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 '살곶이 다리'

시민기자 김종성

발행일 2017.04.05. 16:52

수정일 2017.04.0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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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서 내려 살곶이 다리 위를 걷는 시민 ⓒ김종성

자전거에서 내려 살곶이 다리 위를 걷는 시민

자전거를 타고 서울 한강가를 달리다보면 동네마다 연결돼 있는 한강다리를 지나게 된다. 기자가 생각하기에 한강의 여러 다리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다리는 성수동과 행당동의 경계에 있는 ‘살곶이 다리(성동구 행당동 58)’가 아닐까 싶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의 이 돌다리는 지금도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서울 최고(最古)의 다리이기도 하다.

완공 당시 성종은 다리가 평지처럼 탄탄하다하여 `제반교`라 불렀다. ⓒ김종성

완공 당시 성종은 다리가 평지처럼 탄탄하다하여 `제반교`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살곶이 다리는 길이 76m, 폭 6m로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긴 다리였다. 현재는 보행로 설치로 서북쪽 일부분이 매몰되어 길이가 약 62.9m인 상태이다.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12월 보물 제1738호로 승격되었다. 난간이 없는 단순한 구조지만 돌다리(장석판교, 長石板橋) 특유의 우직하고 질박한 정감이 느껴진다.

‘살곶이’는 ‘화살이 꽂힌 자리’라는 뜻이다. 원래 이름은 ‘살꽂이 다리’였는데, 어감이 거세서 살곶이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는 살곶이 다리의 한자인 ‘전관교(箭串橋)’로 표기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다시 순수 우리말로 표기되어 있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서 보면 더욱 색다르게 느껴진다. ⓒ김종성

다리 아래로 내려가서 보면 더욱 색다르게 느껴진다.

1972년 서울시에서 살곶이 다리의 훼손된 부분을 보수하면서 일제가 발라놓은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복원하였다. 하지만 원형 그대로 복구되지는 못했다. 현재 행당동 방향의 다리 반쪽만 원래 모습을 가지고 있다. 현재는 동쪽으로 증설된 다리가 이어져 동서로 왕래가 가능하여 둔치를 찾는 인근 시민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다리를 떠받치는 64개의 둔중하고 정감 가는 돌기둥 ⓒ김종성

다리를 떠받치는 64개의 둔중하고 정감 가는 돌기둥

살곶이 다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흐르는 강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꼴로 다듬은 둔중하고 정감 가는 64개의 돌기둥이다. 물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 돌기둥에 무수한 흠집을 새겨 놓은 조상들의 친환경 지혜가 놀랍다. 다리를 지나는 시민들은 돌다리가 다칠세라 자전거에서 꼭 내려서 건넌다.

세종 때 공사 시작해 63년 만인 성종 때 완공한 다리

조선을 건립한 태조 이성계는 무려 30년간 중화 격식에 맞춰 궁궐과 종묘를 짓는 일에만 집중하였다. 그는 백성들을 위한 길도 닦지 않았고, 여름이면 장마로 홍수가 나는 하천에 둑도 제방도 쌓지 않았다. 세종 때가 되서야 만들기 시작한 살곶이 다리는 처음엔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만들기 시작하였다. 1420년(세종 2년) 처음 짓기 시작했지만, 63년만인 1483년(성종 14년)에야 완공한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겼는데, 강 건너 낙천정(樂天亭)과 풍양이궁(豊壤離宮)에 수시로 행차하였다. 이때 강을 건너야 하는 수행 중신들의 고충이 심해지자, 태종은 다리공사를 명하였다. 하지만 기술부족과 홍수 등의 이유로 공사는 더디게 진행됐고, 마침내 성종 14년(1483년) 조선시대 가장 긴 다리가 완성된다.

이 다리를 만들 때 태종이 몸소 현장에 나와 공사를 지휘하였다고 한다. 한낱 다리 공사에 왕이 나선 까닭은 다리의 이름과 다리가 자리했던 곳의 지명에 ‘살곶이’라고 불리게 된 사연과 연관이 있다.

조선 초기인 1398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형제들을 죽이는 ‘왕자의 난’이 벌어졌다. 속이 상할 대로 상한 이성계는 함흥으로 떠나 은거하게 된다. 태종이 된 아들 이방원이 아버지를 달래기 위해 사자들을 보냈으나 죽이거나 가두어 다시 돌려보내지 않아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되기도 하였다.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했을 때, 이에 반발한 유생들이 개성 두문동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결국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 태조 이성계를 맞으러 나온 태종이 있었던 곳이 바로 ‘살곶이 다리’ 자리이다. 이성계는 분노를 가득 담아 화살 하나를 날렸지만 태종은 차양을 세우기 위해 세워둔 기둥 뒤로 숨어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이 화살이 떨어져 꽂인 곳을 ‘살꽂이벌(箭串坪)’이라 불렀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사연이 너무 극적이고 살벌해서였을까. 그 후로 다리가 완공되었을 때 지어진 공식 명칭 ‘제반교(濟盤橋)’에서 ‘살곶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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