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P가 생기기 전에는 동대문운동장, 그 전에는?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4.03.20. 13:05

수정일 2024.03.20. 17:29

조회 3,045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67) 경성운동장에서 DDP까지
경성운동장에서 DDP까지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경성운동장에서 DDP까지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67) 경성운동장에서 DDP까지

따뜻한 봄기운이 완연해지면서, 축구, 야구 등 실외 스포츠 경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시야가 탁 트여있는 넓은 운동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근대 이후 서울에서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던 대표적인 공간이 서울운동장이었다. 1925년 경성운동장에서 시작하여, 1945년 서울운동장이 되었고, 1984년 잠실에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위해 종합운동장이 완공되면서 ‘서울’이라는 이름을 물려주고, 1985년에는 동대문운동장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이 자리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자리를 잡고 있다. 경성운동장에서 DDP까지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간수문과 하도감

1925년 최초의 근대식 운동장인 경성운동장이 세워지기 전인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하도감(下都監)과 이간수문(二間水門)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2008년 9월 동대문운동장 철거 과정에서 이들 유적이 발굴되면서 확인되었다.

이간수문은 한양도성 성곽의 일부로 남소문동천(南小門洞川)의 지류가 도성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든 수문(水門)이었다. 청계천 물길을 비롯한 도성 안의 모든 물줄기는 동대문 아래에 위치했던 오간수문을 통해 흘러나갔지만, 일부 지류가 이간수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나간 것이었다. 처음에는 홍예 및 교각 상부 일부만 나타났지만, 바닥까지 발굴하자 11월에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서울시에서 정비 복원 작업을 한 후 2009년 10월에 일반에 공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대문운동장 철거 과정에서 한양성곽과 함께 발견된 이간수문은 남산에서 흘러든 물이 나가는 문을 말한다
동대문운동장 철거 과정에서 한양성곽과 함께 발견된 이간수문은 남산에서 흘러든 물이 나가는 문을 말한다

하도감은 조선 후기 오군영(五軍營)의 하나인 훈련도감(訓鍊都監)에 소속된 관청이었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의 건의로 1593년 8월 처음 설치한 부대로, 직업 군인으로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훈련도감은 신문로 1가에 있었는데,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동쪽에 훈련도감터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훈련도감은 본청 이외에 서영(西營), 남영(南營), 북영(北營)과 하도감, 염초청(焰硝廳) 등을 부속 관청으로 두었는데, 하도감은 17세기 중반 효종 대에 처음 설치하였다. 세워진 곳은 조선시대 군사훈련 장소인 훈련원(訓鍊院:현재의 국립중앙의료원) 동쪽 옆 남부 명철방(明哲坊)으로, 현재의 을지로 6가 지역 옛 동대문운동장 야구장 자리였다. 

하도감을 이곳에 설치한 것은 서울은 동쪽이 지대가 낮아 방어에 취약한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훈련도감에서는 본청의 군사를 나누어 하도감에 주둔시켜 동쪽 방어를 강화시켰던 것이다. 1881년(고종 18) 5월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면서 하도감을 훈련장으로 주로 사용하였다. 
경성운동장의 전경을 촬영하여 제작한 사진엽서
경성운동장의 전경을 촬영하여 제작한 사진엽서

경성운동장의 탄생

1925년 10월 15일 서울에 당시 동양에서는 최대 규모의 국제경기장인 경성운동장이 세워졌다. 2만 2,700평의 부지에 공사비만 해도 15만 5천엔이 들어간 대규모 공사가 완공된 것이었다. 처음 ‘동궁성혼기념훈련원운동장’으로 이름을 지으려 했는데, 1924년 일본의 황태자 히로히토(裕仁:1901~1989)가 결혼을 기념하려는 의도가 컸기 때문이다. “특히 운동을 사랑하시는 동궁전하의 기념사업으로 운동장 설치계획을 세움은 적당한 처치”라는 발표서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름이 너무 길다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경성부에 있는 운동장이라는 뜻에서, 경성운동장이라 하였다. 공사의 설계와 시공 책임은 모두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1925년 5월 24일 기공해 10월 15일 완공하였다. 주경기장은 육상경기장으로 축구장으로도 활용되었다. 야구장, 정구장, 수영장 등도 갖춘 종합운동장이었다. 일제 강점 시기 이곳에서는 전조선종합경기대회, 조선자전거경기선수권대회 등 각종 대회의 경기가 열렸다. 경성과 평양의 축구 라이벌전이라 할 수 있는 ‘경평전(京平戰)’이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열렸다. 1946년 해방 후에는 경성운동장에서 이름이 바뀐 서울운동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평전이 열렸다.

야구장의 최고 스타는 이영민(李榮敏:1905~1954) 이었다. 배재고등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이영민은 경성운동장에서 크게 활약하면서, 원조 야구 레전드가 된 인물이다. 이영민을 기념하는 ‘이영민 타격상’은 1958년부터 그해 최고의 활약을 한 고등학교 타자에게 시상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2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서울시민체육대회 개막식
1982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서울시민체육대회 개막식

서울운동장과 동대문운동장

1945년 해방 이후 경성운동장의 명칭은 서울운동장으로 바뀌었다. 1962년의 보수공사로 육상경기장을 비롯 야구장, 수영장, 배구장, 테니스장 등이 국제규모의 운동경기를 치를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다. 1966년 대대적인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야구장에 야간 조명시설이 마련되어 야간 경기가 진행될 수 있었다. 1968년 메인스타디움인 육상경기장의 보수공사가 이루어져, 주경기장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었다.

1971년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로 시작한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가 열린 곳도 서울운동장이었다. 1971년 1회 대회 때는 한국과 버마(미얀마)가 결승전에서 0-0으로 비기면서 공동우승하였다. 1970년대 고교 야구가 붐을 이루던 시기, 서울운동장은 각 신문사가 주관하는 대통령기(중앙일보), 청룡기(조선일보), 봉황기(한국일보), 황금사자기(동아일보) 대회의 열기가 운동장에 넘쳐났다.

1982년 3월 27일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프로야구 개막 경기도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연장 10회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청룡이 역전승을 거둔 개막전은 올해로 43년째를 맞은 프로야구 성공을 암시해 준 승부였다. 1983년 한국프로축구 슈퍼리그 개막전도 이곳에서 열렸다. 서울운동장이 스포츠의 메카로 자리를 잡았던 시기 주변은 각종 스포츠용품을 파는 점포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1985년 1월 서울운동장의 이름은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뀌게 된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와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정부에서는 이들 경기를 차질없이 진행하기 위한 운동장이 1984년 완성하면서, 서울종합운동장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울운동장은 해방 이후 사용하던 명칭 대신에 ‘동대문운동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잠실 지역에 종합운동장 건립 계획을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 때부터였다. 1976년 9월 박정희는 주경기장과 보조경기장, 실내체육관 2개, 야구장과 정구장을 주요 시설로 하는 종합운동장 건설을 지시했다. 그러다가 1981년 9월과 11월에 제24회 올림픽경기대회 및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의 서울 개최가 확정되면서, 잠실 지역 서울종합운동장 건설사업이 더욱 진척되었다. 1982년 7월 야구장이 준공되었고, 4만 평에 수용인원 10만 명, 2층의 관람석을 갖춘 주경기장이 1984년 9월 29일 개장하였다. 1982년 잠실야구장 개장을 축하하여 열린 우수 고교 야구 초청 경기에서 현 국가대표팀 감독인 경북고교 류중일이 잠실구장 1호 홈런을 쳤던 기억이 난다.
서울라이트가 펼쳐지는 DDP
서울라이트가 펼쳐지는 DDP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DDP

경성운동장과 서울운동장을 거쳐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어진 ‘운동장의 역사’는 2003년 3월 동대문운동장의 폐장이 결정되면서 그 막을 내리게 된다. 건물의 노후화와 함께 도심의 운동장은 교통흐름에도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2003년에는 동대문운동장 축구장에 ‘동대문풍물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2007년 12월 야구장의 철거가 시작되었고, 2008년에는 축구장이 철거되었다. 이후 동대문운동장 부지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조성되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동대문운동장 기념관’을 만날 수가 있는데,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던 각종 대회와 행사 관련 사진, 운동장 관련 유물 및 운동장 주변의 삶을 회상할 수 있는 영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동대문 역사관에서 훈련원과 하도감, 한양의 물길, 수문들에 대한 정보와 유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동대문 역사관에서 훈련원과 하도감, 한양의 물길, 수문들에 대한 정보와 유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DDP는 2007년 디자인 서울 계획에 따라 역사 문화와 디자인이 조화된 관광지를 설치할 목적으로 시작하여 2009년 4월 착공하였다. 2014년 3월 현재 건물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쇼핑 시설을 겸한 전시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건물 구역은 크게 알림터(A), 배움터(M), 살림터(D), 어울림광장(디자인장터 포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설계안 ‘환유의 풍경’이 현상설계에서 당선되었는데, 비정형 곡면의 시공 난이도 때문에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친 끝에 현재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DDP 건물의 외관은 우리나라 어디에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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