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안식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석

발행일 2016.02.16. 15:35

수정일 2016.02.16. 17:23

조회 1,909

세배ⓒ연합뉴스

정석 교수의 ‘서울 곁으로’ (9) 고향 곁으로, 부모 곁으로

우리 어머니는 종종 희한한 제도를 뚝딱 만들어 시행하신다. 아들 넷, 사위 하나가 모두 골초인 걸 보고 <금연포상금제도>를 창안하시어 몇 년 안에 완전 금연가족을 만드셨다. 담배를 끊는 자식에게 거금의 포상금을 주고, 만약 금연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피면 포상금의 두 배를 물게 하셨다. 제일 먼저 금연포상금 제도에 뛰어든 건 나였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2002년 12월 8일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 날 한동네 이웃 세 가족이 강원도 어느 스키장에 놀러갔다. 당시 연구원에 다니던 내가 가장 늦게 합류했는데 바쁜 일들로 경황이 없어 아내를 위한 결혼기념일 선물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밤 깊을 무렵 술도 한잔 한 김에 나는 즉석에서 마련한 선물 두 가지를 아내에게 건넸다. 둘 다 물건이 아닌 약속이었다. 하나는 내일 아침 온 세상을 하얗게 칠해주겠다는 약속이었고 또 하나는 금연 약속이었다. 약속대로 밤새 엄청난 눈이 내려 하얀 세상이 되었고, 그날 이후 난 고3때부터 20년 넘게 절친 관계를 이어온 담배 친구와의 관계를 딱 끊어버렸다.

금연 시작을 알렸더니 어머니는 가족들 다 모인 가운데 포상금의 십분의 일을 착수금으로 건네주셨고 아내도 내게 따로 격려금을 주었다. 어기면 두 배로 갚아야 하는 조건부 돈들이었다. 마침내 금연 3년째 되던 날 어머니는 다시 온 가족을 모은 뒤 나머지 잔금을 약속대로 주셨다. 둘째인 나의 금연 시작과 착수금 받는 걸 지켜본 뒤로 요지부동이던 형제들도 마음이 흔들렸는지, 형이 나 다음으로 금연대열에 합류했고 나머지 두 동생들도 이어서 금연에 동참했다. 매제가 제일 늦게까지 버티다가 담배를 끊었고 2010년 말에 금연포상금을 받아 뉴질랜드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제도 시행 8년 만에 온 가족이 금연가족이 된 것이다.

거금의 두 배를 갚을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인지 지금까지 누구도 약속을 깨지 않았고 위약금도 물지 않았다. 상당한 금액의 포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머니는 누군가 금연을 시작하면 그 앞으로 3년짜리 적금을 드셨다. 그 바람에 아버지께서 엄한 불똥을 맞으셨다. 포상금 받고 좋아하는 아들에게 아버지께서 그러셨다. “너희들 포상금 마련한다고 네 어머니 긴축재정에 절약절약 하는 바람에 내가 아주 생고생을 했다는 걸 잊지 마라.”

어머니가 창안하여 시행하신 또 하나의 아이디어는 <며느리안식년제도>다. 넷이나 되는 며느리들을 한해씩 돌아가며 명절날 친정에 보내시더니 올해 설에는 모든 며느리들을 다 친정에 보내셨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자비의 희년을 선포한 걸 기념하는 특별 이벤트가 아니고 어머니 나름의 속뜻 깊은 배려였다. 요즘 형수님 부모님도 그렇고 우리 장인어르신도 건강이 썩 좋지 않으시니, 시댁에 와 일하면서 마음은 친정에 가있을 며느리들 해방도 시키고 당신들도 번잡하지 않은 조용한 명절 보내고 싶다는 이중포석이었다.

덕분에 모처럼 설 전날 처가에 가서 설 이튿날 새벽까지 꼬박 처가에서 보냈다. 장가가고 처음 있는 일 같다. 작년 내내 병원 오가며 아슬아슬 하시던 장인어른과 맥주도 한잔 하고 장모님 부스스한 헤어도 곱게 빗어드렸다. 집에서 잘 하지 않던 물걸레 청소도 했고 아내와 둘이 마주 앉아 동그랑땡과 녹두빈대떡에 생선전 김치전까지 맛나게 부쳤다. 새 가정을 꾸린 작은처남과 둘이 기타를 치면서 아이들 데리고 새벽까지 놀았다. 젊고 예쁜 처남댁과 네 살 박이 조카까지 가족이 늘다보니 전에 없던 생기가 집안에 가득했다.

“아버지 회갑 때 우리 정서방이 뭐 불렀더라? 옥경이였나? 그 노래 한번 듣고 싶네.” 장모님 부탁을 거절할 사위가 아니다. “넵, 어머니! 자, 갑니다~. 희미한 불빛 아아래~~” 내가 가수 태진아씨 처럼 까딱까딱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니 아내가 옆에 와서 춤을 춘다. 처남도 벌떡 일어나 춤을 추니 아빠 따라 어린 조카도 곁에 서서 함께 몸을 흔든다. 그렇게 흥겹게 노는 중간에 장모님께서 내 곁에 와 앉으신다. “정서방, 자네 어머니 덕에 참 특별한 설을 보냈네. 부족함이 하나 없이 아주 꽉 찬 느낌이네. 고맙네. 우리 사위” 소녀처럼 고운 얼굴의 우리 장모님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힌다.

설 전날 저녁 무렵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설 전날인데 뭐하셔요?” “느그 아버지랑 둘이 테레비 본다.” “썰렁허니 거시기하지 않으셔요?” “하나도 안 거시기허다. 오전에 느그 형수가 와서 전도 부치고 떡국도 끓여 같이 먹고 갔다. 내일 아침에는 제주도 처가에 못 내려간 원이가 와서 집에 데꼬 간다드라. 모처럼 처갓집 식구들이랑 모였을 터이니 재미지게 놀거라. 장인어른 장모님한테 잘 허고. 우리 걱정은 하덜덜 말고.”

“근데요, 내가 페이스북에 울 오마니의 <며느리안식년제도> 시행 소식을 써서 올렸더니 여기저기 칭찬의 글들이 난리가 아니네요. 대한민국 최고의 시어머니래요. 국가의 법으로 제도화 하자네요. 어쩌면 좋대요?” “그러냐? 알겄다. 그런디 말이다. 글 올릴 때 내 사진도 함께 올렸냐?” “사진요? 아니요.”

이튿날 페이스북에 아버지 어머니 사진을 올려드리고 다시 아뢰었다. “어머니, 사진도 올렸사와요. 어머니 인상 좋으시다고, 아버지도 핸섬하시다고 더 난리네요.” “허, 머 한다고 사진까지 올리고 그랬다냐...”

어머니께서 며느리들 배려해서 시행하신 <며느리안식년제도> 덕에 전혀 다른 설 명절을 보냈다. 팔순 넘으신 장모님이 혼자 제사음식 준비하시는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대가족이 모여 북적이는 우리 집 설맞이가 영 미안하고 짠했었는데 하루 전날 가서 장모님 도와드릴 수 있어 좋았다. 설날까지 꼬박 이틀을 처가 식구들과 함께 꽉 채운 명절을 보낼 수 있어서 특별했다. 친정에서 설을 맞고 보낸 우리 집 며느리들 이번 설에 조금은 더 행복했을 것 같다. 대한민국 며느리들이 명절을 보낼 때 다들 행복하면 좋겠다. 며느리가 행복해야 온 집안이 무탈할 테니까. 며느리가 행복해야 대한민국도 더욱 따뜻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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