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생각만으로도 위로 받는다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5.07.31. 15:05
영리하거나 힘이 센 것들은 순례를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 힘든 여정에 오르지 않아도 자신의 영토 안에서 충분히 잘 살기 때문이다. 밥벌이에 하루하루가 고단한 부류도 고행을 하지 않는다. 일상 자체가 고행이기 때문이다. 죄를 지어 추방당했거나 거룩한 정신적 부담을 가진 자만이 순례를 선택한다. --해이수 소설 《눈의 경전》 중에서 |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85
H언니가 순례에서 돌아왔다. 800킬로미터에 달하는 산티아고 순례 길을 45일 동안 걸었다 한다. 바다가 고향이라 회를 좋아하는 언니가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떠온 송어에 맑은 술을 먹으며 그 비 오고 바람 불던 먼 길의 이야기를 들었다. H언니는 물론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도 그마마한 시간에 그마마한 거리를 홀로 걸으면 어떤 심오한 영성을 만날 듯도 싶다.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잡혔다 터지고 얼굴과 목덜미가 새카맣게 타들어가면서 만나는 빛나는 무엇.
순례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여행과도 다르고 고행과도 다르다. 그 둘 다이면서 둘 중 어느 하나일 수는 없는 묘연한 울림이 있다. 사전에는 이렇게 풀이되어 있다. 종교적으로는 그 종교의 발생지나 본산(本山)의 소재지, 성인의 무덤이나 거주지와 같이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하여 참배함. 또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함. 아무래도 좀 재미가 없다.
순례에는 고독과 침묵, 그리고 자성과 순종의 독하고 알싸한 향내가 배어 있다. 함께 세속에서 얽히고설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길잡이가 되는 수도자까지도 깡그리 물리치고 오로지 절대와 나를 오롯이 맞대면하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비밀과 스스로조차 용서할 수 없는 죄까지 모조리 토하고 또 토해서 말갛게 텅 비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들을 모객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성지 순례’는 ‘성지 여행’ 정도로 그 이름이 겸손해져야 마땅하다.
그처럼 황홀하고도 고통스러운 길에 기꺼이 오르려면 영리하거나 힘이 세서는 곤란할 것이다. 영리하고 힘이 세서 꽃자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불편을 택하고 그 불편 속에서 평화롭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런가 하면 너무 일상이 고단해서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순례는 마지막 한 순간이면 충분하다. 성스러운 갠지스 강이 흐르는 인도의 도시 바라나시에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평생을 강물에 씻어버리고 새로운 생을 준비하려는 가난한 순례자들이 넘친다. 그들은 마지막 기력을 다하여 그곳까지 와서 맥을 놓은 듯 죽는다. 하지만 길을 가다가 쓰러져 죽고 물가에서 넘어져 죽은 순례자들의 얼굴이 아무리 기묘하게 평화롭대도 지켜보는 마음까지 마냥 평화로울 수는 없다. 그들의 순례는 정녕 행복했을까?
그렇다. 죄를 짓고도 적반하장으로 뻔뻔스러운 자가 아니라 스스로가 죄인인 줄 아는 사람, 천잡하고 경박한 물신의 세상에서 기어이 정신을 놓지 않고 버티려는 사람이 순례에 어울린다. 가진 듯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사람, 아무 것도 갖지 못한 듯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 가지고 가지지 못한 것을 더 이상 따지지 않는 사람만이 그 홀연한 길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다.
과연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번이라도 순례 길에 떨쳐나설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지만, 순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위로를 받는다. 아직 가야 할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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