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④ 시전(市廛)에서 대형마트까지

내 손안에 서울

발행일 2015.05.13 14:05

수정일 2015.05.1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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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서울, 서울 브랜드 이야기] 서울시가 도시브랜드 개발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시민토크콘서트 <우리의 서울이야기>를 지난 2월 27일부터 오는 5월까지 개최합니다. 서울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시민들과 분야별로 살펴보고 이를 통해 서울의 핵심 정체성을 도출한다는 취지로 서울의 산 과 강, 수도, 만남, 시장, 노래, 맛, 문화, 거리, 서울 속의 세계 등 10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이 토크 콘서트에 이코노믹 리뷰 기자가 직접 참석해 우리가 몰랐던, 그러나 알고 싶었던 '서울 브랜드'의 이야기를 지상중계 합니다.

[우리의 서울이야기 제4화] 서울, 시장을 이야기하다 : 시전에서 대형마트까지

지난 3월 20일 저녁, 서울시민청 지하2층 바스락홀에는 <시민 토크콘서트, 우리의 서울이야기>에 참여하는 시민들로 북적였다. 4회째 진행되고 있는 콘서트에는 서울의 시장에 대해 고민하고 알고자하는 시민들의 뜨거운 열정으로 '불금'의 열기가 느껴졌다. 이 콘서트에는 서울도시브랜드추진위원회 위원 및 관계자들과 서울시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신청한 서울 시민들, '서울얼굴가꿈단' 단원들이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

제4회 서울이야기 콘서트 전경ⓒ이코노믹리뷰

제4회 서울이야기 콘서트 전경

시장은 우리의 생활문화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장의 풍경은 시대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함과 동시에 삶의 역사와 풍경이 그대로 담는다.

이번 서울이야기에서는 시장의 상권형성과 소비 방식의 변화를 통해 서울에서의 삶이 갖는 특징과 그 변화를 풀어냈다. 서울의 시장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은 연사는 박은숙 교수였다. 박은숙 교수는 현재 고려대에서 역사 강의를 하고 있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연구원 역임했고, 개항 후 우리 역사가 주된 관심사로 도시 공간 구조의 변동, 사람들의 생활상 변화 등에 초점을 맞추며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시장의 역사>, <한국노동운동사 1>, <갑신정변 연구>, <도시화와 사회갈등의 역사양장 (공저)> 등이 있다.

개인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하는 시장

이번 강연에는 김부영씨의 통기타 연주가 있었다. 소규모 콘서트홀로 조성되어 있는 바스락홀에서 들리는 김부영씨의 노래와 연주는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공연이 끝난 후 박은숙 교수의 시장 이야기는 시작됐다.

제4회 서울이야기 콘서트 전경ⓒ이코노믹리뷰

제4회 서울이야기 콘서트 전경

박 교수는 간단한 질문을 던지며 강연을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일어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시나요?" 박교수는 가장먼저 일어난 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생수를 한 잔 마신다고 했다. 관객들은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교수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 집어드는 핸드폰도, 바로 마시는 생수 한잔도 모두 시장에서 구입한 물건이다. 우리는 시장에서 구입한 상품으로부터 하루를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박 교수에 의하면 시장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한다. 태어났을 때 입는 배냇저고리부터 죽을 때 입는 수의까지 모든 물건을 시장에서 구입한다.

이어 박 교수는 "요즘은 세상을 이야기할 때도 시장이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 미국시장과 중국시장, 결혼시장, 노동시장 등 거래를 하는 시장의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긴 것" 이라며 시장이 우리의 일상생활이나 세계를 재단하는 잣대로 활용되고 있음을 짚어 설명했다.

온달이 구걸하던 '한성백제 시절 시장' 부터 조선시대 '시전(市廛)'까지

서울의 시장은 몇 개나 있을까. 서울시청 상공인 지원과에 의하면 현재 '골목형 시장'은 160개여개 넘고, '건물형 시장'은 150여개가 넘는다. 즉 서울에 시장은 약 300여개 이상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시장(市場)은 언제부터 나왔을까. 시장은 인류의 발자취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 물물교환 형태로 존재하다가 일정 장소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으로 진화했다.

시전 행랑 위치도(사진=박은숙 교수 제공)ⓒ이코노믹리뷰

시전 행랑 위치도(사진=박은숙 교수 제공)

시장이 있었다는 기록은 조선시대부터 있었지만, 한성백제시대(BC 18년 ~ AD 475년) 500년 동안의 서울에도 시장은 있었다고 추측된다. 박 교수는 "<바보온달> 이야기를 보면 시장에서 '온달'이 시장에서 구걸한 구절이 나오는데 이것을 봐도 그 당시에도 시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라며 "고려시대에도 서울 지역은 교통과 조운(漕運)의 요지였고, 한강가에 장사배와 나룻배가 늘어서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시장이 활성화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서울의 시장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조선시대에 시장은 '시전(市廛)' 이라고 불렀다. 옛날 전통 사회의 성읍(城邑)이나 도시에 있던 상설 점포를 '전(廛)'이라고 하는데서 유래됐다.

당시 시전의 모습(사진=박은숙 교수 제공)ⓒ이코노믹리뷰

당시 시전의 모습(사진=박은숙 교수 제공)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도시로 떠오른 서울에는 시전(市廛)과 사설시장이 들어서 상거래와 교역을 주도해 왔다. 조선왕조는 종로와 남대문로 구간에 조성하고, 왕실과 관청의 수요품, 외교적 공물, 도성민의 수요품을 조달하도록 했다. 1412년~1414년 동안 조성된 시장은 그 규모가 2000여칸이 될 만큼 큰 규모를 자랑했다.

박 교수는 "당시 경복궁이 390칸 이었는데, 시장이 2000여칸이라는 것은 상당히 큰 규모" 라며 "이렇게 큰 규모로 조성된 시장의 종로통 중심과 남대문 거리는 시장으로 사용됐지만, 중간에 군인들이 기숙하는 숙도 쓰이고 정부의 물자를 저장하는 창고로도 쓰였다"며 당시의 시장에 대해 설명했다.

조선시대 시장은 나라에서 세운 '관설 시장' 이었다. 조선시대의 시전이 가지는 주요한 기능은 도내 주민들의 일상 생활용품 공급과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수요품의 조달 등이었다. 그 밖에 정부가 백성들로부터 받은 공물 중 사용하고 남은 것이나, 중국에서 사신이 가지고 오는 물건 중 일부를 받아 시민들에게 판매하는 일도 겸했다.

이에 박 교수는 "조선시대 시장은 특히 외교공물 진상의 기능이 두드러졌는데 당시 조선은 중국에 사신을 자주 보냈다. 사신을 보낼 때 중국에 보낼 외교공물을 시전에서 거래했고, 또 중국에서 조선에온 사신들은 중국에서 가져온 물건을 시전상인들에게 팔았다"고 덧붙여 말했다.

남대문 밖 칠패 시장의 당시 모습(사진=박은숙 교수 제공)ⓒ이코노믹리뷰

남대문 밖 칠패 시장의 당시 모습(사진=박은숙 교수 제공)

조선후기에는 인구 증가와 상품경제 발달을 배경으로 시장의 급성장이 이뤄졌다. 외곽지대로의 상권 확대가 진행되며 민간시장인 '칠패(七牌)', '이현(梨峴)'이 들어서 한강 및 송파장시·누원점 등의 외곽지대 상권과 연계하여 나라에서 세운 관설 시장인 '시전'을 위협하면서 상거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칠패'는 지금의 남대문시장의 전신으로, 서소문 밖에 있었다. 언제 설치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17세기 후반 서울의 서부지역의 인구가 급증하고 남대문 안쪽에 선혜청의 창고가 설치된 것을 계기로 하여 도성 밖의 외어물전(外魚物廛), 경주인(京主人)의 거주지역(지금의 서울역 부근) 등과 연결되어 도성 바로 밑(지금의 봉래동 일대)에 시장이 이루어져 칠패로 불렸다.

'이현'은 18세기 전반기에 형성된 시장으로 동대문시장의 전신이다. 종가(宗街:지금의 종로)와 함께 서울의 가장 큰 상업중심지의 하나로 발전했으며, 특히 이현과 함께 서울의 사상도고(私商都賈)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의 상인들은 가을과 겨울에 원산까지 가거나, 혹은 상품이 운반되어오는 중간 지점에 머물다가 이를 판매했다.

박 교수는 "특히 18세기 후반에는 인구의 증가와 도시권의 확장으로 상공업이 활기를 띠자 이현·칠패의 들은 상업적 이익을 독점했다"라며 "이와 같은 현상은 시장의 지역적 한계성, 즉 국지적 시장권이 상품 유통량의 증가와 더불어 상업 발전의 추세에 따라 새로운 대중적 시장의 형성과 새로운 형태의 시장 구조의 형성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개항 후 '외국인 점포개설' 그리고 자본주의 꽃 '미스코시 백화점'

19세기 후반 개항 후 서울의 시장은 항구를 열어 외국과 통상하며 외국인에게 개방되었고, 중국·일본상인이 도성에 점포를 개설하고 자본제 상품을 팔기 시작했다. 박 교수는 "이로써 서울시장은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후 전통적 시전은 특권을 상실하고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근대적 상가로의 변신을 도모했다. 칠패는 선혜청 안으로 이전하여 남대문시장으로 재편되었으며, 이현은 동대문시장으로 거듭나 오늘에 이르렀다.

일상(日商)의 주무대, 진고개와 정동 일대)사진= 박은숙 교수 제공)ⓒ이코노믹리뷰

일상(日商)의 주무대, 진고개와 정동 일대)사진= 박은숙 교수 제공)

반면 청상과 일상은 명동·진고개(현 충무로) 일대에 진을 치고 조선인 시장을 잠식하면서 상권을 확대해 나갔다. 이에 박 교수는 "이 때 형성된 명동·충무로 상권은 일제 때 핵심 상권으로 떠올라 해방 후 오늘날까지도 주요 상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며 "결국 남대문·동대문시장과 종로·명동상권 등 오늘날 주요 상권의 골격이 바로 이시기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1910년 8월 국권피탈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부터 8·15광복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하의 식민통치 시기의 사장은 어땠을까.

일제 강점 후 서울은 경성, 곧 '게이조(けいじょう)'로 그 명칭부터 바뀌었다. 시장 또한 숫자로 표시된 식민시장으로 재편되었다. 곧 1~4호 시장이 바로 그것인데, 남대문ㆍ동대문시장 등 전통적 시장은 1호시장, 일제가 설립한 이른바 '신식시장'은 2~3호시장으로 재편됐다.

'공설시장', '경매시장', '도매시장', '곡물현물거래시장' 등의 새로운 시장도 등장했다. 특히 종로 공설시장과 영등포 공설시장을 둘러싸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거주지역이 명확하게 갈렸다.

박 교수는 "북촌에는 조선인이 거주하고, 남촌에는 일본인이 거주했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해서 북쪽에 위치한 북촌시장은 굉장히 허름했다. 반면, 지금의 명동과 충무로가 위치한 남촌은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휘황찬란하게 상권이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미스코시 백화점 전경(좌), 미스코시 백화점 옥상의 카페(우)(사진=박은숙 교수 제공)ⓒ이코노믹리뷰

미스코시 백화점 전경(좌), 미스코시 백화점 옥상의 카페(우)(사진=박은숙 교수 제공)

나는 어디로 디립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스코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이상, <날개>-

일제 강점기에 주목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백화점'의 등장이다. 화신·미스코시(三越)·조지아(丁字屋)백화점 등이 등장하며 서울의 시장은 최첨단 상권으로 떠올랐다.

박 교수는 화신 백화점은 예전 '미도파 백화점'의 전신이었고, 화신 백화점은 조선인들이 이용하던 백화점 이었다. 특히 현재 명동 '신세계 백화점'의 전신인 미스코시 백화점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줬다.

박 교수는 "1905년 러·일 전쟁 때부터 옷감을 판매하던 의류점이 1929년 미스코시 백화점이 됐다. 가장 큰 백화점 이었고, 옥상에 가면 카페 형태의 차를 마시는 공간도 있었는데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인 동시에 한번쯤 가보고 싶은 동경의 대상 이었다"고 설명했다.

'슈퍼마켓과 대형할인점'의 등장 그리고 '온라인 마켓'의 혁명

1945년 해방 이후 서울의 시장은 민족분리형 식민지시장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장질서를 창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과 분단·전쟁 등의 숱한 시련을 겪으며 공설시장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대신 남대문·동대문시장 등 30여개의 사설시장이 서울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성장을 견인해 내고 있었다. 백화점은 대부분 민간이 운영했는데, 경영진과 상호를 바꾸고 조선인 백화점으로 거듭나고자 노력했으나, 순조롭지 못했다.

1980년대 슈퍼마켓(사진=박은숙 교수 제공)ⓒ이코노믹리뷰

1980년대 슈퍼마켓(사진=박은숙 교수 제공)

1960·1970년대 서울의 시장은 인구증가와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폭발적 성장세를 보였다. 박 교수는 "1961년 44개였던 시장은 1979년에 334개로 폭증했고, 새로운 형태의 슈퍼마켓이 등장하고 상가 붐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백화점 또한 직영방식으로 전환돼 양적·질적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박 교수는 "이시기가 서울 시장이 전국적 도소매업과 유통 상업의 중심 무대가 되는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1980년 이후 세계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유통시장이 개방되며 상거래방식의 혁명적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특히 1997년 IMF 이후에 기존의 시장체제는 변했다. 박 교수는 이때를 '격변의 소용돌이'라고 표현했다.

박 교수는 "이 시기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이 진행됐지만, 서울 시장에는 '대형 할인점'이라는 게 등장했다. 슈퍼마켓과 편의점도 함게 등장하며 구멍가게를 밀어냈다"라고 설명했다. 유통 시장이 개방되며 월마트·까르푸와 같은 세계적 유통업체들이 초저가 할인을 내세우며 시장을 점령해 나갔으나, 국내 할인점은 원스톱쇼핑(One-stop Shopping)이 가능한 한국형 할인점으로 특화하면서 이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됐다.

결국 초국적 대자본과 노하우를 가진 월마트·까르푸는 한국 업체에 경영권을 양도하고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TV홈쇼핑과 인터넷 쇼핑몰이 등장하며 기존 상거래 방식의 혁명적 변화를 양산했다.

박 교수는 "시장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발전-소멸의 궤도를 그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장은 사람들의 생활문화를 진열하는 창이자 문명교류의 장이다"라고 말했다.

관광지와 삶의 터전, 시장의 두 표정을 말하다

"오늘은 시장을 두 방향으로 바라볼게요. 하나는 관광지로서 시장, 하나는 우리 삶의 터전으로서의 시장입니다. 만일 서울에 온 관광객에게 서울의 시장을 소개한다면 어느 시장을 데려가시겠어요? 또 우리 삶의 터전으로서의 시장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진행자 이제이 교수의 질문으로 시민과의 소통을 나누는 '집중 토크'가 강연에 이어 시작됐다.

설명중인 박은숙 교수ⓒ이코노믹리뷰

설명중인 박은숙 교수

먼저 박 교수는 "종로 신진시장을 말하고 싶다. 종로신진시장은 광장시장과 동대문종합시장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며,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평화시장과 마주하고 있는 곳인데, 동대문 상권의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이들 세 시장 속에 끼어 있는 신진시장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그러나 신진시장은 오늘날까지 옛 골목시장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서울의 전형적 전통시장이다"라고 신진 시장을 소개했다.

"종로 신진시장은 해방이후에 생긴 시장인데 아주 흥미롭다. 지금도 가보시면 골목을 지나다보면 대장간처럼 쇠를 두드려 칼을 만들고 송곳을 만들고 닭한마리, 곱창과 같은 먹거리도 굉장히 풍부하다. 등산복도 굉장히 유명한데 이유가 있다. 우리가 1971년 그 무렵에 동대문 종합시장 옆에 고속도로터미널이 있었다. 그 고속터미널을 거쳐서 야외의 산으로 놀러가는 사람들이 신진시장에 들러 등산복 전문시장으로 한참 유명했다. 굉장히 정겨운 전통시장이었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외에도 남대무시장, 동대문시장, 방산시장, 광장시장 등을 말하며 수 없이 많은 시장들에 애정이 있음을 표현했다.

서울의 대표시장을 적은 시민의 팻말ⓒ이코노믹리뷰

서울의 대표시장을 적은 시민의 팻말

한 시민은 "아직도 1~3평의 공간에서 봉제업을 하고 있는 근대적 모습들이 묻어있는 '동대문 시장'이 우리 삶의 터전을 나타내는 시장 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박 교수는 "지금은 동대문 시장이라고 말하지만, 예전에는 광장시장을 동대문시장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동대문 시장이라고 말하면 동대문 상권 자체를 말한다"며 덧붙여 설명했다.

장년층의 한 시민은 "황학동 중앙시장이 서울의 대표적 시장인 것 같다. 그 시장에서 어릴 적 쌀을 사다 먹었다. 떡을 먹었던 기억도 난다. 어릴 적 향수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강의를 듣던 외국인 서울 시민은 "나는 각 동네의 작은 시장들이 제일 중요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며 "큰 시장의 볼거리보다 일상생활이 담긴 작은 시장이 좋았다. 일상의 풍경이 담겨 사람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 밖에도 '경동시장', '양재 꽃시장', '방산시장', '광장시장', '노량진 수산시장', '가리봉동 시장' 등이 시민들이 꼽은 서울의 시장으로 뒤를 이었다.

이에 박 교수는 "내가 살고 있고 내가 살아가는 내 마을의 시장이 좋다는 시민들의 의견이 많다. 역시 시장은 물건만 사러 가는 장소가 아닌 일상의 삶과 굉장히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2014년 농부의 시장 전경(사진=서울문화재단블로그)ⓒ이코노믹리뷰

2014년 농부의 시장 전경(사진=서울문화재단블로그)

한편, 새롭게 조성된 '도심 장터'도 있다. 마포의 '늘장'과 대학로의 '마르쉐@',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농부의 시장' 등이 대표적이다.

농부의 시장은 2012년 6월 첫 선을 보인 이후 광화문 북측 광장 등에서 4월부터 11월 중순까지 꾸준히 열리고 있다.

마포 늘장은 2013년 7월에 처음 생긴 장터로 경의선 폐선부지에 주지역 주민들과 사회적 경제 단위들의 협으로 만들어진 장터다. 월요일만 빼고 늘 열리는 장터라고 해서 '늘장'이라 불리는데 직접 만든 과일청, 수제 악세서리, 특이한 목재 스피커, 피규어 등이 판매되는 큰 규모의 벼룩시장이다. 다달이 두 번째 일요일마다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펼쳐지는 마르쉐@에서 이런 진풍경은 일상이다. 마르쉐@는 '도시형 농부시장'이다. 원래 프랑스어로 장터라는 뜻인데, 뒤에 장소 이름을 붙여서 어디서 열리는지를 나타낸다.이 시장은 젊은이들이 생태적인 농사를 짓는 농부로 성장해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이러한 서울의 시장 중 15곳의 재래시장을 돌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서울시티버스-시티투어'가 그것인데, 서울특별시의 관광명소와 쇼핑명소를 중심으로 순환하여 운행하는 셔틀버스 형태의 관광버스로 관광객에게 인기가 좋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 속에는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문화와 문명이 깃들어 있고 그들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기에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박 교수는 마지막으로 "21세기 우리들의 삶은 너무 바쁘고 복잡하다. 우리의 일상은 편의점과 마트에 직결되면서 시장과는 현실적 거리감이 있을 수 있다"며 "나는 심신이 지칠 때 연구실에서 가까운 '암사종합시장'에 들린다. 시장과 같이 호흡하며 느슨해지는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적인 시장은 따뜻함과 느림을 느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제공해준다"라는 말로 시장의 정겨움을 알리며 강연을 마쳤다.

출처 : 이코노믹리뷰(www.econovi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