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을 만나다

시민기자 박분

발행일 2018.02.22. 17:33

수정일 2018.02.26. 18:11

조회 1,238

중명전 전경.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중명전 전경.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덕수궁-지도에서 보기

서울 5대 궁궐 중 하나인 덕수궁을 찾아갔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앞에서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자 시민들과 함께 외국 관광객들도 삼삼오오 모여 들기 시작했다.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이 시작된 것이다.

취타대의 음악과 함께 전통 복식을 갖춰 입은 대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수문장 교대식을 보여준다. ‘서울 관광 1번지’로 알려질 만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은 오전 11시, 오후 2시, 3시로, 하루 3회 진행된다.
덕수궁은 처음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을 뿐, 원래 궁은 아니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파괴됐을 때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경운궁이라 불리게 됐다. 경운궁이 궁궐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 때는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옮겨 오면서부터다.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고종은 중화전을 비롯하여 함녕전, 준명전 등 많은 전각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개화 이후 물밀 듯이 들어온 서구 열강들의 이권다툼이 치열했고 정국 또한 혼란스러운 때 고종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흥천사명 동종(가운데)과 자격루(오른쪽), 화살발사대인 신기전(왼쪽)이 전시된 덕수궁 광명문

흥천사명 동종(가운데)과 자격루(오른쪽), 화살발사대인 신기전(왼쪽)이 전시된 덕수궁 광명문

대한문을 지나 줄곧 걷다보면 ‘광명문(光明門)’이란 현판이 걸린 문이 보인다. 이곳에는 물시계인 자격루(국보 제229호)와 흥천사명 동종(보물 제1460호), 화살발사대인 신기전이 전시돼 있어 전시물만을 보고 훌쩍 지나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광명문 역시 일제치하의 슬픈 역사가 담겨있는 역사유적이다. 본래 덕수궁 광명문은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의 남쪽 문이었다. 1938년 일제가 석조전에 미술관을 개관하면서 광명문을 엉뚱한 곳으로 옮겨놓고 유물을 전시하며 왕이 드나드는 문의 격을 낮춘 것이다. 올해에 광명문이 원래 있던 제자리로 80년 만에 돌아온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앞마당에 품계석을 일렬로 세운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이뤄졌던 곳이다. 중화전 뒤편으로 준명당과 즉조당, 석어당이 배치돼 있고 동편으로 함녕전, 덕홍전이 잇따른다.

이 중 단청을 입히지 않은 무채색의 석어당은 유독 눈에 띈다. 목조 2층집인 이 전각은 임진왜란으로 피난 갔던 선조가 한양에 돌아와 임시로 거처했던 곳으로 인조와 광해군이 즉위한 곳인 즉조당과 함께 덕수궁에서 가장 유서가 깊은 곳이다.

석어당에서 덕홍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기다란 꽃담이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고종이 딸인 덕혜옹주를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문에는 봉황과 용을 새겼고 담벼락에는 꽃송이를 담고 있는 꽃담을 보며 애지중지 키운 딸을 아끼는 아비의 마음이 읽혀져 가슴이 뭉클해진다.

담장이 있는 울안에 나란히 선 두 채의 전각은 고종의 편전인 함녕전과 귀빈을 접대하는 장소로 사용된 덕홍전이다. 외세에 굴하지 않고 덕수궁에서 조선을 일으켜 세우려 안간힘을 썼지만 고종의 의지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결국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불리게 된 때도 이때부터다.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경운궁에 남게 될 고종의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德壽)’라는 궁호를 올린 것이 궁궐의 이름이 된 까닭이다. 왕위에서 물러난 고종은 13년 동안 함녕전에서 지내다 1919년 끝내 이곳에서 승하했다. 일제 강압에 의한 양위였으며 독살설 또한 파다했기에 함녕전은 대한제국과 황제 고종의 한이 서린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웅장한 모습의 덕수궁 석조전

웅장한 모습의 덕수궁 석조전

덕수궁은 다른 궁궐과 달리 석조전과 정관헌 등 서양식 건물을 품고 있음이 큰 특징이다. 조선의 궁궐에 전통 목조 건축물이 아닌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선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얼마나 획기적인 일이었을까?

정관헌(靜觀軒)은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지닌 고종의 휴식공간이었다.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혼돈의 시기에 이곳에서 깊은 시름에 잠겼을 고종의 모습과 한편으로는 좋아했던 커피를 들며 음악을 즐겼을 고종의 망중한도 함께 그려본다.

덕수궁 서쪽에 우뚝 선 건축물은 덕수궁의 역사를 한 눈에 대변해 주는 르네상스 양식의 석조전이다. 1900년에 착공하여 11년 만에 준공한 이 서양식 건물은 둥근 기둥이 늘어선 모습이 화려하고 웅장하다. 석조전은 고종이 승하한 후 덕수궁이 빠르게 훼손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 뒤늦게 복원돼 2014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덕수궁 북서쪽의 오솔길로 난 쪽문을 통해 덕수궁을 나오면 호젓한 돌담길과 마주한다. 바로 지난해 새로 개방한 영국대사관 옆 덕수궁 돌담길이다. 100m 구간의 돌담길은 담장이 낮아 첫걸음인데도 친근하게 느껴졌다. 외지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쉬어갈 의자도 있고 옛 정동길의 정취가 어린 사진도 올망졸망 전시돼 있어 골목길은 한결 아늑해 보였다. 왜 인적이 뜸한지를 곧 알게 됐다. 영국대사관의 철문으로 가로 막혀 있어 길이 뚝 끊어졌기 때문이다. 짧은 길이 아쉽지만 영국대사관 소유의 아직 뚫리지 않은 70m의 돌담길도 곧 마저 열려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서울시는 3월부터 개방된 구간 끝에 신규 협문 매표소를 신설할 계획이라고 한다.

외국대사관과 근대교육기관들이 학교가 밀집한 정동길에는 유서 깊은 역사 현장이 또 한 곳 있다. 붉은 벽돌집 형태의 서양식 2층 건물인 중명전이다. 이곳은 1905년, 이토 히로부미를 앞세운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었던 비운(悲運)의 장소이기도 하다. 중명전은 1901년 지어진 황실도서관으로 처음 이름은 ‘수옥헌’이었다. 1904년 덕수궁의 화재로 주요 전각들이 불타자 수옥헌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황제는 이곳에서 집무를 보고 외국사절도 접견했다. 수옥헌에서 중명전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06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명전 또한 궁궐의 전각들 못잖은 일제의 시달림을 겪어야 했다. 외국인에게 임대되고 용도와 건물주가 수시로 바뀌었다. 구한말 역사의 생생한 현장인 중명전은 2010년에 복원돼 일반에 개방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강행하는 당시의 회의장을 재현한 중명전의 전시실 모습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강행하는 당시의 회의장을 재현한 중명전의 전시실 모습

덕수궁-지도에서 보기

마침 이곳 2층에서는 중명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뜻 깊은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내린 칙명을 비롯해 김구 선생의 기개가 담겨진 친필본,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 열사의 유묵 등 역사적 가치가 높은 근대 유물 40여 점을 공개하는 특별전이다. 중명전에는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살벌한 회의장을 재현한 전시실도 있어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강행하는 당시의 긴박했던 순간을 체감하게 된다. 대한제국을 돌이켜보는 이 특별전은 3월 2일까지이며 월요일엔 휴관한다.

덕수궁 후문을 지나면 덕수궁 돌담길은 예술의 향이 진한 정동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덕수궁이 있는 정동일대에는 외국 공관들도 많고 정동극장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정동제일교회 등 둘러볼 곳이 많다. 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내리면 바로 옆이 덕수궁이라 찾기도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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