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자도 관객도 울다가 웃은 공연
발행일 2010.12.03. 00:00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순이가 흐느끼며 부르는 노래를 듣다가 그만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많이 잊혀져가고 있긴 하지만 지금도 현실로 남아 있는 우리들의 슬픈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유명극장에서 전문배우들이 공연한 연극이 아니다. 서울시립동대문노인복지관의 연극반 노인들이 지난 7개월간 연습하여 공연한 연극이었다.
연극의 줄거리는 이렇다. 때는 일제가 막바지 발악을 하고 있던 1943년. 충청도 태안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 김진사댁 아리따운 딸 순이는 이웃마을에 사는 청년 이철민을 사랑한다. 이철민은 만주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보내주며 독립운동을 돕고 있는 청년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악질 형사로 소문난 가네야마가 순이와 결혼을 하겠다고 김진사댁에 청혼을 한다. 일제를 등에 업고 못된 짓을 골라 하고 있는 가네야마에게 사랑하는 딸을 시집보낼 수 없는 김진사 부부는 걱정과 고민에 빠진다. 가네야마로부터 마지막 협박을 받은 김진사는 결국 사랑하는 딸 순이와 이철민을 몰래 만주 땅으로 도피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만주로 함께 피신하지 못하고 가네야마에게 붙잡혀 이철민은 모진 고문을 당한다. 순이에게는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정신대로 보내겠다고 협박을 한다.
일제시절 정신대로 끌려간 김진사댁 아가씨 순이
12월 2일 오후 2시, 노인들의 연극을 공연한 동대문청소년회관 5층 대강당은 좌석이 부족하여 서있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 노인들과 일부 출연자 가족들인 젊은 사람들이 섞여 있는 객석에서는 공연이 계속되는 동안 “어~ 잘한다, 잘해!” “연기도 좋고 배우 다 됐네” 하는 등 평소 자신들이 알고 있던 모습과 너무 다른 출연자 노인들의 연기력에 아낌없는 박수와 격려를 보내고 있었다. 특히 ‘동림악극단’이라는 이름으로 출연한 노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익살을 부릴 때는 박수와 웃음보를 터뜨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순이는 정신대로 끌려갔다가 해방을 맞은 조국에 돌아오지만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하고 서낭당 앞에서 슬픈 독백을 한다.
해방의 기쁨에 들뜬 군중들 속에는 일제의 앞잡이 가네야마 형사가 박순호라는 본래의 우리 이름으로 경찰이 되어 나타난다. 동림악극단에서 청소를 거들며 지내던 순이가 팥죽장사가 되어 손수레를 끌고 거리에 나섰다가 길거리에서 마주친 이철민은 다리를 절름거리는 불구자가 되어 자신의 모습을 숨긴다. 마침 그 때 나타난 가네야마, 아니 경찰이 되어 나타난 박순호와 맞닥뜨린 순이는 뼈에 사무친 원한으로 칼을 뽑아들고 박순호를 찌르려 하지만 실패한다. 가네야마 박순호는 복수에 실패하고 너무나 원통하여 울부짖는 순이를 조롱하며 자신이 대한민국 경찰이라고 어깨를 으쓱이며 거들먹거린다. 이때 근처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철민이 몰래 다가가 가네야마, 박순호를 기습하여 쓰러뜨린다. 그러나 순이는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부모님의 집 앞에서 마지막 하직 인사를 올리며 다시 ‘꿈에 본 내고향’을 흐느끼며 부르는 것이다.
순이의 절규에 가까운 슬픈 독백과 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객석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할머니들이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기자도 사진 촬영을 하다가 두 눈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순이의 노래가 끝나갈 즈음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무대 뒤에 도열하며 합창을 한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은 크다.’ 옛날에 가수 이인권씨가 불러 유행했던 노래 ‘귀국선’이었다. 해방된 조국으로 희망을 안고 돌아오는 동포들을 그리며 불렀던 노래다. 연극은 눈물 나도록 슬픈 줄거리였지만 마지막 장면은 희망을 안고 함께 부르는 노래여서 멋진 마무리였다.
“오늘 연극 정말 좋았어요. 전문 배우들 저리 가라네요.” “순이가 너무 불쌍하고, 연극이 너무 실감나서 한참 울었구먼유.” 주변에서 함께 관람한 할머니들의 말이다. 기자의 오른 편에 앉아서 눈물을 훔치던 78세 할머니는 너무 울어서 눈자위가 붉었다. 전에 몇 번인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정신대 할머니들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한다. 관객들은 너나없이 노인들의 연극이 매우 훌륭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노인들에게 이런 연극발표회 기회를 주어서 서툰 연기지만 지도해 주시고 공연까지 하게 해주신 시립복지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발표회에 참가한 노인 한 분은 쑥스러워 하면서도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공연을 관람한 노인들도 좋은 발표회를 구경하게 해주어 고맙다고 한다.
이번 연극공연에 참가한 노인들은 대부분 70세 전후의 나이든 분들이었습니다. 또 대부분 연극이나 연기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노인들이라고 합니다 “참 힘들었지요. 연기야 어차피 아마추어들이니까 그렇다 쳐도, 대사를 외우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김진사 부인역을 맡았던 71세 최철순 할머니의 말입니다. “모두들 참 열심히 연습했지요. 대본을 외우는 일이 제일 힘들었지만 연기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요?” “연출을 맡아 지도해준 이승희 선생의 열정이 대단했지요, 그리고 오늘 공연할 때 배경음악과 노래의 반주까지 모두 생음악으로 도맡아 수고해준 복지관 오희무 선생이 참 고맙네요” 해설과 동림악극단 사회자역을 맡았던 서진석(65)씨의 말입니다.
출연자들은 모두 이곳 서울시립동대문복지관 회원들로서 순이역에 이명옥, 고복구역에 서진석, 가네야마(박순호)역에 박수재, 김진사역에 안국순, 유씨부인역에 최철순, 할멈역에 황보임영, 이철민역에 홍수자, 홍도역에 김성순, 달래역에 임선자, 악극단장역에 박교숙, 금옥역에 김금옥, 막잡이역에 유정숙씨 등이 열연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특히 할멈 역을 맡은 황보임영 할머니는 올해 79세의 고령이어서 놀라웠다. 극중 남성역할을 남성참여자가 부족하여 할머니들이 대신하게 된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연극발표회 주제처럼 ‘위풍당당 행복한 연극반’의 연기력 넘치는 멋진 공연 ‘꿈에 본 내 고향’에 출연한 모든 노인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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