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그래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최순욱
발행일 2015.10.07. 15:45

18세기 아이슬란드 필사본. 높은 자와 똑같이 높은 자, 세 번째 높은 자에게 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길피를 볼 수 있다.
신화는 ‘그래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최순욱 작가. 매주 수요일, 그의 칼럼을 통해 ‘그래서’를 확인할 수 있게 됐습니다. 최근 신화 관련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면서 많이 친숙해졌다고는 하나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의 칼럼명에 ‘여행’이라는 말이 붙는 것도 이 때문인데요, 어려운 신화를 좀 더 편안하고 친숙하게 만났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죠. 그럼, 이제부터 그 신비로운 여정 속으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
최순욱과 함께 떠나는 신화여행 (1) 신화 : 고대인의 믿음과 사고에 대한 즐거운 탐험
옛 스웨덴에 길피(Gilfy)라고 하는 훌륭한 왕이 살았다. 그는 종종 민심을 살피려 변장을 하고 암행에 나서곤 했다. 어느 날, 평소처럼 암행에 나선 길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기분이 좋아져서 정체를 밝히고 황소 네 마리가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땅을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도 정체를 숨긴 인간이었다는 것. 그녀는 거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집채만한 근육덩어리 황소 네 마리를 데려와 길피의 땅을 갈게 했다. 소의 힘이 어찌나 세던지 쟁기가 닿은 땅이 그대로 길피의 땅에서 떨어져나왔다. 여신은 이 땅을 한참 떨어진 서쪽 바다에 가져다 놓았는데, 이때부터 이곳은 이웃나라 덴마크의 영토가 됐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이 있는 셸란(Sjælland) 섬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
여신에게 속아 영토를 잃은 길피는 크게 놀란 나머지 신들은 대체 누구이며 그들의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고민하게 됐다. 결국 그는 신들을 직접 만나 궁금증을 해소할 요량으로 신들의 나라 ‘아스가르드’를 향한 기약 없는 여행길을 떠났다. 하지만 신들은 길피가 자신들의 땅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길피를 어딘가에 있는 훌륭한 궁전으로 오게 하고 ‘높은 자’, ‘똑같이 높은 자’, ‘세 번째 높은 자’라는 세 남자의 모습으로 자신들을 드러냈다. 이 만남에서 길피는 수많은 질문들을 던졌고, 세 사람은 그때마다 신들과 세계, 마법에 대한 놀라운 얘기들을 들려줬다. 길피는 우주의 신비로움에 다가갔지만 어느 순간, 세 남자는 성과 함께 흔적도 없이 신기루마냥 사라져버렸다. 길피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들은 것을 전했다. 우리가 신들에 대해 잘 알게 된 건 이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북유럽 지역의 신화 중 ‘길파긴닝(Gylfaginning)’의 줄거리다. 길파긴닝은 ‘길피가 헛것을 보다’, 내지는 ‘길피가 속아넘어가다’란 뜻이다. 주인공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가짜 성에서 사람이 아닌 존재들을 만났다. 헛것을 보고들은 셈이다. 신화를 헛것이라고 말하는 신화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신화(神話)는 존재한다고 증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그리스나 북유럽, 켈트 지역의 신화처럼 이미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거의 상실해버린 이야기들은 더욱 허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모든 신화가 한때는 굳건한 믿음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그 옛날, 고대 각 지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화에 자신들이 믿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담았다. 그리고 이 신화는 다시 사람들의 믿음 속에 깊숙하게 자리 잡았다. 게다가 지금보다 조금 더 삶이 단순했던 고대인들의 관심사는 지금의 우리처럼 쩨쩨하지 않았다. 우주와 자연, 인간이라는 큰 주제에 대한 나름의 통찰이 하루하루의 삶을 결정하는 커다란 규칙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런 규칙을 체화하고 있었던 때의 생활은 우리보다 풍족하지는 않을지언정 더 충실하지 않았을까.
신화는 그래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조상들의 생각을 드러냄으로써 지금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물론 신기함과 재미는 덤이다. 이제부터 한주에 하나씩 조금씩 여러 지역의 신화를 읽어나갈 참이다. 고대인의 생각과 믿음을 탐험하는 여정에 동참해 준 것에 감사하며, 또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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