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교회와 성당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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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12.23. 00:00
시민기자 이석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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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처음 보게 되는 것은 덕수궁의 대한문이다. 하지만 오늘 소개할 곳은 따로 있다. 대한문을 뒤로 한 채 덕수궁 좌편 돌담길을 따라 정동극장 쪽으로 5분여 간 걸음을 옮기면 도심 마천루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아 보이는 예배당이 눈에 띈다. 이곳이 흔히 정동교회라고 지칭되는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 대한민국 최초로 세워진 감리교 교회다. 정동교회의 전신은 베델예배당(Bethel Chapel)으로, 배재학당을 세운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 H. G.) 목사에 의해 세워졌다. 베델예배당은 1895년(고종 32년) 9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12월 26일 헌당식(獻堂式)을 가졌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건물로 불리며 대한민국의 사적 제 256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예배당은 단층건물인 데다 벽돌로 외관을 구성해서인지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변에 삼성ㆍ한화ㆍ대한항공 등 한국 유수의 그룹 본사가 포진해 있는 탓인지 쌀쌀한 날씨임에도 간혹 산책을 즐기는 회사원들의 모습이 보이곤 하였다. 교회 정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본당 옆에 아펜젤러 목사님과 정동교회 한국인 최초 담임목사인 최병헌 목사님의 흉상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 정동제일교회는 그 건축물의 역사 못지 않게 한국 독립운동사와도 많은 관련을 갖고 있다. 제5대 현순, 제6대 손정도, 제7대 이필주 담임목사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들이다. 1919년에는 담임목사 이필주와 전도사 박동완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면서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또한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사한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도 정동교회 신자였다. 단순히 건축물의 오래된 나이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기에 이곳의 정경이 다시금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쉬운 맘을 묻어두고 다시 서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흔치 않은 철길 건널목을 지나 10여 분쯤 걸어가자 서소문 순교성지에 다다랐다. 서소문 공원이라고도 명명되며 예전에는 '서소문 밖 네거리'로 불렸던 이 곳은 새남터 절두산과 더불어 조선 왕조의 공식 처형장이었다. 여기서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100여 명의 천주교인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 중 44명은 성인으로 추대되어 국내 최대의 천주교 성지로 자리잡았다. 이곳의 천주교 기념탑은 1984년 세워진 순교자 현양탑을 1999년 5월 다시 건립한 것이다. 탑 기단 위는 유리로 막아 물이 흐르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박해와 죽음의 상징인 칼과 생명의 상징인 물을 대비시킨 것이다. 주탑 앞 부분에는 순교의 참상을 형상화한 청동조각을 붙였으며 세 탑 모두 윗부분 구멍에서 가운데까지 7개의 금빛 선을 흘러내리게 하고 있다. 이 선은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승리와 천주교 7대 성사(聖事)를 상징한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을 상세히 모른다 해도 충분히 갈 만한 곳이다. 분수대와 정자가 마련되어 있는 주변 공원에서 산책을 할 수 있는 곳이기에 가족 단위의 방문자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곤 했다. 길을 알려준 경찰관의 안내에 따라 서소문 순교성지에서 충정로 쪽으로 7분 정도의 거리를 10분 넘게 걸어올라오니 한국경제신문빌딩 앞에 십자가가 선연히 눈에 띄는 예배당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이 중림동성당으로 불리우기도 하는 약현성당이다. 좀전에 지나왔던 서소문 순교성지를 관할하는 성당이기도 하다. 중림동 약현성당의 전신은 1887년 블랑주교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승훈의 집터에 설립한 공소인데, 그 뒤 프랑스 신부들의 주도하에 1892년 축성된 것이 바로 지금의 성당이라고 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로서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조 성당으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건물인 벧엘예배당과 구분할 수 있다. 이곳 약현(藥峴, 약초고개)이라는 이름은 원래 오늘날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고개에 약초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고, 성당 사무장 배병국 요셉님에 따르면 건립 당시에는 이 이름을 따 오래도록 약현 성당이라 하였다. 그러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중림동 성당이라고 불리다가 2007년 7월 다시 그 이름을 찾아 '중림동 약현 성당'을 정식 이름으로 찾게 되었다고 한다. 언덕빼기 길을 올라가면 맨 먼저 보이는 것이 성당본당 건물. 1998년 2월 불행히도 방화로 일부 소실되었으나 1999년 복원되었다니 다행이었다. 아까 사무장님의 말씀이 로마네스크 양식과 게르만 양식이 절충된 형식의 성당이라고 하였으나, 문외한인 기자의 눈에는 그저 대단한 성당으로만 보였다. 이곳을 가끔 찾는다는 인근 회사의 박기갑(49세, 회사원) 씨는 “삭막한 도시 안에 이렇게 맘을 쉴 수 있는 곳이 있어 가끔 일을 놓고 산책을 나오곤 합니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에는 그리 좁지 않은 이 성당 안에 눈에 띄는 곳이 있어서 가 보았다. 성지 전시관이었다. 낯설지 않은 이름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 등 6위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넓지도 장중하지도 않은 장소였지만 충분히 성인들의 발자취를 보며 느끼기에 충분했다. 크리스쳔은 아니지만 이곳에 오면 왠지 두손이 모아지는 것은 기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조금만 있으면 크리스마스다. 올해에는 혼자서도 좋고 혹은 연인이나 가족들 손을 잡고 이곳에 와서 종교를 떠나 잠시라도 크리스마스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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