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싶은 '사이니지'란?

지정우 건축가

발행일 2024.08.12. 16:57

수정일 2024.08.12. 16:57

조회 2,248

아빠건축가의 다음세대 공간 탐험
필자가 설계한 12-16세 전용 도서관 공간인 우주로 1216의 여러 사이니지들.
필자가 설계한 12-16세 전용 도서관 공간인 우주로 1216의 여러 사이니지들.

아빠건축가의 다음세대 공간 탐험 (30) 건축가가 디자인하는 사이니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공간의 안팎에는 의외로 많은 글씨가 써져 있다. 거리에는 간판이 지나치게 크고 많아서 건물을 뒤덮고 있다. 가로경관으로 특별함을 전해주는 다른 국가 도시들과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그런 간판들이 가져다주는 폐해는 시각적 공해를 넘어서 건물 디자인과 안전, 관리에도 어려움을 초래한다. 이는 그것을 보고 자라는 다음세대에도 미적 감각이나 잠재의식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간판이 꼭 크고 튀어야 한다는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 좋은 디자인의 사례도 점점 늘고 있다.

건물의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다양한 글씨와 그림이 발견되곤 한다. 특히 학교나 도서관 같이 다음세대들이 사용하는 공간에는 아직도 구호나 금지의 문구들이 채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학교 계단의 단 마다 새겨져 있는 영어 숙어나 복도마다 쓰여 있는 교훈들은 강박증을 대변하며 시대에도 맞지 않는다.

이런 공간의 글씨들을 우리는 사이니지(Signage)라고 부르며 간판이나 광고판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정적이긴 하다. 대부분 사이니지는 건물이나 공간이 완성된 이후에 필요에 의해 더해지기에 조화롭지 못하고 공해가 되는 반면, 공간을 설계하며 건축가가 사이니지를 함께 디자인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필자의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해보고자 한다.
우주로1216의 영역별 사이니지를 위한 계획안. 디자인의 통일성과 재료의 변화, 치수와 방식을 종합적으로 계획한다.
우주로1216의 영역별 사이니지를 위한 계획안. 디자인의 통일성과 재료의 변화, 치수와 방식을 종합적으로 계획한다.

공간의 모티브를 따르는 사이니지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의 일종인 사이니지는 그 자체의 컬러나 크기, 원리에 의해서 디자인 되곤 하지만 공간의 일부이기도 하기에 공간의 맥락이 중요하다. 공간이 단순하고 둥글둥글한데 복잡하고 날카로운 사이니지를 부착할 수 없다. 그렇다고 공간 디자인의 요소를 직접적으로 차용하는 것도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공간의 요소를 단순화해 사이니지의 모티브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한 눈에 파악이 되지 않더라도 느낌을 연속시켜준다는 차원에서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다.
공간에 삼각 지붕의 요소가 프레임으로 반복됐고, 그 이미지를 단순화하여 사이니지 모티브로 삼았다. 영역별 이름은 좀 더 기억하기 좋은 의성어, 의태어를 사용하였다.
공간에 삼각 지붕의 요소가 프레임으로 반복됐고, 그 이미지를 단순화하여 사이니지 모티브로 삼았다. 영역별 이름은 좀 더 기억하기 좋은 의성어, 의태어를 사용하였다.

사이니지를 디자인할 때 어떤 이름을 쓸 것이냐 하는 문제는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트윈세대 전용 어린이 도서관 공간인 우주로 1216에서는 톡, 쿵, 슥, 곰 과 같이 의태어와 의성어를 사용하여 그 영역의 활동 종류를 암시하는 방식을 택했다. ‘톡’은 이야기 나누는 곳, ‘쿵’은 마음껏 발산하는 곳, ‘슥’은 무언가를 만드는 곳, ‘곰’은 곰곰히 사색에 잠기고 독서를 할 수 있는 곳 같은 의미이다. 당연히 공간의 구성에서부터 개념이 사이니지까지 이어졌기에 사용자도 친근하게 각각 공간의 의미를 이해하고 활동하고 있다.

네이밍의 마법
‘우주로 1216’ 이라는 이름이 지닌 다중 의미와 그 사이니지 글씨체 까지 건축가가 함께 디자인했다.
‘우주로 1216’ 이라는 이름이 지닌 다중 의미와 그 사이니지 글씨체 까지 건축가가 함께 디자인했다.

‘이름짓기’, 네이밍은 다음세대 공간에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애착을 가진 공간이 ‘ㅇㅇ관’, ‘ㅇㅇ실’ 같이 딱딱한 이름으로 돼 있다면 그 마음이 반감될지 모른다. 그 공간을 직접 사용하는 이용자들이 같이 머리를 모아 참여할 수 있는 부분 중 하나도 네이밍이다. 그럴 때 그 공간의 설계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Would you__?’ 라는 영어는 우리말로 ‘우주’로 들린다. ‘무엇을 해보지 않으련?’ 하는 슬쩍 권유의 느낌을 가진다.
‘Would you__?’ 라는 영어는 우리말로 ‘우주’로 들린다. ‘무엇을 해보지 않으련?’ 하는 슬쩍 권유의 느낌을 가진다.

그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특별한 이름은 사이니지 디자인을 하며 글씨체마저도 공간의 설계 개념을 담아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명령하거나 지시하는 공간이 아닌 권유와 촉진의 마음을 담아 설계한 공간은 이름 또한 그 정체성을 담아 사이니지로 표현되어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다.
공간 내의 게시판을 알리는 사이니지. 글씨와 단순화한 그림이 통일감을 준다.
공간 내의 게시판을 알리는 사이니지. 글씨와 단순화한 그림이 통일감을 준다.

공간의 이해를 돕는 그림

사이니지에는 글씨만큼이나 그림이 중요하다. 한눈에 명쾌하게 이해가 되면서도 곱씹어 보면 “아하” 하고 이해가 더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줄 수 있다. 글씨 없이도 이미지만으로도 어떤 공간인지 무엇을 나타내는지 이해가 될 수도 있다.
박공 지붕을 가진 공간의 정체성이 반영된 사이니지 그림과 안내데스크를 나타내는 사이니지.
박공 지붕을 가진 공간의 정체성이 반영된 사이니지 그림과 안내데스크를 나타내는 사이니지.
악기 연주와 녹음을 위해 방음이 되는 ‘스튜디오’이지만 ‘슥’ 영역에 있어서 통일감 있게 ‘슥튜디오’라고 명하고 사이니지에 음표 표시를 했다.
악기 연주와 녹음을 위해 방음이 되는 ‘스튜디오’이지만 ‘슥’ 영역에 있어서 통일감 있게 ‘슥튜디오’라고 명하고 사이니지에 음표 표시를 했다.

우리는 보통 ‘픽토그램(pictogram)’이라고 부르는 상징체계는 텍스트 대신 기능에 대해서 알려주곤 한다. 가장 많이 알려진 픽토그램은 아마도 남녀 화장실 표시, 정보(information)를 나타내는 영문표시 ‘i’나 교통 안내판들일 것이다. 공간에서의 픽토그램은 기성품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그것이 천편일률적이어서 아무리 작아도 공간의 정체성과 유리돼 의미를 반감시킬 때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주로 1216의 재료bar를 나타내는 픽토그램과 뒤에 게시판의 픽토그램.
우주로 1216의 재료bar를 나타내는 픽토그램과 뒤에 게시판의 픽토그램.
우주로 1216에 사용하기 위해 건축가가 직접 개발한 픽토그램. 직관과 변형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이곳만의 정체성을 담을 수 있었다.
우주로 1216에 사용하기 위해 건축가가 직접 개발한 픽토그램. 직관과 변형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이곳만의 정체성을 담을 수 있었다.

픽토그램 또한 크기가 작아도 공간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시에 조금은 다른 관점을 보여줌으로써 인식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마치 2024년 올해 파리 올림픽의 각 경기를 소개하는 픽토그램처럼.
2024년 파리 올림픽의 픽토그램.
2024년 파리 올림픽의 픽토그램.

공간이 말을 걸다

사이니지 중에도 텍스트로만 그 뜻을 전할 때 담담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하는 경우가 있다. 우주로 1216은 전통적인 도서관의 안내 역할을 하는 사서를 넘어서서 보이지 않게 12세-16세의 이용자들을 지원하고, 더 나은 공간을 위해 그들의 자율적인 다양한 활동을 기록해 나가는 사서들이 있다. 이용자를 ‘우주인’이라 부르고 그런 사서를 그와 반대로 ‘지구인’이라 명칭하며 사서의 ‘안내데스크’ 같이 딱딱하게 부르는 이름 대신 ‘지구인 출몰지역’라 사이니지를 붙이게 됐다. 소박하고 있는 듯 없는 듯한 사이니지처럼 담담하지만 위트를 전하고 있다.
우주로 1216의 사서는 ‘지구인’이라 불린다. 사서의 안내데스크 역시 ‘지구인 출몰지역’이라는 표현으로 사이니지를 만들었다.
우주로 1216의 사서는 ‘지구인’이라 불린다. 사서의 안내데스크 역시 ‘지구인 출몰지역’이라는 표현으로 사이니지를 만들었다.
영역 이름만 사이니지가 아니다. ‘신발벗고 올라가시오’ 라는 딱딱한 지시어 대신 해시태그를 이용한 자율적 사이니지로.
영역 이름만 사이니지가 아니다. ‘신발벗고 올라가시오’ 라는 딱딱한 지시어 대신 해시태그를 이용한 자율적 사이니지로.

사이니지도 입체다

사이니지가 그래픽 디자인의 일종이긴 하지만 늘 납작한 평면인 것만은 아니다. 구멍이 뚫려 표현되기도 하고 살짝 돌출돼 있는 경우도 있다. 특히 앞을 볼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사람의 경우에는 공간의 정보를 일반적인 점자로도 알 수 있지만 사이니지가 가진 특별한 디자인을 같이 경험하기 위해서라도 입체성을 띤 사이니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와 EUS+건축이 공간 설계한 대치동의 청소년 심리지원센터인 ‘사이쉼’ 역시 네이밍부터 공간 개념에 맞춰 건축가가 제안하고 그 연장선에서 메인 사이니지의 글씨체, 세부 실명까지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센터의 이름 사이니지는 타일벽과 대조적인 금속을 펀칭해 벽에서 띄워 설치해서 입체감을 줬고, 각 상담실은 양각으로 입체감을 줬다.
센터의 이름 사이니지는 타일벽과 대조적인 금속을 펀칭해 벽에서 띄워 설치해서 입체감을 줬고, 각 상담실은 양각으로 입체감을 줬다.
곡면을 가진 상담실처럼 사이니지도 곡선을 가진 아치로 구성됐다.
곡면을 가진 상담실처럼 사이니지도 곡선을 가진 아치로 구성됐다.

심리 상담을 위한 공간에 들어서는 청소년들이 ‘나 상담 받아’ 하는 느낌보다 조금이라도 편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게 공간적으로도 세심하게 설계했다. 그 상담공간을 알리는 사이니지도 ‘상담실’ 같이 일반적인 시설 차원의 명칭이 되지 않도록 의뢰처인 강남구 보건소 상담선생님들과 건축가인 우리들이 머리를 맞댔다. 기능적인 점자를 더하긴 했지만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각으로도 인식을 넘어 친근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입체적인 사이니지 덕분이다.
두드림이나 어울림도 모두 상담실을 지칭한다. 공간의 주 마감재인 타일과 대조를 이루는 사이니지 재료로 중요한 정보를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조화를 이룰 수 있게 조정했다.
두드림이나 어울림도 모두 상담실을 지칭한다. 공간의 주 마감재인 타일과 대조를 이루는 사이니지 재료로 중요한 정보를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조화를 이룰 수 있게 조정했다.

환대의 메시지, 사이니지

층별 안내 같이 지극히 기능적인 사이니지에도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 공간을 조성하기로 마음먹은 의뢰처의 의지, 그런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 운영하는 선생님들의 마음이 담겨 간접적으로나마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사이니지다.
임대 건물의 정해진 영역 밖이어서 공간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사이니지 하나로라도 이곳을 이용하러 오는 청소년들을 환대할 수 있다.
임대 건물의 정해진 영역 밖이어서 공간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사이니지 하나로라도 이곳을 이용하러 오는 청소년들을 환대할 수 있다.

2층, 3층, 방향, 실 이름 이외에도 ‘지금 마음이 어떠니’, ‘오늘도 안녕’, ‘반가워 정말’ 같은 작은 문구를 더하며 명확한 방향을 화살표로 알려주는 것, 그 안이 이 공간의 가치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용자가 주도적으로 설치하는 사이니지
EUS+건축이 횡성의 공근초등학교 도서관과 교실 리모델링 후 만든 공간설명 다이어그램을 이용해 그 공간에 사이니지로 붙이신 것은 처음 공간설계 의뢰를 주신 선생님이었다. 이것을 보고 학생들은 또 다른 상상을 더한다.
EUS+건축이 횡성의 공근초등학교 도서관과 교실 리모델링 후 만든 공간설명 다이어그램을 이용해 그 공간에 사이니지로 붙이신 것은 처음 공간설계 의뢰를 주신 선생님이었다. 이것을 보고 학생들은 또 다른 상상을 더한다.
공릉청소년정보문화센터의 공간은 EUS+건축이 설계했지만, 이 공간을 채우는 목소리는 사용자인 청소년들에 의해서 사이니지로 곳곳에 더해지고 있다.
공릉청소년정보문화센터의 공간은 EUS+건축이 설계했지만, 이 공간을 채우는 목소리는 사용자인 청소년들에 의해서 사이니지로 곳곳에 더해지고 있다.

여전히 대부분의 사이니지들은 공간의 설계와 상관없이 추후 사용자나 의뢰처에 의해서 붙여지곤 하지만 때때로 사려 깊은 사용자들은 그 공간을 설계한 건축가 혹은 디자이너에게 묻거나 내부 활동의 센스를 발휘해서 새로운 사이니지를 덧붙이기도 한다.

공간과 어울리는 사이니지는 그 공간의 기능적인 면을 설명할 뿐 아니라 오랜 기억으로 남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런 장면 하나하나가 다음세대의 성장에 자양분이 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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