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의 추억

내손안에서울

발행일 2006.06.12. 00:00

수정일 2006.06.12. 00:00

조회 1,512

보리밭의 추억

시민기자 이승철

보리밭

누가 있다고 누가 본다고
들판을 휘둘러 봐도 아무도 없는 푸른 물결뿐
가시내도 가시내도 참,
왜 자꾸만, 어쩌자고 키 자란 보리밭 고랑 길로 내달릴까
숨결 쌔근쌔근 가쁜 숨 몰아쉬며 발그레한 얼굴로 주저앉은 밭두렁엔
제비꽃 민들레 꽃 괜 시리 수줍고
하늘에는 종다리가 나는 봤지 나는 알지
종알종알 쫑알쫑알 너울너울 아지랑이 따라 소문이 낭자한데.
<이승철의 시 ‘보리밭 연가’>

열일곱 살 숙이는 괜 시리 맘이 설레어 방안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을 앞 신작로에 흐드러졌던 벚꽃도 흔적 없고 먼 산의 진달래도 모두 졌는데, 창문 밖 뒤란에는 장다리꽃이 한창이고 벌 나비들이 분주한 한나절입니다.

누군가 부르는 듯 누군가 기다리는 듯 무작정 바구니 하나들고 들길로 나섭니다. 들 가운데 도랑물에는 동네 조무래기들이 송사리를 쫓고 논둑에는 암소 한 마리가 두 눈 지그시 감고 되새김질 하는 모습이 한가롭습니다.

따사로운 햇살에 가물가물 아지랑이 너머 멀리 산등성이 위에는 구름 몇 조각이 그리움처럼 떠있습니다. 논둑, 밭둑에는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저마다 예쁜 모습을 뽐내며 미소 짓고, 철 지난 냉이며 쑥이 지천입니다.

아이 키만큼이나 자란 보리밭은 벌써 이삭이 올라와 누릿누릿 익어가고, 하늘에는 종달새가 온 동네 소식을 전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이 물결치듯 출렁일 때마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계절의 향기가 싱그럽습니다.

밭둑에 쪼그리고 앉아 나물을 캐보지만 금방 심드렁하여 손을 놓고 맙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노랑나비 한 마리 팔랑 팔랑 아지랑이 속으로 날아가고 나비를 쫓던 소녀의 눈길은 어느새 멀리 하늘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갸름하게 잘 생긴 식이의 얼굴, 하얗고 동그란 철이 얼굴, 장난기 어린 훈이 얼굴, 작년 이맘때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 얼굴, 얼굴, 얼굴...핑그르르 눈물이 맺히고 두 볼을 타고 흐릅니다.

봇물처럼 갑자기 터진 그리움의 상념들이 서럽지도 않은데 눈물이 되어 흐릅니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종다리의 노래와 그녀의 고운 노래가 절묘한 화음을 이루어 아른아른 아지랑이 속으로 스며듭니다.

노랫소리는 하늘로 퍼지고 싱그러운 봄이 살풋 미소 지으며 그리움의 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지금 남쪽 들녘은 익어가는 보리밭이 황금물결처럼 일렁이는 계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보리밭에는 추억이 있고 그리움이 있고 낭만이 넘실거립니다.

서울에도 그런 곳이 있습니다. 과천의 서울대공원 앞에도 중랑천 변에도 한강의 둔치에도 여기저기 보리밭이 가꾸어져 옛날의 그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잠실 한강둔치 자연학습장의 보리밭도 누렇게 익어가는 모습이 정겨웠습니다.

“옛날에는 이맘때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배고프면 보리서리도 많이 해먹었는데. 너 보리서리가 뭔지 아니?” 손자와 같이 산책 나온 노인 한 분이 손자에게 묻습니다. 어린 손자는 당연히 모를 수밖에요, 머리를 좌우로 흔듭니다.

“보리가 저만큼 익었을 때 이삭을 잘라서 불에 구워 먹는 거란다. 얼마나 고소하고 맛있는데...” 노인이 보리밭을 가리키며 설명을 합니다. “그렇게 맛있어요? 할아버지.” 손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입니다.

“옛날 이맘때 시골에서는 아주 흔한 풍경이었는데 지금은 시골에서도 거의 볼 수 없겠지요?” 내가 노인을 바라보며 묻자 노인은 대답 대신 하늘을 쳐다봅니다.
“다 배고프던 옛날이야기지요.” 저 멀리 한강 하구 쪽 하늘 위에 뭉게구름 한 무리가 동화처럼 떠 있습니다.

“불에 그슬린 보리를 비벼 먹느라 입이며 얼굴에 검댕이 칠을 잔뜩 하고 서로 마주보며 깔깔거리던 기억나십니까?” 노인이 빙긋 웃었습니다.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 모양입니다. 서울 한강 둔치에서 익어가는 작은 보리밭이 가난했지만 그리운 옛날 추억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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