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보다 사람을 배려하는 깨알 같은 도시설계
정석
발행일 2016.07.19. 16:35

강남구 율현초등학교 앞 교차로 들어올리기
정석 교수의 서울 곁으로 (18) 도시설계의 디테일
- 도시의 바닥을 보면 그 도시 수준을 알 수 있다
분당수서고속도로 수서 IC 진입구는 아침마다 난리였다. 고속도로로 진입하려는 차들은 많은데 진입차선은 하나여서 늘 끼어들기로 북새통을 이루던 곳이다. 오죽 바쁘면 저럴까 하며 너그럽게 끼워주는 운전자도 있지만,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끝까지 막아내는 운전자도 있어 늘 싸움터 같았다. 골치 아픈 구간이었다.
그런데 변했다. 올해 초에 진입차로를 하나 더 만들어 2개 차선으로 늘려준 것이다. 두 차선으로 와서 진입구 앞에서 한 대씩 교대로 진입하게 해준 뒤로 아주 차분해졌다. 순서대로 진입하게 하니 훨씬 더 편안해졌다. 교통의 디테일과 섬세한 도시설계는 이처럼 불필요한 갈등과 스트레스를 줄여 사람들의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준다.
지난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외식을 하러 외출을 했다. 강남구 율현동 방죽마을 우리 동네를 나와 길 건너 율현초등학교 앞 식당에 가다가 섬세한 도로설계에 눈길이 갔다. 사거리 교차로 전체가 보도와 같은 높이로 들어 올려 있었다. 교차로 들어올리기(raised junction)였다. 교차로 전체의 바닥높이를 보도와 같은 높이로 들어 올리는 자동차 길들이기(traffic calming) 기법의 하나다.
보통의 교차로를 건널 때 보행자는 보도에서 차도로 내려와 길을 건넌 뒤 다시 보도로 올라가야 한다. 횡단보도 부분 턱을 없애기 위한 연석 턱낮추기(curb cutting)로 인해 보도에 경사가 생기고 평탄성을 잃게 되는데 반해, 교차로 들어올리기는 보행자의 편의도 배려하고 보도 평탄성도 지켜준다.
차보다 사람을 배려하는 도시설계의 디테일은 아주 깨알같이 많다. 횡단보도의 높이도 보도 높이로 들어 올릴 수 있다. 험프형 횡단보도(humped crossing)라고 불리는 이런 횡단보도에서 보행자는 물론 유모차나 휠체어도 아주 편안하게 길을 건널 수 있다. 연석 턱낮추기를 안 해도 되니 보도 또한 평탄해져 일거양득이다.
횡단보도가 위치한 곳의 차도 폭을 조금 줄여줘도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도로의 폭이 좁아져 운전자들은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이게 되고, 길을 건너는 보행자들은 횡단거리가 짧아져 편리하게 길을 건널 수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차도를 줄여 생긴 포켓공간에서 대기하게 되니 보도가 넓어지는 효과도 생기고, 포켓공간에서 대기하는 보행자와 운전자의 시야도 훨씬 좋아져 사고를 예방할 수 있게 해준다.
꼭 큰 것들이 좋은 도시를 만드는 건 아니다. 이처럼 작은 것들이 좋은 도시를 만든다. 요즘처럼 비가 많이 오는 여름 날 거리를 유심히 관찰하면 보도디자인의 수준을 쉽게 알 수 있다. 보도는 평탄해야 하지만 빗물이 고이지 않을 정도의 경사가 있어야 하고,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보행구간은 어디든 빗물에 잠기지 않도록 배수가 잘 되어야 한다. 비오는 날 길을 걷다보면 그렇지 않은 곳을 많이 만나게 된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보도까지 걸어 나오는 길이 물에 흥건히 잠겨 있는 경우도 많다.
방학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보면 우리 도시들의 디테일과 배려 수준을 한눈에 알아채게 된다. 박물관 주차장에서 박물관까지 가는 길에 비와 햇볕을 막아주는 가리개 하나 없는 곳이 태반이다. 땡볕 아래 한참을 걷다보면 배려 받지 못한 느낌에 화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비라도 오는 날엔 우산까지 챙겨드느라 정말 힘이 든다.
일본의 도쿄 인근 신도시 타마뉴타운에 위치한 수도대학 도쿄 캠퍼스는 비오는 날 우산을 받지 않아도 되도록 처음부터 세심한 배려로 캠퍼스를 설계하였다. 역에서 내려 대학구내로 들어오면 지붕이 있는 보행자 통로가 대학 이곳저곳을 연결해주고, 건물의 저층부에도 아케이드를 만들어 비바람과 햇볕을 피할 수 있게 했다.

스페인 루고의 보도(배수를 위해 길 가운데를 살짝 낮게 처리)
어느 도시의 도시설계 수준을 가늠해보고 싶다면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 도시의 바닥을 유심히 살피면 된다. 도시의 바닥에 그 도시의 수준이 담겨있다. 보도는 평탄한지, 눈비가 와도 미끄럽지 않은지, 물이 고여 웅덩이가 생기지 않게 배수는 잘 되는지 보면 알 수 있다.
겉은 화려한 데 기본이 허술한 도시들도 많다. 겉모습은 소박해 보여도 기본이 아주 탄탄한 도시들도 있다. 지난해 방문했던 스페인의 성곽도시 루고(Lugo)도 그런 도시다. 기본이 짱짱한 도시다. 빗물이 잘 흐르라고 길 가운데가 살짝 내려가 있다. 포장재는 미끄럽지 않으면서 평탄하다. 불쑥 튀어나온 곳도, 푹 꺼진 곳도 없다.
차도와 보도의 배분, 경계부의 처리, 횡단보도의 유무와 간격과 디테일도 도시의 기본을 잘 보여준다. 사람을 섬기는 도시인지, 차를 섬기는 도시인지. 길과 건물이 만나는 부분도 유심히 보면 알 수 있다. 그 도시가 자상한 도시인지, 거친 도시인지. 길바닥에 올려놓은 각종 시설물들의 위치와 크기와 형태도 도시설계의 요소들이다.
조금 더 볼 게 있다. 평탄하지 않은 지형 위에 건물이나 장소를 어떻게 올리고 마무리 했는지까지 본다면 그 도시를 만든 장인들의 솜씨와 맵시를 가늠할 수 있다. 도시의 겉만 볼 게 아니다. 속을 봐야 그 도시를 알 수 있다. 도시의 바닥에, 소소한 것들에 그 도시의 수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디테일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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