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화가의 집에 초대받는 기분

admin

발행일 2010.04.14. 00:00

수정일 2010.04.14. 00:00

조회 2,401

지난 4월 10일 토요일 오후, 꽃들이 만개하여 덕수궁 안은 일반 공원 나들이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특히 덕수궁 현대미술관 앞은 수양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장관이었다. [봄을 기다리는 소년]이라는 부제로 박노수 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작가가 머무는 공간, 그 안에서 발산하는 무한한 창작과 사유의 에너지를 체험할 수 있는 탐방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작가의 인간적이고 소소한 일상과 고민, 그리고 세월이 남긴 추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에서 작가의 작품세계를 보다 깊이 느껴보고 난 이후에 작품 감상을 한다면, 감상의 맛이 다를 것이라는 취지에서 기획한 것이라고 한다. 옥인동에 있는 박노수 작가의 고택과 부암동의 작업실을 탐방하는 이 프로그램은 선착순 20명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았는데, 관계자가 아니면 쉽사리 갈 수 없는 귀한 기회여서인지, 200여 명의 신청자가 몰려 조기에 마감돼, 그 관심과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미술관 시청각실에 모인 탐방객들은 먼저 부암동 작업실과 옥인동 고가를 둘러보고 다시 덕수궁으로 돌아와 작품 감상을 할 것이라는 안내에 모두가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설렘과 기대로 들떠 있었다. 쿠키 한 조각과 함께 마시는 커피맛도 특별했다.

탐방버스는 먼저 부암동 소재 작업실로 달렸다. 하림각 주변 꽤나 급경사인 비탈길을 오르자, 연세대학교 우남관이 마주 보이고, 골목에는 커다란 대문 틈으로라도 들여다봐야 할 것 같은 궁금증을 일게 한 오래된 고가들이 몇 채 더 있었다. 골목 끝에 이르자, 석파감길(부암동 396번지)이라는 주소가 새겨진 하얀 철문이 보였다. 운치있는 정원과 함께 대작들을 맘껏 구상할 수 있는 넓은 작업실 정도만 추측하며 갔었는데, 눈 앞에 펼쳐진 풍광은 범상치가 않았다. 바위와 굴, 석상, 석등, 정원석, 수석 등 사극의 무대 같은, 깊은 유서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작품에 몰입하기 위한 은자(隱者)의 거주지가 산 아래 멀리 보였다.

박노수 작가는 벌써 7년째 병석에 누워 계시고 대신 탐방객들을 반갑게 맞이한 이는 부인인 장신애(68) 여사였다. 그는 허허벌판 산자락이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처음에는 반대를 많이 했다는 말문부터 열었다. 돌멩이 하나, 물줄기, 길닦는 일, 텃밭 일구는 일들까지 지금의 모습들은 다 작가의 손길이었다며, 많은 추억과 꿈, 회한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했다. 깊은 산 속에서의 안내가 바느질 한 땀, 한 땀처럼 조심스럽고 작은 떨림으로 숙연하게도 했다.

바로 작업실 앞 길가에서부터 눈길을 끌었던 진붉은 벚꽃을 보자마자, 미술관에서 출발 전에 잠시 둘러봤던 작품 해설 중에 “복숭아 살구꽃은 잘도 붉지만...”이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작업실은 불과 14평밖에 되지 않지만 주변경관은 다 작품배경이 되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고무신 신고 급하게 정원을 돌아다니고, 또 붓을 들고, 그러다가 또 돌 고르고 잡초 뽑고……. 1000년이 넘은 은행나무 이야기, 벚꽃이 피면 온 천지가 눈 덮인 것처럼 멋스럽다는 이야기, 되돌아 나올 때까지 이어지는 장여사의 파노라마가 바로 작품 속에 그대로 전개되고 있는 듯했다.

다음 탐방인 옥인동 고택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 나오는데, 맞은 편에 북한산이 가깝게 보였다. 대원군 별장인 석파정을 중심으로 한 부암동 생태문화 탐방코스가 인근이라는 것도 알았다. 같은 종로구 옥인동 168-2번지,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인 작가의 고택을 찾아 버스에서 내려 골목으로 들어서자, 골목 끝 하늘 아래가 인왕산 자락으로 가득 찼다. 아기자기하고 오래된 옛날 가게 같은 간판들이 정겨웠다. 정원이 넓은 저택일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수석을 좋아하여 마당 곳곳에도 집채만한 정원석까지 다양한 돌들이 놓여 있어 거의 발을 편하게 디딜 마당은 없는 편이었다.

맑고 화사하게 핀 자그마한 매화 한 그루에 시선이 모아졌다. 아니나 다를까, 장여사는 작가가 2003년에 쓰러지고, 이듬해 매화 한 그루를 심었는데, “선생님은 그대로 누워 계시고 매화는 저렇게 예쁘게 피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집은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하여 1938년에 건립한 반지하층이 있는 이층집이라고 한다. 1층은 벽돌조이고, 2층은 목조이며, 지붕은 서까래가 노출된 처마가 나온 박공지붕이다. 이 집의 특징이 바로 지붕이 잘 생겼다는 것이라며 추억이 어린, 반 언덕길 높은 뒤뜰로 안내하여 흐드러진 앵두꽃과 자목련, 산수유 사이에 정말 잘생겨 보인 지붕을 보여줬다.

1층은 온돌ㆍ마루ㆍ응접실 등을 두어 프랑스풍이 나게 꾸몄고, 2층은 마루방 구조로 만들었으며, 주택 내에는 벽난로가 3개 설치되어 있다는데, 참 궁금했다. 집안에 환자가 계셔서 차대접도 못하고, 집 내부도 공개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양해를 구하는 장여사의 진심어린 마음이 오히려 무례한 불청객이 되지 않았나 싶어 더욱 조심스럽기만 했다.

덕수궁미술관에서 3월 17일 개막한 박노수 회고전 [봄을 기다리는 소년]은 4월 18일까지 열린다. 1955년 당시 최고 권위의 미술전람회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수묵채색화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상(작품명: 선소운)을 받았고, 도제식 교육에서 벗어나 미술대학에서 정식 교육을 받은 화가 중 첫 번째 국전 추천작가가 되는 등 화려한 이력을 지닌 작가의 초기작부터 대표작, 미발표 소품까지 100여 점이 전시되며, 전시에 맞춰 1954년 이후 작가가 쓴 수필과 기고문, 화론 등을 모은 수필집 [화필인생]도 함께 출간됐다 한다.

두 시간 이상 부인 장여사와 동행하면서 바로 박노수 작가의 작품에 등장한 여인의 모습이 부인의 이미지와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작가의 작품에 등장한 소년 역시 작가 자신의 모습과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흐트러짐 없이 정갈한 모습으로 남편의 흔적과 업적을 잘 전해준 장신애 여사와 함께, 부암동 작업실 봄꽃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일어나시라고 '파이팅'을 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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