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수 없는 한가위
내손안에서울
발행일 2004.09.23. 00:00
시민기자 김영진 | |
음력 팔월 대보름의 달은 둥글고 밝다. 그 밝고 둥근 달 만큼이나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한가위. 우리는 그날을 추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8남매의 장남이신 친정아버지, 지금은 팔순을 훨씬 넘기시어 이제 9순을 바라보시는 아버지께선 딸만 넷을
두셨다. 그러던 추석 명절은 언니들이 하나둘 결혼을 하면서부터는 명절이 찾아와도 일할 며느리 하나 없는 엄마를 도와 결혼한 언니들의 방문을 위한 음식준비를 해야 하는 그런 날로 변하기 시작했다. 다소 늦은 결혼과 함께 추석이 오면 이제 나도 시집엘 다녀와서야 엄마를 도와드릴 수 있는 시간을 낼 수
있었고 남들은 친정에 가면 새언니가 차려주는 점심상도 받아본다는데 막내인 나는 시집에 다녀오기가 무섭게 친정에 가서 나이 드신 엄마를
도와드려야 하는 이중의 바쁜 날들이 되어버렸다. 결혼하여 10여년쯤 되는 어느 해의 추석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것으로 무엇을 사면 좋을까 한참을 궁리해보았지만 썩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사를 지내고 친정에 가려고 형제들과 헤어져 차에 오르려는데 바로 밑의 시동생이 “형수님 잠깐만요”하며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집에 가실 때 뭐라도 사가세요.”하며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미는게 아닌가. 남편의 사업도 어렵고 해서 형편이 좋지 못했을 것은 알고 있었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순간 나는 너무 당황해서 선뜻 받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서 가라며 차안으로 떠민다. 나는 변변하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채
차에 올랐다. 그날 오후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복숭아와 엄마가 필요하실만한 것 몇 가지를 사가지고 친정에 들러보니 나이 드신 엄마가 딸들 오면 차려줄 음식들을 챙기시느라 그야말로 혼자 땀을 뻘뻘 흘리시고 있었다. 당시 엄마의 연세가 어느덧 칠순이 훨씬 넘어계시던 때인데도 당신 손수 살림을 하시다보니 시집에 먼저 들러 찾아올 딸, 사위, 손주들 챙기시는 손길 하나하나 모두 엄마의 차지였고, 그나마 몇 시간이라도 가까운 내가 먼저 달려가, 오히려 시집에서는 아랫동서들 있어 느긋했던 내가 두 손 걷어붙이고 안부는 뒷전이고 일부터 해야 했다. 그날도 가보니 녹두 부침을 하신다고 여기저기 잔뜩 늘어놓으시고는 마음만 바쁘시지 빨리 일도 못하시다보니
아직 부쳐야할 분량이 가득 남아 있었다. 다행히 저녁이 되자 한의대를 나온 조카가 도착해서 우선 화기부터 빼야한다며 침으로도 화기를 빼는 방법이 있다고 다리 여기저기에 침을 놓아주는 것이었다. 녹두부침 부치다가 그만 화상을 입은 모양새도 모양새였지만 침까지 맞고 누워있으니 사람 사는 것이 쉬운 일이 하나도 없지 싶었다. 다음날 집에 돌아와 그 후 상처가 아물 때까지 십여일을 고생하며 지내야 했지만 내손으로 엄마를 도와 언니들 친정 왔다 가는데 엄마 마음 섭섭하지 않으시게 음식도 싸줄 수 있었으니 화상 입은 것쯤이야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이 드셔 더 이상 두 분만 사실 수 없다며 작년겨울 큰 형부께서 당신 집으로 모셨으니 이제
언니집이 친정이 된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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