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도 끝끝내 훼손당하지 않도록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5.09.11. 11:59

수정일 2015.11.16. 05:42

조회 470

ⓒ연합뉴스

나는 조금씩 조금씩 거기에 익숙해졌고 나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놓고 모욕을 받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선의의 사람들이 받는 교육의 일부분을 이룬다. 오래전부터 나는 더는 조롱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나는 인간이란 결코 웃음거리가 될 수 없는 무엇임을 잘 알고 있다.
ㅡ 로맹가리 《새벽의 약속》 중에서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91

너무 작은 땅덩이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과 너무 가까이 부대끼며 너무 바쁘게 살아가기 때문일까, 한국 사회의 ‘관계’는 지나치게 바투고 다밭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기어이 오지랖으로 발휘되고,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고 인정하기보다는 재단하고 심판하기에 바쁘다.

이를 테면 날씬한 몸매는 건강과 미용을 위해 좋다. 하지만 뚱뚱한 몸매를 가진 사람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것에 대한 잣대가 될 수는 없다. 고소득을 보장하는 좋은 직업은 안정적인 생활과 풍요를 약속한다. 그렇지만 적은 수입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선택한 사람들을 비웃고 폄하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라에서 권장할뿐더러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인생의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으로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지 못하는 커플에게 이기적이고 미성숙하다고 비난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식이다.

모욕과 조롱은 어느덧 서로의 약점과 허점을 흠뜯어 ‘디스’하는 힙합 배틀을 넘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악마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불행하게 하는 수많은 긴장과 압력들 중에 칼춤을 추는 잣대와 기준이 함부로 휘두르는 모욕과 조롱도 분명히 한 몫을 하고 있다. 서로 ‘리스팩트(respect,존중)’하지 않는 개싸움에 ‘스웨그(swag,자유·만족)’가 있을 리 없다.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 정의롭고 훌륭한 것은 말마따나 올바르고 아름답고 정의로우면서 훌륭하지만, 그것의 기준이 자의적이 되는 순간 폭력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그야말로 잣대와 기준 없이 난무하는 잣대와 기준은 순식간에 나의 삶을 재고 옭아맨다. 마치 신화 속 프루크루테스의 침대처럼, 남들을 묶어놓은 그 침대에서 우리 또한 발목이거나 무릎이거나 허벅지를 베이거나 잡아 늘리게 된다.

그리하여 조롱과 모욕에 익숙해지되 개의치 않는 법을 교육하고 교육 받을 필요가 점점 더 절실해진다. 조롱과 모욕을 두려워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위협받던 바로 그 무기를 남들에게 돌리게 된다. 그처럼 비열한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롱받고 모욕당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려야 할 터, 이에 대한 로맹가리의 대답은 간명하다. ‘인간이란 결코 웃음거리가 될 수 없는 무엇임’을 깨닫는 것이다.

한때 나는 ‘모욕의 매뉴얼’을 가지고 조롱과 모욕에 맞설 전투태세를 가진 쌈닭이었으나, 손자의 말씀대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승리다. 그러기 위해 남들의 것이 아닌 나의 기준을 홈켜쥐고, 남의 것이 아닌 나의 잣대로 세상을 헤쳐 가는 법을 연습한다.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누구도 함부로 나를 조롱하거나 모욕할 권리를 갖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거듭 연습하고 또 기억한다. 무엇에도 끝끝내 훼손당하지 않도록.

매일 아침을 여는 서울 소식 - 내 손안에 서울 뉴스레터 구독 신청 카카오톡 채널 구독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