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조선 붐을 일으킨 '한류의 원조'는 누굴까?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06.11. 15:42


조선 후기 제4차 통신사 일행이 일본 에도(江戶)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조선통신사 행렬도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98) 한류 열풍의 원조, 조선통신사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4월 25일부터 조선시대 통신사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1965년에 체결한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해 ‘마음의 사귐, 여운이 물결처럼’ 이라는 제목으로 마련됐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사람과 사람 사이 진심 어린 교류, 문학과 예술로 오간 감정의 흔적, 민중의 시선으로 본 외교와 교류의 의미를 전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이번 전시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등 국내 소장 자료와 오사카역사박물관, 에도도쿄박물관, 교토대학종합박물관, 규슈대학 부속도서관 등 일본 측이 소장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과 보물급 자료 등을 대거 전시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등 국내 소장 자료와 오사카역사박물관, 에도도쿄박물관, 교토대학종합박물관, 규슈대학 부속도서관 등 일본 측이 소장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과 보물급 자료 등을 대거 전시하고 있다.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하여 열리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
한일 국교 정상화의 상징, 조선통신사의 파견
통신사(通信使)는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을 지칭하는데, ‘믿음을 통하는 사절’이라는 명칭 그대로 양국 간 우호와 협력, 신뢰를 주요한 목적으로 파견한 것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선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 후기까지의 사절단을 자신들의 연호를 써서 ‘형보통신사’, ‘문화통시사’라고 칭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대신하여 들어선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幕府)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요청해 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도 알아보고 왜란 때의 포로들을 송환시키기 위해 1604년 사명대사 유정(惟政)을 탐적사(探賊使:왜적을 탐색하는 사절)로 파견하였다.
유정은 1604년 7월 대마도주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서울을 떠났다. 일본이 조선을 다시 침입한다면 명나라와 힘을 모아 일본을 다스릴 것이며, 일본이 성의를 보이면 관대하게 처분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대마도에 간 유정은 이듬해 1605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다. 조선과의 화해를 진정으로 원하고 있다는 도쿠가와의 뜻을 전해받은 유정은 조선을 떠나온 지 10개월 만에 조선인 포로 1,30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유정은 승려로서만이 아니라 외교관으로서도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대신하여 들어선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幕府)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요청해 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도 알아보고 왜란 때의 포로들을 송환시키기 위해 1604년 사명대사 유정(惟政)을 탐적사(探賊使:왜적을 탐색하는 사절)로 파견하였다.
유정은 1604년 7월 대마도주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서울을 떠났다. 일본이 조선을 다시 침입한다면 명나라와 힘을 모아 일본을 다스릴 것이며, 일본이 성의를 보이면 관대하게 처분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대마도에 간 유정은 이듬해 1605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다. 조선과의 화해를 진정으로 원하고 있다는 도쿠가와의 뜻을 전해받은 유정은 조선을 떠나온 지 10개월 만에 조선인 포로 1,30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유정은 승려로서만이 아니라 외교관으로서도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던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 약 180여점의 귀중한 유산들이 전시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포로를 송환하는 등 우호적 입장을 보이자, 조선 조정은 1607년(선조 40) 국교를 재개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하였다. 전쟁의 상처가 컸지만 일본과 적대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것은 조선 정부에도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막부에서 임진왜란 때 선릉(宣陵:성종의 능)과 정릉(靖陵:중종의 능)을 파헤친 도굴범을 조선에 보낸 것도, 통신사 파견의 명분 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통신사의 구성과 여정
조선의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 만인 1607년에 일본에 사절단를 보내게 되었다. 당시 사절단의 명칭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전쟁의 책임자인 일본 측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전쟁 중에 끌려간 우리의 포로를 데리고 오기 위한 사절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국교 재개라는 물꼬가 트이면서, 정기적인 사절단의 파견이 이루어졌고, 1617년(광해군 9)과 1624년(인조 2)에 이어, 1636년(인조 24)에 파견된 사절단부터 ‘통신사’라 지칭하였고, 통신사라는 명칭으로 파견된 마지막 사절단은 1811년(순조 11)의 통신사였다.
국교 재개라는 물꼬가 트이면서, 정기적인 사절단의 파견이 이루어졌고, 1617년(광해군 9)과 1624년(인조 2)에 이어, 1636년(인조 24)에 파견된 사절단부터 ‘통신사’라 지칭하였고, 통신사라는 명칭으로 파견된 마지막 사절단은 1811년(순조 11)의 통신사였다.

행렬, 복식 등 당시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통신사의 핵심 인물은 3인의 대표단, 즉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이었다. 정3품 이상의 대신을 정사로 삼았는데, 정사는 일본에 가서는 수상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 부사는 부대표, 서장관은 행정실장의 역할을 하였다. 이외에도 통역을 맡은 상통사(上通事), 외교문서를 초안하는 제술관이 수행원으로 참여했다. 그밖에 의원(醫員)과 서기(書記), 사자관(寫字官), 화원(畫員) 등이 주요 구성원들이었다. 화원들은 통신사 일행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면서 오늘날 사진기자와 같은 역할을 했다. 통신사들은 대부분 일본과의 학술문화 교류에 대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선발했는데, 그 수가 대략 4~500여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창덕궁에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숭례문을 나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서 옷을 갈아 입었다. 용인, 충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안동, 영천, 경주, 부산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대개 서울이 1차 집결지, 영천이 2차 집결지로 활용되었는데, 영천에서는 조양각(朝陽閣)에서 전별연이 거행되었다. 부산에서는 대마도(쓰시마섬), 일기도(壹岐島, 이키도)를 거쳐, 후쿠오카, 아마카세키를 거쳐 세토나이해(瀨戶內海)를 지나 오사카까지 약 40일간을 배를 타고 갔다. 이들이 타는 배는 수군통제사영(水軍統制使營)과 경상좌수사영(慶尙左水使營)에서 준비하였는데 사람이 타는 기선(騎船) 3척과 짐을 싣는 복선(卜船) 3척 등 6척으로 구성되었다.
오사카를 출발한 후에는 교토와 모리야마 등을 거쳐 당시의 수도인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갔다.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왕복 11,470리(4,588 킬로미터), 대략 5개월에서 8개월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일본에 도착하면. 일본측의 호위 군사가 8백여 명, 연도의 가마꾼과 인부들 2천 6백여 명에 말 8백여 마리 등 일본에서의 통신사 행렬은 수천 명의 사람과 말이 지나가는 장관을 이루면서 일본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통신사 일행은 창덕궁에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숭례문을 나와 남관왕묘(南關王廟)에서 옷을 갈아 입었다. 용인, 충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안동, 영천, 경주, 부산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대개 서울이 1차 집결지, 영천이 2차 집결지로 활용되었는데, 영천에서는 조양각(朝陽閣)에서 전별연이 거행되었다. 부산에서는 대마도(쓰시마섬), 일기도(壹岐島, 이키도)를 거쳐, 후쿠오카, 아마카세키를 거쳐 세토나이해(瀨戶內海)를 지나 오사카까지 약 40일간을 배를 타고 갔다. 이들이 타는 배는 수군통제사영(水軍統制使營)과 경상좌수사영(慶尙左水使營)에서 준비하였는데 사람이 타는 기선(騎船) 3척과 짐을 싣는 복선(卜船) 3척 등 6척으로 구성되었다.
오사카를 출발한 후에는 교토와 모리야마 등을 거쳐 당시의 수도인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갔다.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왕복 11,470리(4,588 킬로미터), 대략 5개월에서 8개월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일본에 도착하면. 일본측의 호위 군사가 8백여 명, 연도의 가마꾼과 인부들 2천 6백여 명에 말 8백여 마리 등 일본에서의 통신사 행렬은 수천 명의 사람과 말이 지나가는 장관을 이루면서 일본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원근감이 느껴지는 에도와 후지산을 표현한 그림. 지금도 조선통신사와 함께 자주 회자되는 작품이다.
일본 최대의 축제, 통신사 행렬
통신사의 행렬을 그린 그림들에서 통신사의 규모가 화려하고 장엄했음이 눈에 들어온다. 일본 전역에서 통신사 접대에 든 비용은 한 주(州)의 1년 예산과 비슷한 은 1백만 냥 정도였다. 통신사는 왕의 외교문서인 서계(書啓)를 휴대하고, 인삼, 호피, 모시, 삼베, 은장도, 청심원 등을 예물로 가지고 갔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일본 화가가 1748년에 온 통신사 사절단의 모습을 두루마리 형태로 그린 ‘연향(延享) 오년 조선통신사 등성행렬도(登城行列圖)’(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시모노세키시립역사박물관 소장)가 특히 주목되었다.
이 그림에는 ‘이런 저런 음식이 다 맛이 좋아서 다들 즐거워했다. 300명쯤 되는 일행이 금방 다 먹어치웠다. 준비한 음식이 금방 바닥이 났다. 오이도 엄청 좋아하여 에도의 오이를 싹 사들였다.’ 거나, ‘모두가 담배를 좋아한다. 조선에서도 이곳의 신덴, 핫토리 담배 같은 것은 없다고 하다. 곳곳의 선물로 받은 담배는 조선에 선물로 가져간다고 한다.’와 같은 내용의 글을 그림 옆에 표기한 것이 흥미로웠다.
통신사가 방문하면 최대의 축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일본 화가들이 그 행렬을 그림으로 그렸고, 비싼 값에 팔렸다. 통신사가 머무는 곳에는 통신사의 수행원들이 쓴 글 한 수, 그림 한 점을 얻기 위한 지식인과 일반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1719년(숙종 45) 통신사행에 제술관으로 참여한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遊錄)』에는 “우리나라의 시문을 구하려는 일본인은 귀천이나 현명한 자와 우둔한 자에 구별없이 조선 문사를 신선과 같이 추앙하였고, 천리길을 멀다 않고 숙소에 와서 기다렸다.”고 기록하였다.
이 그림에는 ‘이런 저런 음식이 다 맛이 좋아서 다들 즐거워했다. 300명쯤 되는 일행이 금방 다 먹어치웠다. 준비한 음식이 금방 바닥이 났다. 오이도 엄청 좋아하여 에도의 오이를 싹 사들였다.’ 거나, ‘모두가 담배를 좋아한다. 조선에서도 이곳의 신덴, 핫토리 담배 같은 것은 없다고 하다. 곳곳의 선물로 받은 담배는 조선에 선물로 가져간다고 한다.’와 같은 내용의 글을 그림 옆에 표기한 것이 흥미로웠다.
통신사가 방문하면 최대의 축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일본 화가들이 그 행렬을 그림으로 그렸고, 비싼 값에 팔렸다. 통신사가 머무는 곳에는 통신사의 수행원들이 쓴 글 한 수, 그림 한 점을 얻기 위한 지식인과 일반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1719년(숙종 45) 통신사행에 제술관으로 참여한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遊錄)』에는 “우리나라의 시문을 구하려는 일본인은 귀천이나 현명한 자와 우둔한 자에 구별없이 조선 문사를 신선과 같이 추앙하였고, 천리길을 멀다 않고 숙소에 와서 기다렸다.”고 기록하였다.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왕복 11,470리(4,588 km), 대략 5~8개월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통신사가 한번 다녀오면 일본 내에
조선 붐이 트게 일어날 정도로 영향을 미쳤다.
왕복 11,470리(4,588 km), 대략 5~8개월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통신사가 한번 다녀오면 일본 내에
조선 붐이 트게 일어날 정도로 영향을 미쳤다.
1636년부터는 막부의 요청으로 파견된 마상재(馬上才)가 큰 인기를 끌었다. 통신사의 행렬이나 곡예를 자개로 새긴 도장까지 유행하였다. 조선의 통신사는 일본에 선진문화를 전수했던 문화사절단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이다. 통신사가 한번 다녀오면 일본 내에 조선 붐이 트게 일어날 정도로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조선의 통신사 일행들은 겨울연가 등의 드라마에서 시작하여, K-POP 등 최근에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의 원조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조선통신사들이 남긴 기록들
‘통신사’라는 이름으로는 1636년부터 1811년까지 모두 아홉 번 일본을 방문했다. 통신사로 다녀온 사신들은 일본을 견문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김세렴의 『해사록(海槎錄)』, 조명채의 『봉사일본시견문록(奉使日本時聞見錄)』, 남용익의 『부상록(扶桑錄)』, 신유한의 『해유록(海遊錄)』 등이 대표적으로, 이들 기행록을 통하여 일본의 정치, 문화적 상황과 함께 통신사들의 일본에 대한 인식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통신사들에게 필수 자료로 활용된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조선통신사들에게 필수 자료로 활용된 책은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였다. 신숙주는 1443년(세종 25) 세종의 명을 받들어 일본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26세 신숙주의 당시 직책은 서장관(書狀官)이었다. 신숙주 일행은 7개월 만에 외교적 목적을 무사히 달성하고 돌아왔다. 이때 대마도주와 체결한 계해약조는 외교 현안이던 세견선(歲遣船:일본이 해마다 조선에 보내는 배)과 세사미두(歲賜米豆:해마다 바치는 쌀) 문제를 각각 50척, 200섬으로 해결한 성과였다. 『해동제국기』는 신숙주가 세종 때 일본을 다녀온 지 28년 만인 1471년(성종 2) 성종의 명으로 완성되었다. 긴 시간이 소요된 것은 일본 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의 외교관례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해동제국기』는 일본에 대한 외교와 여행의 지침서로 자리를 잡아 갔다. 신숙주는 특히 일본의 풍속에 큰 관심을 보였다.
“나라의 풍속은, 천황의 아들은 그 친족과 혼인하고 국왕의 아들은 여러 대신과 혼인한다. … 무기는 창과 칼 쓰기를 좋아한다. 음식을 할 적엔 칠기를 사용하며 높은 어른에게는 토기를 사용한다.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은 없다.”는 기록에서는 일본의 사무라이 전통의 모습과 함께 젓가락만 사용하는 문화가 신숙주에게 특별하게 다가왔음을 볼 수가 있다. 이외에 “남자는 머리털을 짤막하게 자르고 묶었으며, 사람마다 단검(短劍)을 차고 다닌다. 부인은 눈썹을 뽑고 이마에 눈썹을 그렸으며, 등에 머리털을 드리우고 다리로써 이어 그 길이가 땅에까지 닿는다. 남녀가 얼굴을 꾸미는 자는 모두 이를 검게 물을 들였다.”는 기록 등은 15세기 일본의 풍속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나라의 풍속은, 천황의 아들은 그 친족과 혼인하고 국왕의 아들은 여러 대신과 혼인한다. … 무기는 창과 칼 쓰기를 좋아한다. 음식을 할 적엔 칠기를 사용하며 높은 어른에게는 토기를 사용한다.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은 없다.”는 기록에서는 일본의 사무라이 전통의 모습과 함께 젓가락만 사용하는 문화가 신숙주에게 특별하게 다가왔음을 볼 수가 있다. 이외에 “남자는 머리털을 짤막하게 자르고 묶었으며, 사람마다 단검(短劍)을 차고 다닌다. 부인은 눈썹을 뽑고 이마에 눈썹을 그렸으며, 등에 머리털을 드리우고 다리로써 이어 그 길이가 땅에까지 닿는다. 남녀가 얼굴을 꾸미는 자는 모두 이를 검게 물을 들였다.”는 기록 등은 15세기 일본의 풍속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6월 29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 '마음의 사귐, 여운이 물결처럼'이 진행된다.
구경하는 사람이 길을 가득 메웠고
화려함이 강 언덕을 볼 때마다 배나 눈이 부셨다.
이에 이르러 정신이 또 현란하여
몇 거리와 시가를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화려함이 강 언덕을 볼 때마다 배나 눈이 부셨다.
이에 이르러 정신이 또 현란하여
몇 거리와 시가를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유한의 『해유록』중에서
신유한의 『해유록』 1719년 9월 4일 오사카에 도착한 상황을 보면, “관광하는 남녀들이 양쪽에 담처럼 늘어섰는데, 대저 모두 비단옷을 입었다. … 긴 다리 일곱을 지나서 비로소 대판(大阪)에 당도하니, 곧 모든 배가 정박하는 곳이었다. 연안에 목판을 깔아 부계(浮階)를 만들었는데, 높이가 뱃전과 같았고 좌우의 대나무 난간이 곱고 총총하여 사랑스러웠다. 여러 왜인들이 가마와 말을 준비하여 위에 빙 둘러서서 엄숙히 정돈하고 있었다. … 사신은 대교(大轎)를 탔고, 나와 당상 역관은 현교(懸轎)를, 나머지는 말을 탔다. 말은 모두 준마(駿馬)로서 금안장에 붉고 푸른 실 노끈으로 그물처럼 만들었다. … 구경하는 사람이 길을 가득 메웠고 화려함이 강 언덕을 볼 때마다 배나 눈이 부셨다. 이에 이르러 정신이 또 현란하여 몇 거리와 시가를 지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하여, 당시 오사카의 모습과 함께 통신사에 대한 최고의 접대, 행렬을 보기 위해 엄청난 인파가 몰렸던 모습이 보인다.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한 기간에 일본은 60여 차례에 걸쳐 차왜(差倭:일본 사신)를 보내면서 조선과의 평화적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그 연장 선상에서 조선에 대한 침략을 단행하면서 통신사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통신사 특별전은 6월 29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된다. ‘마음의 사귐, 여운이 물결처럼’ 특별전 을 찾아보면서, 통신사를 매개로 했던 조선과 일본 간 외교의 역사를 직접 확인해 보았으면 한다.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한 기간에 일본은 60여 차례에 걸쳐 차왜(差倭:일본 사신)를 보내면서 조선과의 평화적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그 연장 선상에서 조선에 대한 침략을 단행하면서 통신사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통신사 특별전은 6월 29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된다. ‘마음의 사귐, 여운이 물결처럼’ 특별전 을 찾아보면서, 통신사를 매개로 했던 조선과 일본 간 외교의 역사를 직접 확인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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