전을 기점으로 밀리터리룩 수출을 많이 했던 시절, 군수품 회사에 근무했던 그는 일본에 밀리터리 샵들이 많다는 걸 보고 1년 간의 준비 끝에, 회현지하상가와 인연을 이어왔다. 중고 LP, 우표 상점들이 밀집한 상가에서 유일하게 밀리터리룩과 군사용품점을 운영하는 '멤피스 벨' 대표 김영일씨. 그가 이 곳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LP, 우표 상점들이 많이 모여있는 상가에 유일한 밀리터리 전문점인 멤피스 벨

"서울 시내 스트리트 상점들은 한 곳에서 오래 못해요. 서울시가 운영하는 지하상가이기에 월세와 관리비도 저렴하고 상가 문화와 특성이 유지되는 좋은 여건이라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죠. 상가 특성 덕분에 주로 중장년층 남성분들이 향수를 찾고자 멤피스 벨을 많이 방문해요. 요즘은 밀리터리 제품만이 갖는 실용성과 멋 때문에 트렌드를 놓치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들도 반드시 여기를 들리죠."

유일하게 밀리터리 전문용품을 취급하는 멤피스 벨 김영일 대표

기존 상점들과는 다른 소재를 취급하지만 이 상가와 오랜 인연을 이어온 그에게 앞으로 지하상가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지하상가 상권자체를 예전보다 어렵다고만 보지만, 전 그렇게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길게 내다보면 저렴한 유지비와 시가 운영하는 합리적인 조건이 잘 이뤄지면 지하상가는 오래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상가는 백화점, 명동거리, 재래시장이 연결되어 있고 이들을 방문하려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만큼 서울에서도 중심 요지예요. 이런 조건들이 넓게는 서울 고유의 생활역사, 문화를 다음세대에 이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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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지하상가 #아날로그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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