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을 수놓던 老화가

최경

발행일 2016.02.11. 16:29

수정일 2016.02.11. 16:39

조회 1,330

돌담길에 전시된 故조용준 화백의 작품 ⓒ홍성웅

돌담길에 전시된 故조용준 화백의 작품

방송작가 최경의 ‘사람기억, 세상풍경’ (12)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 사라지고 나서야, 새삼 그립고 소중해질 때가 있다. 덕수궁 돌담길에 몇 년 동안 매일 죽 늘어서있던 그림들이 그랬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돌담길을 걸어 출퇴근하는 직장인들과 근처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겐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돌담길의 일부였는데 어느 날 부턴가 거리 미술관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돌담길에 기대어 그림 수십 점을 전시해놓는 이는 근처 벤치에서 이젤을 펼쳐놓고 주로 덕수궁 돌담길의 사계를 비롯한 풍경화를 그리던 화가 할아버지였다. 평소엔 있는 듯 없는 듯한 거리의 화가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정작 안계시고 보니, 화가 할아버지가 펼쳐놓았던 운치 있는 모습을 많은 이들이 그리워하고 아쉬워했다.

해외관광객들이 필수코스로 찾는 덕수궁 돌담길이기에 노화가가 함께하는 풍경은 외국인들에게도 서울이라는 도시의 인상을 낭만적으로 만드는데 한 몫을 했다. 사람들은 노화가가 왜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두신 건지 언제쯤이면 활동을 재개하실지 궁금해 했다.

주변 상인들과 건물 경비원들은 화가 할아버지가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의 매일 거르지 않고 아침이면 돌담길로 출근을 했고, 저녁이면 그림을 거둬들여 한 상점의 창고에 그림을 맡긴 뒤 퇴근을 했다고들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멀리 경기도의 한 도시에서부터 지하철을 타고 2시간이 넘는 길을 오간다고 했다. 수소문을 통해 제작진은 노화가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를 만나면 묻고 싶은 것도, 전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다. 많은 이들이 노화가의 근황을 궁금해 하고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궁금했다.

취재진을 맞은 건, 노화가의 아내와 딸이었다. 집안 곳곳엔 할아버지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금방이라도 덕수궁으로 향하시려는 듯, 이젤과 화구 그리고 낡은 가방엔 미완성 그림이 들어 있었다.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두 달 전,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갑자기 암 진단을 받은 뒤, 꼬박 석 달을 병원에서 보내다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입원해 있으면서도 당신은 그렇게 쉽게 가실 줄 몰랐어요. 얼른 일어나서 덕수궁에 나갈 거라고, 항상 그랬거든요. 금방 일어날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하셨어요.”

77세의 조용준 화백.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 없는 할아버지는 젊어서는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이었고, 말년엔 그저 그림이 좋아 캔버스 앞에 앉았다고 했다. 그가 돌담길에서 그림을 그린 기간은 5년.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을 상징하는 거리의 화가들처럼 서울의 덕수궁 돌담길도 그렇게 예술이 숨 쉬는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할아버지. 누구나 추억 하나쯤 간직하고 있는 덕수궁 돌담길에서 당신 스스로 많은 이들에게 추억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취재를 통해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가진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예술가의 꿈을 키우던 젊은 연주자는 지나치는 사람들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때, 할아버지가 먼저 다가와 악기통에 천 원짜리 한 장을 넣어주며, 예술의 길은 멀지만 용기를 잃지 말라며 위로해줬다고 했다. 또 어떤 중년의 여인은 삶이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정처 없이 걸어 다니다 돌담길 근처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노화가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고 한다.

“정말 삶을 포기하고 싶던 막바지였어요. 아무 생각 없이 풀썩 그곳에 앉아있었는데 할아버지가 한참 저를 쳐다보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많이 힘들어 보인다면서 그림 한 점을 주시더라고요.”

그것은 노화가가 직접 그린 해바라기 그림이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받지 못하던 인생의 가장 절박했던 순간, 조용준 할아버지의 그림이 그녀를 다시 살게 만들었다고 했다.

노화가가 거리에서 그림을 그렸던 5년은 허투루 흘러간 시간이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위로가 되고 추억이 되고 즐거움이 돼주었던 것이다.

생전에 뵙지 못한 노화가를 위해 제작진은 마지막으로 그의 유작들을 다시 덕수궁 돌담길에 전시했다. 비록 하루 동안의 짧은 전시회였지만 기다렸던 사람들이 반가워하며 그림들을 감상했고, 할아버지를 추모했다. 덕수궁 돌담길의 명물 조용준 화백은 영원히 그곳을 떠났지만, 그래도 추억은 남을 것이다.

그리고 새삼 궁금해진다. 나는 누군가에게 추억이 되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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