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잘 느끼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11.21. 10:23

가장 잘 산 사람은 가장 오래 산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가장 잘 느낀 사람이다.
--루소의 《에밀》 중에서 |
소설가 김별아의 ‘빛나는 말 가만한 생각’ 50
오늘이 입동(立冬)이라는, 라디오의 믿기지 않는 뉴스를 들으며 아침 산책을 했다. 시간의 예고와 같은, 절기는 항상 새삼스럽다. 평소에는 시간에 쫓기며 사는 듯하다가도 절기가 바뀌는 소식을 들으면 시간을 쫓으며 사는 듯하다. 상강과 소설 사이의 입동, 이제부터 겨울에 접어든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발에 채는 낙엽과 헐벗어가는 나뭇가지들이 아쉬워진다.
올해는 실로 까마아득히 가을을 잊고, 가을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늙는다는 것은 나이를 더 먹었다는 뜻을 넘어 마땅히 느껴야 할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다. 곁을 바싹 스치는 시간조차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시간 속을 걷는 자신을 느끼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삶이 그렇게 펼친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물처럼 움켜잡을 방도 없이 흐르고 있다.
인생의 커다란 복(福)으로 숭앙되던 장수(長壽)가 공포이거나 심지어 재앙이 되는 초고령화사회가 다가오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오래 사는 것 자체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삶의 양보다는 질, 얼마나 살았나 보다 어떻게 살았나에 눈을 돌리게 된다. "노년을 통해서 그 이전의 전 생애의 의미 혹은 무의미가 드러난다"는 시몬느 보봐르의 말은 삶의 무서운 비밀을 폭로하고 있다. 통장 잔고나 병원 진료카드만큼 중요한 무엇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루소는 '경험'과 '감각'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선생이라고 일갈한다. 산다는 것은 그저 숨만 쉬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것이기에, 어떤 사람은 백 살이 되어 무덤에 묻혔지만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그러하듯 냉정스럽기가 서릿발 같은 루소는 심지어 그런 사람은 젊어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내쏜다. 그에 덧붙는 조건이라는 것이, 적어도 그때까지 삶을 제대로 살았다면.
작가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빨리, 더 많이, 더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그래야 한다는 당위라기보다 그럴 수밖에 없는 명운이다. 어린 날 그리고 젊은 날, 나는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건을 온몸으로 느끼느라 쩔쩔 매야 했다. 그것은 언제나 달보드레하고 아름답지는 않았다. 쓰고 맵고 짜고,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럽기 일쑤였다. 하지만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것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노라면, 그 감각의 경험과 기억은 마침내 언어가 되어 조금씩 풀려나왔다. 그러면 작은 골방에 갇힌 채로도 온 세상을 느낄 수 있었다. 온종일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고도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느끼는 만큼, 세상은 넓어졌다. 느낄 때에만, 살아있었다.
인생을 잘 느끼기 위해서는 감각이 잠들거나 퇴화되지 않도록 늘 갈고닦아야 할 것이다. 그때 가장 필요한 두 가지는 아마도 호기심과 용기가 아닐까 싶다. 호기심은 지치고 졸려 하는 감각을 흔들어 깨울 테고, 용기는 더 이상 새로운 길로 접어들지 않으려 지칫대는 발걸음을 이끌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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