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 핫플은 이곳! 고속버스터미널은 추억을 싣고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5.03.05. 14:59
서울의 고속버스터미널 변천사


기존의 시외버스보다 훨씬 빨랐던 고속버스의 출현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상품이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91) 고속버스터미널의 탄생
따사로운 봄볕 속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계절이다. 서울역, 수서역, 청량리역 등 기차역이 여행의 주요 출발점이 되지만, 전국 어느 지역이든 갈 수 있는 버스터미널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장소다.
기존의 시외버스보다 훨씬 빨랐던 고속버스의 출현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상품이었다. 경부, 호남 고속도로의 개통은 그전까지 곳곳에 흩어져 있던 출발지를 한곳에 모으는 대형 터미널의 출현을 요구했고, 그렇게 해서 반포 지역에 고속버스터미널이 탄생하게 됐다. 공식 명칭은 서울경부,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지만, 주로 호남선을 담당하는, 옆에 위치한 센트럴시티와 묶어서 ‘강남터미널’,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라고도 칭한다.
기존의 시외버스보다 훨씬 빨랐던 고속버스의 출현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상품이었다. 경부, 호남 고속도로의 개통은 그전까지 곳곳에 흩어져 있던 출발지를 한곳에 모으는 대형 터미널의 출현을 요구했고, 그렇게 해서 반포 지역에 고속버스터미널이 탄생하게 됐다. 공식 명칭은 서울경부,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지만, 주로 호남선을 담당하는, 옆에 위치한 센트럴시티와 묶어서 ‘강남터미널’,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라고도 칭한다.
고속도로의 건설과 고속터미널 시대의 시작
시내버스나 시외를 연결하는 시외버스는 일제 강점 시기부터 있었지만, 1969년에 처음 등장한 고속버스는 당시 사람들의 삶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1969년 12월 한진고속은 20대의 고속버스로 서울과 인천 사이를 운행했다. 1967년 3월 착공한 경인고속도로에 1969년 7월 가좌와 인천 나들목이 착공돼, 서울에서 인천까지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 7월 왕복 4차로, 428킬로미터의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본격적인 고속도로 시대를 맞게 해 줬다. 1973년 11월에는 호남·남해고속도로가, 1975년 10월에는 영동·동해고속도로가 개통됐으며, 구마고속도로는 1977년 12월에 개통됐다. 영남과 호남의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목적이 컸던 88고속도로는 1983년 6월에 개통됐다. 고속도로의 개통은 이를 이용할 수 있는 고속버스와 함께, 이들 버스가 출발, 도착하는 종합버스터미널의 필요성을 촉진시켰다.
처음 고속버스로 이용된 차는 미국의 그레이하운드나 독일의 벤츠, 일본제 버스 등 모두 외제차로서, 주로 폐차된 차였다. 중앙고속에서 운영하던 고속버스는 아예 명칭도 ‘그레이하운드’라 했다. 최근까지 동남아시아나 동구권 국가 등에서 국산차가 운영이 되는 모습과도 유사하다.
1970년 7월 왕복 4차로, 428킬로미터의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본격적인 고속도로 시대를 맞게 해 줬다. 1973년 11월에는 호남·남해고속도로가, 1975년 10월에는 영동·동해고속도로가 개통됐으며, 구마고속도로는 1977년 12월에 개통됐다. 영남과 호남의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목적이 컸던 88고속도로는 1983년 6월에 개통됐다. 고속도로의 개통은 이를 이용할 수 있는 고속버스와 함께, 이들 버스가 출발, 도착하는 종합버스터미널의 필요성을 촉진시켰다.
처음 고속버스로 이용된 차는 미국의 그레이하운드나 독일의 벤츠, 일본제 버스 등 모두 외제차로서, 주로 폐차된 차였다. 중앙고속에서 운영하던 고속버스는 아예 명칭도 ‘그레이하운드’라 했다. 최근까지 동남아시아나 동구권 국가 등에서 국산차가 운영이 되는 모습과도 유사하다.

고속도로의 개통은 종합버스터미널의 필요성을 촉진시켰다.
고속버스 사업자는 대한항공을 인수한 한진고속을 비롯해, 지역별로 운영하는 사업자가 달랐다. 대구·경북은 한일고속, 부산·경남은 천일고속, 광주·전남은 광주고속, 충북·청주는 속리산고속, 인천, 경기는 삼화고속, 강원은 동부고속으로 하는 방식이었다.
고속버스 회사들이 다르다 보니, 터미널도 각기 다른 곳에 위치했다. 서울역 근처에는 한진, 중앙, 동양 고속이 있었다. 한진고속은 서소문 방향 봉래동, 중앙고속은 서울역 건너 동자동, 동양고속은 숭례문 방향 현재의 세브란스 빌딩에 있었다. 삼화고속은 종로구 관철동에 터미널을 두었고, 천일, 한일, 광주, 한남 고속은 동대문 앞 옛 전차 차고(지금의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 부지)를 공동으로 터미널로 이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동대문고속터미널’로 기억하는 것은 이곳에 가장 많은 고속버스가 운행됐기 때문이다. 필자가 초, 중, 고 시절을 보냈던 대구에도 동대구역 인근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었는데, 한진, 금호, 천일고속 등이 각기 다른 공간에 위치해 있었다. 운영하는 회사가 달라 이런 모습의 터미널이 형성됐음을 안 것은 한참 후에서였다.
고속버스 회사들이 다르다 보니, 터미널도 각기 다른 곳에 위치했다. 서울역 근처에는 한진, 중앙, 동양 고속이 있었다. 한진고속은 서소문 방향 봉래동, 중앙고속은 서울역 건너 동자동, 동양고속은 숭례문 방향 현재의 세브란스 빌딩에 있었다. 삼화고속은 종로구 관철동에 터미널을 두었고, 천일, 한일, 광주, 한남 고속은 동대문 앞 옛 전차 차고(지금의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 부지)를 공동으로 터미널로 이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동대문고속터미널’로 기억하는 것은 이곳에 가장 많은 고속버스가 운행됐기 때문이다. 필자가 초, 중, 고 시절을 보냈던 대구에도 동대구역 인근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었는데, 한진, 금호, 천일고속 등이 각기 다른 공간에 위치해 있었다. 운영하는 회사가 달라 이런 모습의 터미널이 형성됐음을 안 것은 한참 후에서였다.
강남 지역에 고속버스 터미널이 들어서다
1970년대 이후 서울에 인구가 집중되고, 시내 교통의 혼잡이 이어지면서, 정부와 서울시는 도심에 위치한 고속터미널의 이전을 적극 검토해 나갔다. 시 외곽에 터미널이 조성될 지역으로 떠오른 것이 현재의 강남 반포 지역이었다.
1975년 3월 KIST의 보고서를 기점으로 영동지구, 지금의 반포동이 입지로 대두됐는데, 보고서에서는 가장 큰 장점으로 “땅값이 저렴해 터미널을 위한 충분한 대지면적과 부속시설을 마련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현재 이곳이 최고의 땅값 지역임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허허벌판이었던 곳에 고속버스 터미널 공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76년이었다. 처음 가건물 형태의 승하차장으로 출발했던 터미널은 1978년 새로운 형태의 터미널 착공에 나서, 1981년 10월 완공되면서 본격적인 강남터미널 시대를 열었다.
1975년 3월 KIST의 보고서를 기점으로 영동지구, 지금의 반포동이 입지로 대두됐는데, 보고서에서는 가장 큰 장점으로 “땅값이 저렴해 터미널을 위한 충분한 대지면적과 부속시설을 마련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현재 이곳이 최고의 땅값 지역임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허허벌판이었던 곳에 고속버스 터미널 공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76년이었다. 처음 가건물 형태의 승하차장으로 출발했던 터미널은 1978년 새로운 형태의 터미널 착공에 나서, 1981년 10월 완공되면서 본격적인 강남터미널 시대를 열었다.

허허벌판이었던 곳에 고속버스 터미널 공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76년이었다.
강남에 터미널이 조성됐지만, 허허벌판에 내려진 서울 시민 다수는 큰 불편을 겪었다. 강북과 터미널이 있는 강남을 연결하는 다리가 제1한강교(한강대교)와 제3한강교(한남대교) 두 개만 있는 현실에서 강북 도심과의 접근성이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저비용으로 강북과 반포 지역을 연결하는 잠수교를 1976년에 완공했다.
정부에서는 1977년 6월 강남터미널의 승하차 유도를 위해 강북 6개소에 흩어져 있던 고속버스터미널을 폐지하고, 강남으로 집결하라는 교통부 장관의 행정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1977년 7월 1일을 기해 강북의 터미널은 모두 폐쇄됐다.(이하 손정목,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1』, 한울, 2005 참조)
이후 터미널 주변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서울의 대표적인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게 됐다. 1978년 가수 혜은이가 부른 ‘제3한강교’는 강남의 번영과 낭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1980년 1월 착공해 1982년 6월 25일 준공된 반포대교는 용산구 서빙고동과 강남구(현재는 서초구) 반포동을 연결하면서, 강북에서 고속터미널의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켰다.
강남고속터미널 준공 당시에는 승하차장이 1층, 3층, 5층에 있었지만, 안전 문제로 1988년 5월에 5층 승차장을 폐쇄했고, 1992년 10월에는 3층 승차장도 폐쇄했다. 8층 규모의 큰 콘크리트 피라미드 형태의 건물은 현재 경부선과 영동선 고속버스들이 출발, 도착하는 공간이 됐다.
옆에 있던 3층짜리 건물에는 호남 지역으로 가는 고속버스터미널이 조성돼 영남과 호남을 차별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2000년에 호남선이 있던 3층짜리 건물을 리모델링해, 11층의 신세계백화점과 터미널의 복합 건물 ‘센트럴시티’를 조성했다. 호남선 터미널의 명칭도 ‘센트럴터미널’로 바뀌었고, 현재 센트럴터미널에는 호남과 충청 지역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주로 운행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1977년 6월 강남터미널의 승하차 유도를 위해 강북 6개소에 흩어져 있던 고속버스터미널을 폐지하고, 강남으로 집결하라는 교통부 장관의 행정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1977년 7월 1일을 기해 강북의 터미널은 모두 폐쇄됐다.(이하 손정목,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1』, 한울, 2005 참조)
이후 터미널 주변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서울의 대표적인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게 됐다. 1978년 가수 혜은이가 부른 ‘제3한강교’는 강남의 번영과 낭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1980년 1월 착공해 1982년 6월 25일 준공된 반포대교는 용산구 서빙고동과 강남구(현재는 서초구) 반포동을 연결하면서, 강북에서 고속터미널의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켰다.
강남고속터미널 준공 당시에는 승하차장이 1층, 3층, 5층에 있었지만, 안전 문제로 1988년 5월에 5층 승차장을 폐쇄했고, 1992년 10월에는 3층 승차장도 폐쇄했다. 8층 규모의 큰 콘크리트 피라미드 형태의 건물은 현재 경부선과 영동선 고속버스들이 출발, 도착하는 공간이 됐다.
옆에 있던 3층짜리 건물에는 호남 지역으로 가는 고속버스터미널이 조성돼 영남과 호남을 차별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2000년에 호남선이 있던 3층짜리 건물을 리모델링해, 11층의 신세계백화점과 터미널의 복합 건물 ‘센트럴시티’를 조성했다. 호남선 터미널의 명칭도 ‘센트럴터미널’로 바뀌었고, 현재 센트럴터미널에는 호남과 충청 지역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주로 운행되고 있다.

고속터미널은 지방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큰 편의를 제공하고 있지만, 서울에서도 가장 붐비는 지역 중의 하나가 됐다.
고속터미널이 더욱 주목을 받은 것은 이곳에 3호선, 7호선, 9호선 지하철역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지방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큰 편의를 제공하고 있지만, 서울에서도 가장 붐비는 지역 중의 하나가 됐다.
필자가 처음 고속버스를 탔던 1970년대 후반에는 일반 버스에서처럼 버스 안내양이라 불린 여성 승무원이 있었다. 현재의 고속철도 특실과 같이 먹을 것을 나눠 줬다. 차내에 화장실이 있어서 신기했던, 2층의 버스 그레이하운드를 특히 타고 싶었던 기억도 난다.
필자가 처음 고속버스를 탔던 1970년대 후반에는 일반 버스에서처럼 버스 안내양이라 불린 여성 승무원이 있었다. 현재의 고속철도 특실과 같이 먹을 것을 나눠 줬다. 차내에 화장실이 있어서 신기했던, 2층의 버스 그레이하운드를 특히 타고 싶었던 기억도 난다.
동서울터미널과 남부터미널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이외에도 서울에는 고속버스가 운행되는 터미널이 두 곳 있다. 2호선 강변역에 위치한 동서울터미널과 3호선 남부터미널역에 위치한 남부터미널이다.
동서울터미널의 역사는 1969년부터 1989년까지 운영됐던 시외버스 터미널인 동마장터미널에서 시작한다. 현재의 동대문구 용두동으로서, 설립 당시 이곳의 명칭은 성동구 마장동이었다. ‘동마장’은 동쪽 마장동이라는 뜻으로, 원래 조선시대부터 말을 기르는 목마장(牧馬場)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1751년(영조 27)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에 의하면 한성부 동부 인창방 마장리계에 속했음이 나타난다.
동마장 터미널에서는 주로 경기도 동북지역, 충청북도, 강원도 지역 노선을 주로 운행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장동 지역의 교통 체증이 심해지자, 규모가 큰 종합터미널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1981년에 동마장터미널의 기능을 동서울종합터미널과 상봉터미널 2곳으로 나누는 계획이 확정됐다.
1985년 9월 2일에 상봉터미널(당시는 동대문구, 1988년 중랑구로 분구가 됨)이 먼저 개장됐다. 1987년 중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중부내륙권 고속버스와 시외버스 노선이 비약적으로 증대하면서, 서울시는 1989년 동서울종합터미널을 완공했고, 이 터미널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상봉터미널은 38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2023년 12월 영업을 중지했다.
동서울터미널의 역사는 1969년부터 1989년까지 운영됐던 시외버스 터미널인 동마장터미널에서 시작한다. 현재의 동대문구 용두동으로서, 설립 당시 이곳의 명칭은 성동구 마장동이었다. ‘동마장’은 동쪽 마장동이라는 뜻으로, 원래 조선시대부터 말을 기르는 목마장(牧馬場)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1751년(영조 27)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에 의하면 한성부 동부 인창방 마장리계에 속했음이 나타난다.
동마장 터미널에서는 주로 경기도 동북지역, 충청북도, 강원도 지역 노선을 주로 운행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장동 지역의 교통 체증이 심해지자, 규모가 큰 종합터미널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1981년에 동마장터미널의 기능을 동서울종합터미널과 상봉터미널 2곳으로 나누는 계획이 확정됐다.
1985년 9월 2일에 상봉터미널(당시는 동대문구, 1988년 중랑구로 분구가 됨)이 먼저 개장됐다. 1987년 중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중부내륙권 고속버스와 시외버스 노선이 비약적으로 증대하면서, 서울시는 1989년 동서울종합터미널을 완공했고, 이 터미널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상봉터미널은 38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2023년 12월 영업을 중지했다.

서울시는 1989년 동서울종합터미널을 완공했고, 이 터미널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현재 서초동에 위치한 남부터미널의 역사는 용산구 한강로 일대에 위치했던 용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한다. 1968년 8월 개장했는데, 필자는 1980년대에 충주로 여행할 때 이곳에서 버스를 탄 기억이 있다. 1990년 7월에 진로그룹이 서초구 서초동에 이전해 운영을 개시했는데, 이러한 연유로 진로그룹 본사가 남부터미널 건너편에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이곳에는 화물터미널이 있어서, 1985년 10월 지하철 3호선 개통 당시 역명도 ‘화물터미널역’이었다. 화물터미널은 현재의 서울남부터미널 자리에 있었는데, 이 화물터미널이 양재동으로 이전하면서 서울남부터미널이 그곳에 자리 잡은 것이다. 3호선 역명도 1990년 4월 1일에 남부터미널(예술의전당)역으로 변경했다.
현재에도 남부터미널에서는 수도권, 강원권, 충청권, 호남권, 영남권 등에 다양한 노선을 운행하고 있는데, 필자는 경남 진주, 산청, 남해 등을 여행할 때와 충북 진천에 있는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에 갈 때 이곳을 자주 이용했다. 터미널 내에서 ‘던킨도너츠’를 사서 버스에서 먹은 것도 즐거운 기억이다.
원래 이곳에는 화물터미널이 있어서, 1985년 10월 지하철 3호선 개통 당시 역명도 ‘화물터미널역’이었다. 화물터미널은 현재의 서울남부터미널 자리에 있었는데, 이 화물터미널이 양재동으로 이전하면서 서울남부터미널이 그곳에 자리 잡은 것이다. 3호선 역명도 1990년 4월 1일에 남부터미널(예술의전당)역으로 변경했다.
현재에도 남부터미널에서는 수도권, 강원권, 충청권, 호남권, 영남권 등에 다양한 노선을 운행하고 있는데, 필자는 경남 진주, 산청, 남해 등을 여행할 때와 충북 진천에 있는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에 갈 때 이곳을 자주 이용했다. 터미널 내에서 ‘던킨도너츠’를 사서 버스에서 먹은 것도 즐거운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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