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해 살면 그런 용기 낼 수 있을까?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5.11.20 13:54

수정일 2015.11.2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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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정선화

겁쟁이는 실제로 죽기 전에 여러 번 죽지.
하지만 용감한 자는 죽음의 맛을 오직 한 번만 볼 뿐이야.
--셰익스피어 《줄리어스 시저》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100

나이가 가르쳐준 교훈 중 하나는, 경사(慶事)는 다 챙기지 못하더라도 조사(弔事)는 되도록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쁨도 진심으로 같이 나누기 만만찮은 것이지만 슬픔이야말로 같이 나눌 필요가 간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H언니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게 염치가 과한 H언니가 가까운 친구들에게조차 먼 길 오는 일이 폐가 된다며 가족끼리 장례를 치러버렸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전해 듣고 미안함과 섭섭함이 뒤엉킨 채 펄펄 뛰었지만 상주의 의지가 강하니 초대받지 않은 문상객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호상(好喪)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1914년생으로, 백수를 이태나 넘겨 102세까지 사셨다. 그리 연로하시면서도 병치레를 하지 않았고 제주도의 풍속대로 자식과 같은 대문을 쓰면서도 부엌을 따로 써서 끼니를 손수 해결하셨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식에게 대소변 한번 받아내게 하지 않았으니, 조쌀하기가 어지간한 양반이었다. 그 아버지의 그 딸, H언니가 누굴 닮았겠는가?

하지만 호상이라고 말하려니 가슴이 애절하고 우릿하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곡기를 끊으셨다. 102살이면 살 만큼 살았다고, 더 이상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다고 스스로 떠나기를 결정하신 것이었다. 아무도 말릴 수 없었고 강제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꼭 닮은 자식들은 그저 조용히 사위어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 마지막을 결정하고 떠나는 분을 나는 꼭 세 번 보았다. 나머지 두 분은 투병 중 회복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치료를 중단하고 주변을 정리한 뒤 곡기를 끊으셨다. 세 분 모두 살아생전 대단히 강강했던 분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하고 얌전했으며 섬세하게 주변을 돌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분들이 마지막 순간에 누구보다 단호했다. 삶에 대한 미련이 없어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뛰어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으리라.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듯 보통의 존재는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떠나기 어렵다. 흔히 ‘자살’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의지에 의한 삶의 마감은 비극적인 빛깔을 띠기 마련이다. 중세시대에 자살은 ‘자기 살해’의 죄를 저질렀다고 판단되었기에 판관들은 자살자의 시신을 다시 교수대에 매달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본 세 분의 죽음은 아무래도 ‘자살’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마지막 자존을 지켜내겠노라는 가장 인간적인 의지의 발현에 다름 아니었으므로.

죽음은 어차피 모든 인간에게 예정된 결말임에도,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누군가는 두려움으로 여러 번 죽는다. 그런 공포는 제대로 된 삶을, 후회도 미련도 없는 삶을 불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누군가 용기 있는 자는 딱 한 번 죽는다. 최선을 다해 살면, 후회도 미련도 없이 살면, 과연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